Newsroh=신필영 칼럼니스트
인천 공항(空港)을 떠나면서 조금은 무질서(無秩序)했던 탑승수속(MIAT -Mongolian Airlines)마치고 Gate를 찾아서 앉았습니다. 서승(徐勝) 교수(敎授)는 내가 제일 젊은이 커피 봉사를 하겠습니다. 하면서 커피를 사 들고 왔습니다. 셋은 편안하게 커피를 가운데 두고 암울했던 옛 예기로 몽골을 기다렸습니다. 커피가 저만치 식어 버렸나 봅니다.
Ulaanbaater에서 Arkhangai로 떠나기전에 ‘몽골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이태준(李泰俊) 선생의 기념관(記念館)을 방문했습니다.
대암(大岩) 李泰俊(1883-1921)선생은 1883년11월21일 경남 함안군에서 출생하여 1907년 세브란스의 학교에 입학하고 1911년 제2회로 졸업(卒業)하였습니다. 1914년 Ulaanbaarter에 동의약국 병원(同義醫局 病院)을 개국하고 몽골의 마지막 화제(皇帝)인 Bogd Khaan(복드칸 8세)의 주치의(主治醫)가 되었습니다. 1921년2월 러시아의 백군에 의하여 일본의 첩자 누명으로 38세에 피살(被殺)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가묘(假墓)가 정원에 세워저 있습니다.
이지역 몽골한인회(韓人會)와 대사관 그리고 몽골 정부가 공동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몽골한인회와 연세의료원의 역할로 시작한 기념공원은 부지(敷地)가 2천평 규모로 2000년에 조성되었고 서울의 강남에 비유할 정도로 고급 아파트 등이 있습니다.
공원(公園)에는 기념관과 대암정(팔각정)그리고 선생의 假墓등이 잘 조성(造成)되어 있어 몽골과 한국의 상징적인 성지(聖地)가 된 것 같습니다.
李泰俊이 몽골의 교륜(庫倫), 지금의 Ulaanbaater로 오게 된것은 처삼촌(妻三寸)인 김규식( 金奎植)선생의 권유로 오게 되었는데, 당시 중국(中國)에서는 일본(日本)의 감시가 심하여 몽골의 대평원에서 군사훈련(軍事訓鍊)을 통한 의혈단(義血團)을 양성하는데 적지(適地)라고 생각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때 이미 김원봉(金元鳳)을 만나서 헝가리의 아니키스트인 <미자르>가 개발(開發)한 고성능(高性能)의 폭탄(爆彈)을 북경으로 운반하게 됩니다.
당시 몽골은 외교문물(外來文物)을 마구 받아들이면서 성병 등 전염병(傳染病이 유행(流行)하여 국민의 70%가 감염(感染)되는 사항이얶습니다
의료시설(醫療施設)이 빈약(貧弱)했던 그들은 <샤마니즘>에 의존(依持)하는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이태준(李泰俊)의 치료가 절실하였고, 그를 가리켜 ‘몽골의 슈바이처 李泰俊’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금(巨金) 200만루불을 독립자금(獨立資金)으로 제공(提供)하였습니다
여가서 우리는 곧바로 바라 보이는 勝戰記念塔인 Zaisan Menorial(붉은 영웅)으로 향하였습니다. 도중에 25m높이의 대형 <黃金淘金佛像>을 둘러 봤는데 한국불교도의 기증(?)이라고 합니다. 안내자(案內者)가 없이 돌아보는 처지(處地)라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어서 안타까울 때가 많았습니다.
뜨거운 햇살을 받은 금빛 불상은 마치 동자승(童子僧)같은 웃음 같아서 퍽 印象的이었습니다. 라마교의 象徵인 마니차(摩尼車)를 돌리리며 소원을 기원하는이도 보이지 않고 주변 정리가 잘 되어있지 않아서 매우 어수선해 보였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승전기념탄(勝戰紀念塔)에 올랐습니다. 몽골 인구 약 300만 중에 이곳 수도(首都) Ulaanbaater에만 140만이 살고 있는 도시(都市)가 한눈으로 볼 수 있는 높이에 있습니다
이러한 승전탑을 도시에서 올려다 보는 바로 앞에 대형건물(大型建物)에 가려서 겨우 반쪽만이 볼 수 있어서 한국(韓國)에서라면 절대(絶對)로 건축허가(建築許可)가 불가능(不可能)하다는 월진회(月進會) 강희춘(姜熙春) 부회장의 탄식(嘆息)입니다. 건축개발속도(建築 開發 速度)의 무리(無理_한 졸속행정(拙速 行政)의 결과인가 합니다
승전탑(勝戰塔)은 무려 270여개의 계단(階段)을 올라야 하는 높이에 있습니다. 1971년 소련군과 몽골군이 일본(日本)과 독일군(獨逸軍)을 물리친 승전기념탑(勝戰記念塔) 입니다. 소련의 Lenin과 몽골의 Sukhaater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도 보일 정도로 <소련과 몽골이 형제(兄弟)의 나라>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몽골이 공산화는 세계에서 2번째의 사회주의국가가 된 이유 였던가 봅니다
역시 주변이 어수선하고 탑등의 조형물들이 조잡해 보이는 아유가 무엇안지 모르겠습니다. 탑주변에서도 행상(行商)이 널려 있기도 하고, 휸련돤 독수리를 가지고 긴장갑을 끼어 올려보는 꾼들도 이색적(異色的)입니다.
그라나 승전탑(勝戰塔)의 역사(歷史)보다는 Ulaanbaater 市를 내려다 보는 파노라마 같은 전경(全景)이 마치 남산(南山)을 연상케 합니다.
도시내(都市內)에 있는 몇개인가의 화력발전소(火力發電所)에서 나는 연기가 미세먼지를 품고 날아다닐것을 생각하니 유쾌(愉快)하지 않았습니다.
습관(習慣)처럼 계단(階段)을 오르고 내릴때 마다 그 계단수(階段數) 세는 습성(習性)이 있는 터라 275계단을 밟고 내려 왔습니다
쉽지 않은 높이 였습니다. 나는 서울에 있는동안 지하철계단(地下鐵階段)이 나의 운동기구*運動器具)처럼 즐겁게 오르내리는 터입니다
하루 평균 400-500개단을 오르 내리니까요. 서울 시민(市民)의 건강(健康)은 지하철(地下鐵)이 지켜준다고 너스래를 떨기도 합니다
안부(安否)가 아니라 여행사(旅行社) 선전원(宣傳員)이 된듯 합니다
그래도 전에 잘 몰랐던 몽골의 슈바이처 이태준 선생(李泰俊 先生)의 독립운동(獨立運動)사를 찾아 볼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여러분들과 함께 하는 작은 행복을 나눈것이라고 자위(自慰)합니다.
다시 또 안부 하겠습니다
2017.7.26.
서울 선릉에서 申必泳
*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신필영의 삶의 뜨락에서'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s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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