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흥사단, 엘리스아일랜드 이민박물관 사료 분석
도산 안창호와 평생동지 이갑의 아름다운 우정
Newsroh=노창현특파원 newsroh@gmail.com
도산(島山)안창호(安昌浩1878-1938)와 평생동지 추정(秋汀) 이갑(李甲1877-1917)의 사료가 뉴욕에서 25일 발굴, 공개됐다.
미주흥사단의 윤창희 위원장은‘글로벌웹진’ Newsroh와의 인터뷰에서 “도산 안창호와 이갑 선생은1898년부터,독립협회,만민공동회 등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이번 사료를 통해 평생 동지로 모국과 해외에서 각각 독립운동을 해온 두분의 연대기를 파악하고 활동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미주흥사단의 제니 장 단우와 윤창희 위원장이 발굴한 사료 사본을 들어보이고 있다
특히 도산이 미국으로 망명후 다시 귀국했다가 5년만인 1911년 9월 3일 뉴욕 엘리스 아일랜드(Ellis Island)를 통해 입국한 문서와 함께 시베리아에 있던 이갑의 미국 입국 서류를 처음 발굴해 눈길을 끈다.
이와 함께 1909년 안중근의사의 이등박문 저격에 도산의 미국동지들이 러시아에서 도움을 주고이듬해 만주와 시베리아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드는데 기여한 사실 등 그간 시기와 배경이 불분명하게 있었던 부분들을 확인하는 성과도 거둘 수 있었다.
도산의 뉴욕항 입국 서류는 지난 2009년 10월 처음 발굴된 적이 있다. 당시 엘리스 아일랜드 재단에서 인턴십을 하던 금교혁 씨가 입국 문서 전산화 작업을 돕던 중 안창호와 이상설 이위종 등 독립지사들의 입국 기록을 발견해 뉴욕 총영사관에 제보를 한 것.
그러나 당시 자료는 이름과 입국 시기 등 제한된 정보만 알려졌고 문서를 전달받은 뉴욕총영사관이 연구를 위해 한국으로 보내겠다고 밝혔으나 후속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도산 안창호의 이름은 위표 6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산은 1911년 8월 26일 영국 글래스고(Glasgow) 항에서 칼레도니아(Caledonia) 선을 타고 뉴욕항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섬 엘리스 아일랜드에 9월 3일 도착했다. 당시 모든 이민자와 외국인 입국자들은 본토 상륙전에 이민국이 있는 엘리스 아일랜드에서 입국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민국 서류에는 도산이 직업을 학교 관리자(School Manager)로 적어 놓아 눈길을 끈다. 모국에서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을 해온만큼 직업난에 ‘교육자’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무렵 이갑은 독립운동 중, 시베리아에서 중병에 걸려 미국서 치료하기 위해 도산이 지원한 경비로 어렵게 뉴욕에 닿았지만 엘리스 아일랜드에서 이민국 건강 심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고 입국이 거절됐다. 당시 엘리스 아일랜드는 몰려드는 이민자들로 건강검진을 했는데 1차검사는 육안(肉眼)으로 15초에 한명 꼴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온 가족이 왔다가 생이별하는 사례들이 속출했다.
윤창희 위원장은 “그동안 이갑 선생이 미국에 왔다가 되돌아 같다는 이야기가 여러 사람의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는데 이번에 미국 이민국 기록을 통해 이러한 사실이 공식 확인되었다”고 말했다.
이번 사료는 윤창희 위원장과 흥사단 단우 제니 장씨가 한달여 작업 끝에 공개한 것이다. 윤 위원장은 “필사본의 상태가 좋지 않아 해독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제니 장 단우가 큰 역할을 했다. 추가자료도 계속 작업하고 있다”고 전했다.
도산, 부인과 노동해 번 재산 이갑 치료비로 보내
이갑이 뉴욕에 온 것은 1912년 4월 28일로 당시 35세였다. 이갑은 4월 13일 독일 함부르크 항구에서 프리토리아(Pretoria) 선편으로 출발해, 뉴욕 엘리스 아일랜드에 입항했다. 그러나 이민국 신체검사에서 탈락하여 엘리스 아일랜드의 이민국 병원에서 입원(IN HOSPITAL)과 퇴원 (Discharge)한 기록이 있고, 결국 미국에 입국하지 못하고, 다시 되돌려 보내진다.
이갑의 행선지가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로 적혀 있는 것으로 미뤄 일단 뉴욕에 들어온후 육로를 통해 캘리포니아의 도산을 만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갑의 이름이 24번에 나와 있다
나중에 도산은 이갑이 미국 입국이 거절돼 시베리아에서 죽을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부인 안혜련여사와 상의하여 자신이 토목 공사 노동자로 일해 번 돈과 아내가 삯빨래로 번 돈을 합친 1천 달러를 이갑에게 송금하여, 이갑이 감동하여 목놓아 울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1천달러를 요즘 시가로 환산하면 수만달러에 이르는 거액이다. 이갑은 성치 않은 몸으로 1917년 6월 13일 러시아의 니콜리스크에서 숨질 때까지 대한인국민회 치타 지방 총회장 등, 독립운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윤창희 위원장은 “도산과 이갑은 1898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부터, 19년 동안을 독립운동에 같이 투신하였고, 평생을 동지로 살고 죽는 것을 같이 한 사이로 알려졌다. 친구라는 것, 동지애라는 것이 진정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아름다운 이야기로 후세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도산은 190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상항친목회를 확대하여 공립협회라 이름짓고 1905년 10월 27일 샌프란시스코 패시픽가(Pacific Street)에서 정식으로 창립했다. 공립협회 총회장으로서 리버사이드와 레드랜드, 로스엔젤레스, 솔트레이크시티, 락스프링스, 새크라멘토, 핸포드 등 캘리포니아주를 중심으로 한 미주 서해안 일대에 9개 지회를 설립하고 회원 800여명을 확보했다. 공립협회는 뒷날 1909년 2월, '합성협회'와 통합하여, 재미 한국인 기구이자, 미주 독립운동 기지이고, 사실상 정부 역할을 한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였다.
