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는 엄격하신 분으로 다정다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위로 오빠 세 명은 항상 아버지를 어려워했다. 나 역시 20대 중반까지 그랬던 것 같다.
엄마가 시집 와서 보니 양반 집안에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라 힘드는데도 선비로서의 체면 때문에 일은 하지 않고 책을 보는 집안이었다라는 이야기를 엄마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큰아버지들은 그렇게 사셨고 아버지는 큰 아버지들과는 달리 열심히 일하며 사셨고 경제수완도 가지고 계신 분이기에 자수성가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김장철이면 아버지는 도매시장에 가셔서 직접 배추와 무우를 구입하시면 조금 후에 트럭으로 배달이 되었다. 그 양이 두 접 내지 세 접씩이나 되어서 집 앞에다 배추를 부려 놓으면 칼로 배추를 절반으로 잘라 놓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중학생 또는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같은 동네에 살던 초등학교 동창 남자 아이가 지나가면 왜 그리도 창피함을 느꼈던 지 모르겠다. 지금 성격 같으면 “너, 나 좀 도와줄래?” 아님 ‘연중행사인 김장 담그기 프로젝트에 나도 한 몫을 담당하는 사람이야’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했을 텐데 말이다. 후훗
남동생이 중학교 입학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갑자기 입시제도가 바뀌어져서 추첨으로 학교를 들어가게 되었다. 과외공부를 하며 열심히 공부하며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추첨으로 인해 그 당시 알아주지 않는 학교에 배정이 되니까 아버지는 화가 나셔서 집에 들어오시더니 동생의 팔을 꼬집으시면서 화를 내시고는 가게로 가셨다.
동생은 아프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울다가 아버지가 나가시고 나서 하는 말이 “남자가 치사하게 꼬집다니.. 차라리 때리지..”하는 동생을 보며 아무런 잘못도 없이 애꿎게 당한 처지가 딱하기도 하였지만 그 말이 한 편으로는 얼마나 우스웠던 지...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지대한 교육열을 가지고 계셨기에 그 발표로 인하여 동생보다도 훨씬 속상하셨던 마음이 그렇게 표출된 것임을 그 당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공부 대신 돈을 버신 이유로 학력이 짧으신 분이셨다. 아버지 글씨체가 사람들 앞에 내놓을 만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내가 중학교 들어가고 학교에서 한문을 배우게 되니까 결혼식이나 약혼식, 회갑, 장례가 있는 날이면 봉투에 한문으로 祝 結婚, 祝 華婚, 祝 回甲 또는 賻儀를 쓰라고 가끔 부탁하시곤 했다.
아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행사가 많았다. 어떤 날은 봉투 한 묶음(100장)을 준비해 놓으시고 여러가지 행사 때 쓸 것을 골고루 미리 써 놓으라고 하실 때도 있었다. 왜냐하면 나의 글씨체가 좀 괜찮은 데다가 한문을 좀 멋드러지게 잘 쓰는 편이어서 아버지 마음에 쏙 드셨던 것 같다.
간혹 편지 보내야 하는 경우에 아버지가 내용을 불러주시는 데로 받아 써야 할 때도 있었는데 그 두가지가 왜 그리도 하기 싫었던 지.. 그 때는 “오빠들도 많은데 왜 나한테만 시킬까? 귀찮게 시리”하고 투덜거리곤 했었다. 지금 같으면 아예 편지를 써야할 내용을 일필휘지하여 편지 쓴 것을 갖다 드렸으면 기특해 하시며 얼마나 흐뭇해 하셨을까..
그리고 봉투에 쓰는 일도 100장짜리 한 묶음을 주시면 “아버지!, 다음엔 두,세 묶음을 준비해 주세요~ 다 써 놓을께요”이랬다면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슬하에 7남매를 두셨기에 명절에 모이면 큰 방 두 개 정도에 가득 차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간식으로 집에서 올캐가 만든 튀밥, 찹쌀떡, 엿, 가래떡 같은 먹거리도 많았다.
