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김현정 칼럼니스트(가주한미포럼 사무국장)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님께서 전해온 부고(訃告)입니다.
이렇게 일본은 할머님들이 한분 한분 떠나시기만 기다리며, 뒤로는 막대한 자금을 써서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위안부' 역사를 왜곡(歪曲)할 뿐 아니라, 아예 전 세계인들의 기억에서조차 지워버리기 위해, 기림비 철거, 역사교육 방해공작 등을 끈질기게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침묵하면, 우리 할머님들을 포함한 수십만명의 여성의 삶과 생명이 국가권력에 의해 조직적으로 유린되고 파괴된 중대한 반인륜 범죄는 영영 "전시 매춘부"나 "민간 업자들"이 저지른 여타 성매매업과 같이 치부(置簿)되고, 할머님들의 인권과 명예회복은 요원한 일이 되어 버릴 것이며, 책임을 묻지 못한 국가범죄는 또다시 반복될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치열한 활동을 펼쳐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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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화면 캡처>
2017년 8월 28일 오전, 하상숙 할머님 별세-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7살 때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일본군‘위안부’피해자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은 하 할머니는 평소 고국을 그리워해, 생의 마지막을 부모님이 묻혀 있는 고향 서산에서 보내기를 희망해왔다.
하 할머니는 1927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예산에서 자랐다. 열일곱 되던 해인 1944년 5월, 일본군‘위안부’ 모집책에 끌려가 중국 후베이성, 우한 한커우 일본군 위안소에 도착했다.
8개월 가까이 매일 일본군에게 고통 받다가 일본 패망 뒤 풀려난, 하 할머니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우한에 머물렀다. "일본군에게 수치를 당한 몸으로 고향 사람들을 볼 낯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후 지인의 소개로 만난 중국인과 결혼했고, 1962년 방직공장에 취직해 25년을 일했다. 1994년 남편과 사별한 뒤 막내딸과 함께 지내왔다. 한·중 수교 전까지 국적이 없던 하 할머니는 1994년 3월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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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할머니는 2016년 2월 15일, 중국인 이웃과 말다툼을 벌이다 2층 계단에서 밀려 넘어지면서 갈비뼈와 골반 등이 부러졌다. 사고로 중상을 입고 베이성 우한시의 한 병원 중환자실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넘어질 때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르면서 호흡곤란이 왔고 이외에도 심기능 저하, 급성 심부전증 등 각종 지병을 앓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고 후 약 두 달간 자신이 살고 있던 중국 중부지역 최대 병원인 우한(武漢) 퉁지(同濟)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한국에서의 치료를 원해, 가족의 뜻에 따라 2016년 4월 10일 정부와 민간이 합심한 국내 이송이 이뤄지게 됐다.
하 할머니는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야 하는 상태로, 앉거나 서는 움직임이 불가능해 이송은 중국 병원 출발부터 한국의 중앙대병원 도착까지 모두 누운 상태로 진행됐다. 중앙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된 하 할머니는 바로 중환자실에 입원해 필요한 검사와 치료를 받았다. 중앙대병원에서 집중치료를 받아, 병세가 호전돼 지난 2016년 8월 25일 퇴원했다
퇴원 후, 서울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일상 활동과 운동 등 재활적인 치료를 병행하시다, 2017년 8월 28일 오전에 타계하셨습니다.
하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239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국내 36명으로 줄었다.
빈소는 강동 경희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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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은 중국 거주 위안부 피해자 하상숙 할머니가 중상으로 힘들게 병마와 싸우신다는 연락을 받고, 할머니의 병원비를 2016년 3월 8일과 4월 7일 두 차례에 걸쳐 각각 1천만원씩, 총 2천만원을 지원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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