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플레이가 있다. 조던을 제외한 선수는 모두 한쪽에 가 있고, 조던만 반대쪽에 있는 것이다. 그리되면 조던은 쉽게 한 사람을 제칠 수 있다.
많은 인문사회과학의 논문들은 수 많은 다양한 의견을 한쪽으로 몰아 버리고, 자신만 반대쪽에 서서 쉽게 누군가를 제쳐 버리려 한다. 석사학위 논문 정도에서는 그런 걸 그냥 용서해 준다.
박유하는 자기를 제외한 사람들을 다 반대쪽에 몰아 버린다. 그들은 위안부의 실태를 모르거나 왜곡하는 사람들이 된다. 그러나 그녀의 바램과는 달리, 그녀가 알고 있는 정도는 우리도 알고 있다. 위안부와 군대 사이에는 민간 포주가 있었다는 거, 위안부는 위안의 댓가로 돈을 받기도 했다는 거. 때에 따라 위안부와 군인들 사이에 어떠한 연대 의식이 있었다는 게 그것이다.
그걸 알기 위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지루한 책인 제국의 위안부를 읽을 필요까지는 없다. 채시라가 나왔던 여명의 눈동자에 이미 잘 나타나 있고, 성적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연대 의식에 대해서는 조재현이 나오는 나쁜 남자에도 잘 그려져 있다.
범죄 사실을 적시할 때, 검사는 가장 센 잘못만을 적시한다. 연쇄 강간 살해범의 죄를 물을 때, 그가 실패했던 것, 그가 맘에 들어서 특별히 인간적으로 대해줬던 피해자에 대한 언급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
나찌의 죄를 묻는데 있어, 나찌의 협력했던 부역자의 존재가 나찌의 잘못을 상쇄하는 것도 아니다. 부역자가 존재하므로 나찌 잘못을 추궁하는 사람이 보다 유화적인 방법을 취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박유하는 위안부에게 정서적 연대감을 가졌던 일본군 이야기를 잔인했던 조선인 포주와 대비하여 길게 이야기한다. 매춘에도, 강간에도 남자들은 여성에게 강한 의존감 또는 정서적 친밀감을 느낄 수 있다. 피해 여성도 일시적으로 가해자에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동지적인 관계라고 규정한다면, 세상에 모든 남녀 관계는 동지적이다.
위안부의 불행을 만든 것은 민족요인보다도 먼저, 가난과 남성우월주의적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였다는 점이 자기 책의 포인트였다고 한다. 가난과 남성우월주의가 핵심이라고 본 박유하는 벌써 위안부를 매춘으로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려고 했던 국가주의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다뤄지고 있지도 않다.
극단적 형태의 폭력이 위안부 징집, 위안, 해산 과정에서 일본군에 의해서 자행되었다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박유하도 부인하지 않는다. 물론 박유하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이 조선인에게 또는 국가가 개인에게 여러가지 형태의 폭력을 가했다면, 조선인 또는 개인은 가장 큰 폭력의 형태 및 사례를 가지고 일본이나 국가에게 항의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 말고 작은 폭력도 있었기 때문에 큰 폭력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화해을 위해 부당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도대체 뭘까?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를 한쪽으로 몰아 버리는 석사학위 논문정도의 학자적 양심이거나, 자신의 밥그릇(일본)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종합적 사고가 부족한 것이거나 그 셋 중에 하나일 것이다. (윤영호 본지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