둥그렇게 앉아서 친선게임으로 어렸던 나까지 할 수 있는 화투로 “나이롱 뽕”을 하는 날이면 여기저기서 “뽕”하느라고 특히 큰 형부의 큰 소리로 “뽕!!”하는 소리에 서로 쳐다보며 “껄껄~ 깔깔~ 와하하~ 호호” 웃어가면서 하는 모습이 선하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집에 들어 오신다고 하면 후다닥 담요 밑에 화투를 감추곤 했다. 아버지는 놀음 같은 패가망신할 일을 하지 않으셨다. 약주가 과하신 것이 문제였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금실이 좋으셨던 분으로 기억된다. 슬하의 6남매는 결혼을 하였고 다달이 들어오는 월세 중 일부를 다시 재투자를 하시며 알콩달콩 두 분이 사셨고, 평생 어머니 한 분만 사랑하며 사신 분이셨기 때문이다.
아버지 살아 생전에 선산에 있는 무덤에 두 분의 관을 넣는 일이 있었다. 그 날 관을 넣기 위해 동네 남자 장정들은 땅을 파고 여자들은 식사 준비를 하는데 아침에 사 가지고 간 많은 양의 양 지머리, 양과 곱창등을 푹 끓여서 커다란 그릇에 담을 때 고기 건더기를 얼마나 많이 담아서 국을 푸던지..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고자질(?) 같이 아버지께 고하기를 “점심 때 국을 풀 때 음식을 만들던 아낙네들이 고기의 양을 많이 그릇에 듬뿍 담아 주는 것을 보았다”고 하니까 “괜찮다”고 하시던 아버지의 후하고 넉넉한 마음씀씀이! 어차피 넉넉하게 준비해서 가지고 가셔서 동네사람들까지 대접하고자 했던 것이니..
그 때 일하던 남자분들이 동네 사람들이어서 음식을 만들던 아낙네들이 신랑들에게 몸보신하라고 듬뿍 담았던 것을 그 때는 어린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한여름이면 작은 구멍이 난 낡은 런닝 셔츠를 즐겨 입으셨는데 “아버지, 왜 그런 구멍난 옷을 입으세요?” 라고 하면 구멍이 난 옷이 더 시원하다고 하셨는데 새 옷보다 항상 입는 낡은 옷이 시원하다는 것이 나이가 드니까 이해가 가는 것이다.^^
아버지는 검소하신 분이지만 써야 할 때는 아낌 없이 푸짐하게 내시는 분이셨다. 요즘 시대의 아빠들처럼 겉으로 드러내며 뽀뽀해주고 사랑한다 하며 표현하며 내색을 하지는 않는 분이셨지만 7 남매를 키우시면서 무척 자식들을 사랑하신 분으로 단지 그 시대가 그렇듯이 자식들을 사랑하는 표현 방식이 달랐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요즘 대화를 할 때 답변을 아주 쪼금 늦게 하는 습관이 생겼다. 예전 같으면 탁구 치듯 금방 말할 것을 잠깐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체에 거르는 것처럼 말이다.
행여나 생각이 짧아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있을까 저어하는 마음에.
“…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야고보서 1:19,20)는 말씀처럼 “왜 그런 말과 질 문을 하는 걸까?” “무엇이라고 답을 해 주어야 할까?”하다 보니 몇 초가 지나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나 나름대로 생각해 보면 더 신중할 수 있어서 좋다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기발한 말의 표현으로 인하여 상대방을 웃기고 즐겁게 만드는 데 이것 역시 내 능력은 아닌 것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임을 느낀다. (^^)
예전에 지금처럼 여유로운 마음으로 아버지가 어떤 일을 나에게 부탁하셨을 때 어차피 해야할 일을 좀 더 기쁜 마음으로 해 드렸으면 아버지 마음을 시원하게, 더 즐겁게 그리고 무척 흐뭇하셨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언 15: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잠언 1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