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신필영 칼럼니스트
어제는 예약(豫約)도 없이 다행(多幸)하게도 영화 <군함도(軍艦島) 하시마섬 The Battleship Island>을 관람(觀覽)했습니다.
홀로이긴 했지만 다소 흥분된 기분(氣分)으로 <롯데월드>라는 최고층(最高層)을 다시 찾아 둘러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작년에 <죽여주는 여자>를 비롯하여 <그물> 그리고 <밀정> 등을 보고 두루 감동(感動)을 받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둘러보는 재미가 마치 미국 그것도 수도 워싱턴의 촌놈이 두리번한것이 역연(亦然)했습니다
좌석(座席) H열5번 을 어렵게 찾아 앉았습니다. 들어가다가 먼저와 앉은 젊은 여인의 발을 가볍게 밟는 실수를 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으나 들은척 만척하여 불쾌했지만 마음이 편치를 못했습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까지 바로 옆자리에 신경(神經)이 쓰여지기도 하고 시선(視線)을 잡기조차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영화관을 흔드는 고성(高聲)의 파열음(破裂音)과 함께 영화(映畵)는 시작(始作)되었습니다. 놀란 가슴으로 불편했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다시 이어서 또 한차레 뇌성(雷聲) 같은 소리가 연속적으로 가슴을 흔들어 댔습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뿜어대는 파열음(破裂音)
으로 장내(場內)는 엄숙해 졌고 커튼을 내리듯이 <게스트>의 소개(紹介)가 화면을 빠르게 저음(低音)의 음악 소리와 함께 소개되었습니다
<軍艦島>는 제작비(製作費)가 무려 220억이고, 그 상영시간(上映 時間)이 132분(分)이나 되는 영화로서 1945년 해방 직전 2-3개월전에 벌어진 내용인데 내가 바로 10살때의 일이였습니다.
그 내용은 일제의 징용(徵用)으로 끌려간 조선인들과 일본(日本)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당시 반도호텔 악단장과 그의 어린 딸과 그리고 악단의 대원을 끌고 간곳이 군함도의 석탄광(石炭鑛)이었습니다
나는 이 순간 가문(家門)의 수치스러운 과거(過去)를 떠 올렸습니다
어릴때의 기억이지만 지금 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저의 할아버지가 3형제 분이신데 그 중 셋째 할아버지는 일찍이 서울에 오셔서 경제적으로 성공을 하셨습니다. 그 셋째 할아버지가 徵用(징용)에 걸리셔서 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할아버지는 백방으로 <徵用>을 피(避)하시기 위하여 여러가지로 궁리(窮理)를 하신 끝에 못사는 배다른 의붓동생을 대신해서 내 보냈습니다. 물론 그 대가(代價)로 밭 몇뙈기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신 徵用되신 의붓 작은 할아버지는 몇년 안되어 해방(解放)과 더불어 귀가(歸家)를 했습니다. 젓먹이 아이 (나에게는 아저씨) 하나를 두고 징용에 갔다가 왔을 때는 내 아저씨는 어려서부터 자기 어머니(나의 할머니)로부터 과거의 얘기를 들어 소상하게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돌아 오신 작은 할아버지를 영등포(永登浦) 우리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 때 우리 아버지는 철도국(鐵道局)에 다니시면서 인천공업학교(仁川 工業學校)의 야간(夜間) 기계과(機械科) 실습교사(實習敎師)로 다니시면서 바쁘시게 사셨던 때 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셋째 아버지(셋째 삼촌)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던 이유가 바로 徵用事件(징용사건)이었습니다. 자기가 모셔야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던 어느날인가 (의붓) 할아버지가 매일 아침도 없이 일찍 어디론가 나가시곤 했습니다. 어머니가 살펴 본즉 그 할아버지는 엿판을 양쪽 멜빵에 지고 나가시는 것을 보시고 아버님께 이르셨고 대노한 아버지는 그 엿판을 집어던지는 사건이 일어 냤습니다. 엿장사를 나가신것이죠.
그렇게 해서 긴긴 세월이 갔습니다. 내 아버지를 비롯해서 두 작은 아버지도 고인이 되신지 오래 오래 되었습니다.
모두 고향 廣州(광주)에 묻히셨는데 그 산소를 매년 벌초(伐草)를 하고 관리(管理)를 아저씨(의붓할아버지 아들)가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식들을 잘 키워 두 아들이 대재벌회사(大財閥會社)의 부장급(部長及)으로 성공적(成功的)인 가정(家庭)을 꾸미고 살고 있습니다.
내 생애(生涯)에서 最初로 暴露(?)하는 <代理徵用家族史(대리징용가족사>를 너무 장황(長遑)하게 늘어 놨습니다.
이제 軍艦島(군함도)를 다시 보겠습니다. 석탄광(石炭鑛)에서 벌어지는 잔혹(殘酷)한 장면과 친일파와 부역자간의 격투를 보면서 아팠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인사를 구출하기위하여 위장투신한 장면, 그리고 극악한 일제보다도 조선인 내부의 갈등으로 벌어지는 비극적 장면에서 ‘조선놈은 어쩔수 없다’는 자학적 부르짖음은 애처러웠습니다.
일제 징용의 흔적들을 마지막에 집단 탈출의 숨막히는 처절한 장면이 스펙터클하게 가슴을 치는 영화입니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관중은 일어 날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옆에 앉아있던 아가씨의 흔적도 살아지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탄광(炭鑛)에서 凄切(처절)하게 벌어지는 장면으로 場內(장내)는 침묵(沈默)으로 양 손을 펴지 못하는 긴장(緊張)으로 무거웠습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신필영의 삶의 뜨락에서’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spy
- |
- 039d3744a5ba69040aa681439f1878cd70fd1277.jpg (File Size:87.0KB/Download:35)
- 46718bb7aef2b364e3a01b6b8205fff23bffc519.jpg (File Size:108.0KB/Download:37)
- 1743426ffd5bf0482442bb402d30a6db81119863.jpg (File Size:86.5KB/Download: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