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김영옥중학교’를 가다
Newsroh=박기태 칼럼니스트
미국에 한국인 이름으로된 공립학교가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올 여름 미국 방문때 저를 가이드한 동포가 소개해준 가장 인상 깊었던 만남이 있었습니다. 바로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 고 김영옥 대령입니다.
2009년 9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한 공립중학교가 개교했습니다.
그런데 로스앤젤레스 교육위원회가 이 공립학교의 이름을 "김영옥 중학교" 라고 만장일치(滿場一致)로 정했다고 합니다.
미국에 김영옥 중학교라니. 이 학교는 미국의 모든 지역에서 한국인 이름으로 된 최초의 공립학교입니다. 궁금했습니다.
김영옥 이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길래 미국 사회가 미국의 공립학교에 이름에 넣을 정도로 기억하는 것일까?
2011년 5월 30일 미국의 현충일인 메모리얼 데이를 기념해 미국의 유명 포털 사이트 MSN 닷컴(msn.com)은 미국 전체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Famous War Heros) 16명을 선정했습니다.
MSN닷컴은 미국 독립전쟁과 세계 2차 대전, 걸프전까지 미국 역사 시작부터 미국 최고의 전쟁영웅 16명은 선정해 시대별로 업적과 함께 선정 이유를 자세이 소개했습니다.
1. 조지 워싱턴
2. 너대니얼 그린
3. 로버트 리
4. 필립 커니
5. 율리시스 그랜트
6. 조지 커스터
7. P.G.T 뷰리 가드
8.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
9. 더글라스 맥아더
10. 오디 머피
11. 조지 패튼
12. 월리엄 딘
13. 김영옥
14. 존 매케인
15. 존 케리
16. 노먼 슈워츠 코프
그렇다면 16명의 전쟁영웅에는 어떤 사람이 포함되어 있을까요?
우선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미국 독립전쟁의 총 사령관인 조지 워싱턴, 그리고 미국의 남북전쟁 남군 사령관 로버트 리, 미국 34대 대통령이자 2차 대전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 하워, 2차 대전 연합균 남서태평양 사령관이자 한국전쟁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등 미국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역대 대통령 뿐만 아니라 독립전쟁, 2차 대전 영웅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16명 이름중에 바로 한국인 이름 김영옥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미국 전쟁영웅 16인에 뽑힌 영웅이었습니다.
MSN에는 전쟁영웅 16명에 소개된 김영옥에 대한 업적(業績)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영옥은 191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한국계이다. 그는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하고 예편했으나 한국전쟁이 터지자 재입대했고, 한국전쟁 당시 한국어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해 통역장교가 되는 대신 보병부대에 들어갔다. 김영옥은 여러 차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후 미국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전투대대장이 됐다".
미국 전쟁 영웅 김영옥 대령!
김영옥 대령은 미국 정부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 전쟁 당시의 업적에 따라 특별무공훈장, 은성무공훈장, 동성무공훈장 등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가 받은 특별무공훈장은 미국 최고무공훈장인 명예무공훈장(Medal of Honor)에 이어
훈격 2위인 훈장으로 미국 사회가 얼마나 김영옥을 존경하고 기리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뿐만 아니라 김영옥은 미국을 넘어 1946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무공훈장, 2003년 프랑스 레종 도뇌르 무공훈장, 2005년 한국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김영옥은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한국등 4개국 정부 무공훈장을 포함해 19개 훈장과 메달을 받은 전쟁 영웅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역사 최고의 전쟁영웅이자, 이탈리아, 프랑스 한국에서도 인정받는 김영옥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전 미국의 포털 사이트 구글에서 Young-Oak Kim 이란 이름을 검색해보았습니다.
첫 화면에 미국 100 보병 대대 참전용사 교육 센타 웹사이트(100th Infantry Battalion Veterans)에 실린 김영옥 이야기가 나와있었습니다.
미국 100 보병 대대는 2차 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이 주축(主軸)이 된 미국 보명 대대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당시 한국이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인 상황에서 한국계 미국인 김영옥이 일본계 미국인을 지휘하는 장교로 활동했다는 것이었습니다.
1943년 2월 김영옥이 처음 이 부대로 장교로 발령받자 당시 100대대 대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부대로 보내주겠다"
그러자 김영옥은 말했습니다.
“대대장님, 당신이 잘못알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고, 나의 부하들은 일본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미국인이고, 나는 미국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미국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사실 한국계 미국인 장교과 일본계 미국인 사병들이 함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941년 일본 제국주의가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 하자, 미국은 큰 충격에 빠졌고 미국내 반일 감정을 높아졌습니다.
미국은 일본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고, 1942년 2월 19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국가안전문제에 위협이 된다는 명목으로 미국에 있는 일본계 미국인 모두를 특별 수용소에 억류(抑留)하라는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했습니다.
이 조치로 약 11만 명에 이르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특별 수용소등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그러자 일본계 미국인 청년들이 미국내에서 자신들의 재산권과 안전을 지키고, 미국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고자 미군 자원입대를 하였는데, 미국은 이들을 미군 100대대로 한데 모았습니다.
미군에 입대하는 일본계 미국인 청년들이 모인 대대가 바오 442연대 100대대인데, 이 부대 제2중대장이 바로 김영옥입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 지배하던 시기라서 일본계 미국인이 주축인 대대의 중대장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사실은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계 미국인들이 그의 리더쉽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김영옥은 탁월한 리더쉽으로 일본계 미국인 전우들의 믿음을 얻었습니다.
