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잊혀진 전쟁'의 사라져가는 사람들(2)
* 이 기사는 한국 언론진흥재단의 후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 중앙플로리다 한국전 베테랑스협회원 빌 러셀(Bill Russel) |
"한국전 베테랑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있다.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라는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전은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무시당한 전쟁(Ignored War'이다"
자신의 나이를 80대 후반이라고만 밝히는 한국전 베테랑이자 종군기자였던 빌 러셀씨의 말이다. 1951년 6월부터 1953년 3월까지 참전한 러셀씨가 한국전을 굳이 '무시당한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미국이 그동안 치른 다른 전쟁들과는 달리 미국 사회가 한국전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제쳐두었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러셀씨가 소개한 한 한국전 참전 베테랑의 사례는 이를 잘 말해준다. 한국전에 참전했다 2년여 만에 막 돌아온 친구가 어렷을 적부터 드나들던 동네 편의점에 들렀다고 한다. 제법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얼굴로 가게 주인에게 인사를 했더니 "그동안 어디 갔다 왔냐"고 묻더란다. 이때다 싶어 "한국전에 참전하고 돌아왔다"며 자랑스런 표정으로 말하니 주인은 "어 그렇군!" 하고는 딴청을 피우더란다. 머쓱해진 그는 그때부터 다시는 주변에 자신이 한국전 베테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러셀씨는 이와 비슷한 예가 수도 없이 많다고 했다.
한국전이 '무시당한 전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러셀씨는 두 역사물 작가의 글을 통해 설명했다. 프리랜서 역사 작가 토리아 세필드(Toria Sheffield)는 "우리가 베트남전이나 2차대전처럼 한국전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기"(Understanding why we don't talk about Korea like Vietnam or WWII)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었다,
"미국민들은 네 번째 혈전을 치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2차대전때처럼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를 부르는 분위기도 없었다."
또다른 작가 멜린다 패쉬의 말은 한국전이 미국사회에서 무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더욱 상세하고 극명하게 전해준다.
"한국전 참전 베테랑들은 2차대전이나 베트남전 참전 베테랑들과는 달리 자신들이 치른 전쟁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고 무덤덤하게 일상으로 되돌아 왔다. 부인이나 자녀 등 가족들에게조차 말하려 들지 않았다. 2차대전이나 베트남 전쟁처럼 분명한 승리나 패배를 가져오지 않은 전쟁에 대해 그들은 말할 만한 것들이 없었다… 미국이 짧은 기간에 엄청한 희생과 비용($67 billion)을 치르고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로 전쟁에 승리했을 때나 패배했를 때는 그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과 토론이 지속적이고 활발했을 터이지만, 한국전은 이도 저도 아닌 '정전'으로 머물러 버렸기 때문에 대중의 집단적인 주목을 받지 못했고, 결국 뇌리에서 잊혀진 전쟁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은 당시의 미국 상황에서 '성가신 전쟁'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는 '무시당한 전쟁'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 베테랑들은 이 같은 한국전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고 있다. 직접 참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남은자'가 되어 이런 저런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적으나 국가적으로나 도의를 벗어나는 일이다.
▲ 지난 6월 25일 올랜도 에지워터 베테랑스 클럽에서 열린 한국전 67주년 기념행사에서 고령의 한국전 베테랑이 보행 보조장비를 의지 하여 입장하고 있다. |
딴은, 존재론적으로 기억되지 않는다고 해서 마냥 스러지고 마는 것이 인간은 아닐 터이다.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기억되기를 바라고, 이에 따라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는 본질적 속성이 있다. 인간이 남긴 무수한 역사적 흔적들은 바로 실존에 대한 인간의 투쟁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무시당한 전쟁의 무시당한 사람들은 유대 역사 기록에 나오는 '남은자'들처럼 뭔가를 세상에 말하고자 했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잊혀지기를 강요받았던 이 베테랑들은 맥아더의 명언에 걸맞게 '사라질뿐 죽지 않기 위해', 러셀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무시 당하지 않기 위해' 여러 흔적들을 도처에 남겨왔다.
