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김중산 칼럼니스트
1992년 1월 21일 김일성 주석은 김용순 노동당 국제비서를 미국에 보내 “북-미 수교만 해주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놀라운 제안을 했다. 2000년 말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은 남한에 미군 주둔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2009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김 위원장은 클린턴에게 “미국이 북한을 지속적으로 돕는다면 북한은 중국에 대항하는 미국의 강력한 요새가 될 수 있다”고까지 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그때 미국이 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여 수교했다면 북한 핵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이 1992년부터 북한 핵에 대한 특별 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은 1993년 NPT(핵확산금지조약)를 탈퇴하고 핵 개발에 박차(拍車)를 가하기 시작한다. 북한의 핵 개발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카터 전 대통령을 평양에 보내 1994년 10월 21일 북미 간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 낸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이 경수로 2기를 제공하기로 약속했고 클린턴 대통령은 어떠한 경우에도 제네바 합의를 미국이 책임지고 지켜나가겠다고 국제사회에 선언했다. 북한은 미국의 약속을 믿고 핵 개발을 중단했다.
하지만 미국이 북한에 제공하기로 한 천문학적인 경수로 2기 건설비용의 70%를 남한에 떠넘기고 일본엔 20%를 감당케 하고는 자기들은 고작 10%만을 부담하기로 한 제네바 합의는 2003년 끝내 파기(破棄)된다. 민주당 클린턴에 이어 등장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결국 북한은 핵 개발을 재개하였고 경수로 건설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된 남한은 수천억 원의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강대국의 횡포에 찍소리도 못하고 속절없이 당하기만 하는 우리 조국의 한 켠인 남한의 안타까운 모습은 최근 사드 배치 문제에서 보듯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경수로 건설 중단 후 북한이 핵 개발을 재개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미국은 한반도와 전략적 이해관계가 있는 주변국가들로 하여금 북한의 핵 개발을 공동으로 대처하게 함으로서 미국이 져야 할 경제적인 부담뿐만 아니라 북한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공동으로 책임을 지게 할 꼼수로 이른바 ‘6자회담’을 만들었다. 미국 속담에 “공동책임은 무책임(Everybody’s business is nobody’s business)”이란 말이 있듯 6자회담 참가국들은 한반도 분단체제를 관리하면서 자국에 유리한 안보 이익의 균형을 맞추려 골몰할 뿐 한반도 비핵화와 통일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한반도 분단을 내심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동상이몽(同床異夢)의 6자회담 열어봤자 아까운 시간만 축낼 뿐 아무 소용 없다. 내가 6자회담 무용론을 주장하는 이유다.
우여곡절 끝에 2005년 북한은 핵을 폐기하고 NPT로 복귀하는 대신 미국은 평화협정과 북한에 대한 핵공격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의 6자회담 ‘9.19공동성명’이 발표된다. 그러나 미국은 엉뚱하게도 성명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북한의 돈세탁 의혹을 제기하며 마카오 은행의 북한 계좌를 동결하고 대북 제재를 재개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06년 10월 북한은 제1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그러자 미국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해주겠다며 2007년 북한과 ‘2.13합의’에 이르렀지만 미국이 또다시 약속을 지키지 않아 합의는 백지화(白紙化)되고 말았다. 이후 북한은 핵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해 마침내 핵 보유국이 되었다. 그것은 미국에 의해 강요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남한 언론들은 미국이 번번이 약속을 안 지켜 북한이 어쩔 수 없이 자위적 수단으로서의 핵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한 진실을 전혀 보도하지 않아 대다수 남한 사람들은 지금도 미국이 아닌 북한이 약속을 어겨 경수로 건설이 중단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잘 먹고 잘 살길 바란다. 그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북한 인민들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미국이 북한을 괴롭히지 않았다면 오랜 인고의 세월 동안 허리띠를 졸라매가며 핵을 만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미국은 반문명적인 대북적대정책을 버리고 북한 인민들이 그들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어떻게 만든 핵인데 폐기를 입에 담는단 말인가. 북한이 미국의 압박과 제재 때문에 핵을 만들었으니 미국이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 한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핵은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을 일삼는 미국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아 핵을 폐기하는 순간 미국이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미국이 할 일은 북한이 핵 보유국임을 인정하고 (인정 안 해도 그만이지만)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한 후 북미 수교를 통해 단계적인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논의를 개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근본적인 책임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할 말이 태산 같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분명 “미국에 할 말은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방미 중 그의 언행은 영 딴 판이었다. 초강대국 미국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북한을 보라. 무릇 약소국가의 지도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민족자존감을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데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고작 6.25때 흥남부두가 어땠고 미국 덕분에 태어났다는 둥의 문 대통령의 불필요한 발언은 북한 정치범수용소 운운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조금도 다를 바 없어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한반도 평화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제일 먼저 북한에 가겠다”던 결기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사드 배치와 남북 문제에 지나치게 미국의 눈치를 살피고 휘둘리는 문 대통령의 비굴한 모습에서 그가 방미 중 방명록에 남긴 ‘대한미국’이 단순한 실수에 의한 해프닝이 아닌 듯 싶어 걱정이 크다.
우방과의 동맹은 국익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지만 민족은 영원하다. 민족보다 우선하는 동맹은 없다. 문 대통령은 미국 주도하의 어설픈 국제공조에 편승해 현실적으로 사실상 불가능한 북핵 폐기란 망상(妄想)을 버리고, 대신 남북간의 긴밀한 민족공조를 통해 분단을 영구화하려는 외세를 몰아내고 통일조국을 이룰 때까지 북한이 핵을 보전하고 지혜롭게 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백두에서 한라까지 우리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는 날 보전된 핵이 찬란한 통일조국의 만년대계와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게 되길 소망한다.
*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중산의 LA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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