김영옥은 총알이 빗발치는 적군과 총격전 속에서 독일군 진지로 침투해 독일 나치 기관총 벙커를 무너뜨리고, 누구도 예상못했던 새벽에 부하 한명과 적 진지에 들어가서 적군 두 명을 생포해 전투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김영옥이 이끄는 부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제2차 대전에 참가해서 로마 해방을 위한 독일군을 생포했고, 특히 인명피해 없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최고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2차 대전의 전쟁터에서 김영옥과 함께 한 100대대 일본계 미국인 청년들은 "전쟁터에서 김영옥과 함께 한다면 우리는 살수 있다" 라는 믿음이 들 정도로 김영옥의 리더십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信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미군 100대대에 속한 일본계 미국 청년들의 영웅이었습니다.
일본계 미국인에게 얻은 김영옥의 리더쉽은 훗날 그가 미국계 일본인을 움직여 미국 의회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통과에 기여하게 합니다.
2007년 미국 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결의안이 통과되는 역사적인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통과하는데는 일본계 미국인인 마이크 혼다 전 미국 연방 하원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일본계 미국인인 마이크 혼다 전 의원은 2007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하원 결의안(H.R. 121) 채택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또한 2015년 4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을 앞두고 일본군 위안부 범죄에 대한 사과를 촉구하는 초당적 연명 서한을 이끌어내었습니다.
그런데 마이크 혼다 전 미국 연방 하원을 도와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미국 하원에 통과되는데 숨은 주역이 바로 김영옥입니다.
그렇다면 김영옥이 어떻게 마이크 혼다를 도와 미국 하원에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하는데 기여했을까요?
일본인들이 많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기반을 둔 일본계 미국인 마이크 혼다 의원이 일본군 위안부 관련 결의안을 미국 하원에 통과시키려고 하자 수많은 일본인들로부터 집중적인 공격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마이크 혼다 의원은 김영옥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마이크 혼다는 미국내 일본인 참전 군인회에 영향력이 큰 김영옥이 움직인다면 일본계 미국인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김영옥은 마이크 혼다의 부탁을 받고 바로 자신의 옛 부하들이 속해 있던 미국내 일본인 참전 군인회를 찾아 설득했습니다.
"전우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위해 세계 2차 대전에서 싸웠는지 기억해주십시오!"
"우리가 싸운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 두나라간의 정치, 역사 문제가 아니라, 세계 2차 대전때 힘이 없어 희생되었던 여성들의 인권 문제입니다!"
김영옥의 설득에 감동이 된 미국내 일본인 참전 동지회는 결국 마이크 혼다를 도와 일본계 미국인들의 설득하였고, 이를 통해 미국 하원에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영옥은 또한 한국을 전쟁에서 구하고, 전쟁 고아의 아버지였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나자 김영옥은 군대를 나와 미국에서 세탁소 사업을 시작해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군대에 다시 입대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한국에서 6.25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국을 구하고 싶다는 생각에, 미군에 다시 입대해 제7보병사단 31보병연대 정보참모로, 야전 지휘관으로 활동했습니다.
6·25전쟁에서도 그는 2차 세계대전때처럼 연전연승을 거듭하는 탁월한 전투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38선 중부전선을 60km나 북상시키는데 기여했고, 미군 중에서 최초로 백인들을 지휘하는 유색인종 대대장으로도 임명되었습니다.
한국을 향한 김영옥의 사랑이 대표적으로 드러난 사례는 그가 "경천애인사" 라는 고아원을 후원하며 고아원에 있는 전쟁 고아들을 부모처럼 보살폈다는 점입니다.
그는 한국전쟁의 최전선에서 생과 사를 가르는 전투의 한가운데에서도 <경천애인사> 고아원을 후원해 500명의 전쟁 고아를 보살폈으며, 한국 전쟁후에도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 고아들을 돌봐 "전쟁 고아의 아버지"로도 불리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인 전쟁고아를 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 받았으며, 2006년 2월에는 6 25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태극무공훈장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대령으로 진급할까지도 미국식 이름으로 바꾸지 않으며 한국식 이름을 지키며 한국에 대한 사랑과 한국인에 대한 정체성을 일평생 가슴에 품었습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그의 한국사랑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63년 군사고문으로 한국을 다시 찾은 김영옥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길은 한국의 국방력 향상에 있다고 판단하여, 한국군 최초의 미사일 부대 창설과 한국 방어계획을 구축해나갔습니다.
1972년 대령으로 미군 생활을 마친 김영옥은 이후 미국에서 봉사단체를 설립해 3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미국내에 가난한자, 핍박(逼迫)받는 여성, 노인등 아프고 굶주리고 연약하고 힘든 약자들을 도우는 봉사활동을 하다 2005년 사망해 미국 국립묘지에 안장(安葬)되었습니다.
김영옥,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세계를 구한 영웅이자 6.25 한국전쟁에서 한국을 구한 영웅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일본계 미국인 참전군인으로부터 존경받는 리더이자 미국인으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일평생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웠고, 또한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는데 자신의 삶 전부를 바쳤습니다.
그는 한국인에게도 일본인에게도, 미국인에게도, 세계인에게도 모두 다 존경받았던 위대한 리더였습니다.
앞으로 전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 청년들과 함께 김영옥 대령의 삶과 꿈을 담은 영상과 인터넷 사이트를 제작해 전 세계에 알려나가고자 합니다.
또한 미국 초중고교 교과서에 김영옥 대령의 이야기가 반영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미국 교육계에 알려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곳곳의 한인 청년들과 세계 청년들이 김영옥 대령처럼 21세기 세계를 변화시켜나가는 리더가 되길 꿈 꿉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세계로 가는 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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