'기억과의 전쟁'을 벌이는 사람들
한국전 베테랑들은 다른 전쟁의 베테랑들에 비해 비교적 늦게 기억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기억되기 시작한 두 번의 큰 계기가 있었다. 첫번째 계기는 한국전이 끝난 지 28년이 흐른 1985년 처음으로 미국 전역의 한국전 베테랑들의 모임인 '한국전 베테랑협회(Korean War Veterans Association, Inc)'를 발족한 것이다. 또다른 계기는 이보다 10년 뒤인 1995년 수도 워싱턴에 한국전 메모리얼(Korean War Memorial)을 건설한 것이다.
한국전 베테랑 윌리엄 노리스(William T. Norris)는 1985년 6월 25일 뉴욕 주정부에 한국전베테랑협회(Korean War Veterans Association, KWVA)로 창립.등록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한 달 후인 7월 26일 그를 포함한 40명을 창립 발기인으로 첫 모임을 가졌다. 1986년 1월에는 <그레이비어즈>(Graybeards)라는 공식 잡지를 발행하여 한국전 베테랑들의 소식을 내외에 알리기 시작했다.
1985년 당시 초기 멤버들이 밝힌 창립 취지에는 왜 이들이 뒤늦게서야 한국전베테랑협회를 창립했는지 잘 드러나 있다. 대략 요악하면, 자선을 위한 목적으로 한국전 참전 베테랑 협회를 조직.선양.유지하여 회원 상호간 소통과 유대관계를 제공한다는 일반적인 목적과, 경제사정이 어려운 참전 베테랑과 그 유족들을 돕고, 한국전 참전 베테랑 기념물의 설립을 후원하기 위한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 전미 한국전참전베테랑협회(U.S. KWVA)가 발행하는 잡지 <그레이비어즈>(Graybeards) 6권 표지 사진. 베테랑협회는 이 사진을 로고처럼 사용하고 있다. ⓒKWVA |
이를 간단하게 요약한 '미션 스테이트먼트(Mission Statement)'를 보면 한국전 참전베테랑협회의 지향점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대로 소개하면 ▲국가방위(DEFEND our Nation), ▲베테랑 돌보기(CARE for our Veterans), ▲유산의 영구화(PERPETUATE our Legacy), ▲실종 및 사망 전우들을 기억하기(REMEMBER our Missing and Fallen), ▲메모리얼의 유지(MAINTAIN our Memorial), 그리고 ▲자유한국 지원(SUPPORT a free Korea) 등이다.
특히 이들이 벌인 한국전 참전 베테랑 기념물 설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테랑협회는 전국에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이나 조형물을 설립하기 위해 각종 모금행사는 물론 지역의 연방 상하원 의원들에게 활발한 로비 활동을 벌여 연방정부 보훈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냈다.
이들의 '흔적 남기기'는 전쟁 당사자인 한국민들조차 놀랄 정도로 줄기차게 전개되어 2015년 5월 현재 미 전역 41개 주에 무려 112개 이르는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 또는 기념 조형물들을 구축했다. 이 같은 수치는 미 재향군인회 사이트와 연방 보훈처 사이트 등을 검색한 결과 드러난 것이고, 2년이 흐른 현재의 집계는 업데이트 되지 않아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주별로 살펴볼 경우, 가장 많은 한국전 메모리얼 파크를 가진 주는 뉴욕주와 메사추세츠주로, 각각 11개를 기록하고 있다. 미네소타주와 미주리주가 각각 8개, 참전베테랑들의 은퇴지로 인기가 높은 플로리다는 6개, 펜실베이니아 5개, 캘리포니아 4개 순이었다. 이들을 포함하여 2개 이상 가지고 있는 주는 24개주였다.
주별로 이 같은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이나 조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과는 별도로 1995년 수도 워싱턴에 조성된 한국전 베테랑 메모리얼(Korean War Veterans Memorial) 파크는 시간이 갈수록 방문객이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방정부의 지원과 홍보 탓도 있지만, 각 주의 한국전 베테랑 지회가 벌이고 있는 방문 프로그램들이 활성화 되면서 생긴 성과다.
워싱턴을 갈 때마나 가족들과 함께 메모리얼 파크를 방문한다는 플로리다 올랜도 거주 로버트 웨닝거씨(86)는 "비옷을 입고 거닐고 있는 모습의 동상들은 바로 나를 본 떠서 만든 것 같이 생생하다"면서 "온통 먼지 투성이에 메마르고 헐벗은 이름모를 산야, 혹한에 동료들이 죽어간 것을 생각하면 전쟁의 참혹함이 아프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그는 "3년 전에는 40여 명의 참전 동료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왔는데, 이제 그 가운데 반절은 죽거나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며 "내년 아니면 그 다음해에 다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 1995 년에 세워진 워싱턴 한국전 베테랑스 메모리얼 파크. ⓒKWVA |
한국전 참전 베테랑들이 잊혀지기를 거부하며 벌이는 활동은 기념공원 조성이나 기념물 건축이라는 분명한 흔적으로 드러나게 되었지만, 각 지회가 벌이는 활동이 밑밭침이 되고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매년 한국전이 발발한 6월 25일과 정전일인 7월 27일은 물론, 미국 정부에서 공휴일로 정한 메모리얼 데이(5월 마지막 주 월요일), 베테랑스 데이(매년 11월 11일)에는 지역적으로 또는 전국 규모로 모인다.
그러나 이 같은 공식 모임 외에도 베테랑들은 지역 협회별 모임을 따로 갖는다. 미국은 1,2차 대전을 비롯, 유난히 대형 전쟁을 많이 치른 나라이다보니 각각의 참전 베테랑들 모임이 수없이 많고, 당연히 그 가운데 한국전 참전 베테랑 모임들도 존재한다. 각 지역 한국전 베테랑들은 서너 달의 혹서나 혹한 기간을 빼놓고는 매월 정기 모임을 갖거나, 한국전 베테랑 옷입기, 훈장이나 뱃지 달기, 모자쓰기 등을 통해 잊혀지지 않기 위해 힘쓰고 있다.
지난 20여년 간 '모닝 캄(Morning Calm)'이라는 잡지를 손수 발간하며 중앙플로리다 지역의 한국전 베테랑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해온 러샐씨는 어쩌다 코스코(Costco)같은 도매점에 들렀다가 '별난' 경험을 한다. 자신이 쓰고 있는 한국전 베테랑 모자를 보고 일부러 닥아와서 "당신의 희생에 감사한다"는 말을 건네는 여성들이 있는데, 아마도 베테랑 가족들일 것으로 짐작한다. 그는 '존재'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만족하려 애쓴다.
중앙플로리다 한국전 베테랑 2093지부 찰스 트래버스 회장(85)과 서기인 러셀씨는 참전 베테랑 행사때는 물론 외출을 할 때에도 한국전 훈장이나 베지, 모자를 쓰고 다닌다. 이들은 다른 회원들에게도 '공공장소에 나갈 때에는 어떤 표식이라도 좋으니 한국전 참전 베테랑 표식을 하고 다니라'고 당부한다.
러셀씨는 "베테랑 협회가 항상 내세우는 모토는 '이미지를 살아있게 하라(Keep the Image Alive)'이며, 다른 협회들도 어떤 형대로든 이 같은 노력을 하고 있다"면서 "모두가 알다시피 이 일을 할 날이 우리에게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고 말했다.
▲ 플로리다 북서부 펜사콜라 지역의 한국전 메모리얼. 미 전역에는 이같은 한국전쟁 메모리얼이 112개나 있다. |
매일 360명씩 사라져 가는 사람들
미 연방 보훈처의 2010년 통계에 따르면 미 전체 생존 베테랑 2168만 명 가운데 한국전 베테랑은 250만7000명에 이른다. 1957년 7월 정전으로 전쟁이 막을 내린 후 한국전 참전 베테랑이 572만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60년이 흐르는 동안 반수 이상이 사망한 것이다.
2013년 CNN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한국전 생존 베테랑 수는 200만 명으로, 3년 동안 50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미주한국일보>가 연방 센서스국의 아메리칸 지역사회 조사자료를 근거로 분석한 자료는 이와 다소 차이가 있다. 2010년 생존 베테랑 216만8600명에서 2013년에는 178만1000명으로 집계 되었다. 38만7600여 명이 자연사 또는 질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미 연방 통계청이나 보훈처 또는 한국전베테랑협회(KWVA)도 정확한 통계치를 갖고 있지 않아, 일단 안전하게 <미주한국일보>가 조사한 낮은 사망자 수치로만 계산한다 하더라도 한국전 베테랑은 3년 동안 매년 13만 명 이사망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월 1만800명, 하루 360여 명이 사망한 셈이다.
2013년 당시보다 고령자가 더 많아진 현재는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수의 베테랑이 사망하고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2017년 9월 현재의 생존 한국전 베테랑 수를 단순 추정해 보면 아무리 높게 잡아도 126만 명 정도가 된다. 이 추세대로라면 10년 후쯤에는 전국적으로 불과 수천 명 또는 수백 명 정도의 베테랑이 남게 될 것이다.
기자가 거주하고 있는 플로리다만 하더라도 5,6년 전과 비교해 매년 벌어지고 있는 한국전 행사가 갈수록 썰렁해 지고 있는 모습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2010년에 열린 한국전 기념행사에는 참전 베테랑 70명과 가족을 포함하여 150여 명이 몰렸으나 올해 한국전 행사에는 참석자가 30명을 채 넘지 않았다.
중앙플로리다 지역 참전 베테랑 협회 서기인 러셀씨는 "올해에만 8월까지 500명이
사망했다. 나 자신은 물론 10년이 지나면 몇 명이나 남을지, 베테랑 협회가 존재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매월 정기 모임에 150명 정도가 모여 북적였던 때도 있었다"며 현재는 임원 3,4명과 일반 회원 6,7명 모두 합하여 참석자가 10명을 넘지 않는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건강이 안좋아서 운전조차 할 수 없는 동료들이 갈수록 늘고 있는 것이 슬프고 안타깝다고 했다.
올랜도 한국전 참전 베테랑들은 1월부터 5월까지 월 모임을 갖고 6,7,8은 쉬고 9월에 다시 모임을 재개한다. 하지만 임원들 모임은 한달도 거르지 않는다. 럿셀씨는 잡지 모닝캄 발간을 통해 회원들에게 협회 소식을 알리기에 힘쓰고 있다. 매월 잡지를 내서 우선 이메일로 보내지만 읽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 가운데는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서 일반 메일로 보내기도 한다.
▲ 지난 6월 25일 올랜도 에지워터 베테랑스 클럽에서 열린 한국전 67주년 기념행사에서 한국전 참전 미군 베테랑이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고 있다. |
'무시당한 전쟁'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아직은 100만명 이상이 남아 있지만, 언젠가는 단 한 사람도 남지 않는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사라질 지언정 잊혀지지 않기 위해 죽는 날까지 '남은자' 역할을 하려고 들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지킬만하며 전수할 만하다고 여겨진 '가치'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어 놓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국가에 대한 충성'일 수도 있고, 흔히 말하는 '자유의 수호'일 수도 있겠다.
전미 한국전 베테랑협회 토마스 스티븐스 회장(84)의 쓴소리에는 한국전 베테랑들이 잊혀진 전쟁의 잊혀진 존재들로 살면서 받은 섭섭함이 짙게 묻어 있다.
"한국전 베테랑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큰 선물도 환영 팡파르도 없었다. 우리들이 어디에서 무슨일을 하고 왔는지 묻는 사람도 없었다. 일반인들은 우리가 한 일에 대해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한국도 전후 복구에 바빠서 자신들을 공산주의로부터 구하기 위해 희생한 베테랑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 십년간 무시당한 전쟁 에서 잊혀져 살아온 한국전 베테랑들은 몸과 마음의 상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누가 이 사람들을 모른다고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