도산과 같은 평안남도 출신인 이갑은 1896년 독립협회 가입후 개화파로 활동하며 일본에서 육사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장교로도 복무했다. 그는 도산이 정권을 장악해 개혁을 할 수 있도록 이등박문과의 면담을 주선하였으나 도산이 이등박문한테 이용당하는 결과만 될 것으로 판단해, ‘도산 내각’ 제안을 거절했다. 신민회 간부들은 최종적으로 망명하기로 결론을 내고, 각각 국외로 탈출하였다.
1907년에는, 미국 공립협회 회원들과 의논한 비밀결사 신민회를 한국에서 설립했다. 이갑은 서우학회, 서북협성학교, 오성하교 등을 세웠고, 신민회 사업으로는 평양 대성학교, 마산동 자기회사, 태극서관, 청년학우회 등을 조직하였다. 이갑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 당하자, 이를 반대하고, 군대해산으로 저항했다. 1910년 7월에 신민회 국내 최후의 회의에서 약속한 대로, 신민회의 여러 동지가 청도에서 회합하여 청도회의를 열어, 차후 독립운동 방향을 논의하였다. 이갑, 유동열, 신채호, 이종호, 김지간, 조상환, 이강, 박영노, 김희선 등이 모였으나 청도 회담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신민회는 비밀결사로 1911년까지 지속되었다가 일본의 강제 해산시켰다.
1909년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도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가 역사적인 이등박문 저격을 감행했을 때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창립 멤버인 이강, 정재관 김성무, 이상설 등이 대한인국민회의 파견을 받아, 이미 만주와 시베리아 지방에 와 있었고, 이강, 정재관 김성무 등은 블라디보스톡의 대동공보사 사무실에서 거사 계획을 듣고 도움을 주고 있었다. 결국 도산은 공립협회 동지들의 힘으로 간접적으로 안중근 의사의 거사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1910년도에, 도산과 이갑은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밀산현 봉밀산자 일대를 둘러 보았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나중에 밀산현에 이갑등이 추진한 밀산무관학교가 설립되었고, 이갑이 교장이라는 일제의 첩보 보고가 있다. 도산은 블라디보스톡에서 7개월을 머물러 있던 기록이 나온다.
당시 일본은 도산과 이갑을 서파 (평안도 출신)로 분류했고, 도산이 주도한 ‘자선공제회’에 관한 정보들을 모았다. 자선공제회는 자선사업, 상호구제, 당파내용의 불소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1911년 1월부터 6월까지의 일본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시베리아에 있는 경성파와 서파의 알력을 조정하려는 모임 등이 있는데, 이상설, 안창호, 차석보, 고상준, 김규섭, 김치보, 신채호 등이 등장한다. 이곳에서 도산이 대동공보의 재발간, 자선공제회의 입적운동 등의 당시 한인사회의 주요 과제들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양보가 대동공보를 계승하는 내용도 있다. 1911년 6월 현재, 안창호의 제의로 대한거류민회를 신한촌회로 개칭하게 되는 사정 등, 신한촌의 현황, 권업회의 성립, 이종호 홍범도 등 주요 인물의 동향, 대양보 창간호를 항목별로 분석,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도산과 이갑은 만주 및 러시아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갑은 러시아 수도 피터스버그에서 한인 청년 양성소를 세웠고, 블라디보스톡에서는 이동휘 선생과 같이 광복군 정부 구상을 하였다. 1911년도에, 이갑과 도산은 러시아 수도, 피터스버그에서 헤어졌으며, 도산은 베를린을 거쳐, 영국에서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다음은, 독립정신 60호에 나온 글이다.
“한편 1910년 7월 중국 청도(靑島)에 모인 신민회의 주요 인사들은 이른바‘청도회의’를 열고 기지개척과 독립운동 방침을 논의하였다. 이때 회의에 참석한 안창호·이갑 등은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여러 지사들과 독립군 기지개척을 논의하였다. 연해주의 독립군기지 개척운동은 1909년 블라디보스톡에 간 이상설과 한민회장 김학만(金學萬), 「海潮新聞」주간 정순만(鄭淳萬), 영남 출신의 유학자 이승희(李承熙) 등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기지건설의 후보지로 중국 밀산부(密山府) 봉 밀산(蜂蜜山) 부근을 선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창호는 미주 공립협회(共立協會) 및 신민회원들과 연계하여 이 사업을 후원하였다. 이승희는 1909년 가을 이주민을 이끌고 봉밀산 밑에 터전을 잡고 북만주의 독립운동 기지를 개 척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는 처음 100여 가구를 이주시키면서 그곳을‘한흥동(韓興洞)’이라고 명명 했다. 미주의 대한인국민회가 1910년 3월 자금을 모아 설립한‘태동실업주식회사’는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톡에 세운‘원동임야주식회사’에 자금을 보내 토지를 구입케 하였다. 미국의 독립운동가인 김종림은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이는 태동실업주식회사의 전신으로 대한인국민회가 주관, 만주와 연해주에 독립군 기지 육성을 목적으로 했던 사업체였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1911년 7월 토지등기를 마쳤다. 그 뒤 정재관(鄭在寬)·이강(李剛)·김성무(金成武) 등이 봉밀산 개척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봉밀산에는 약 500호 가량의 한인 이주민들이 정착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봉밀산 개척사업은 자금부족과 흉년, 이주 한인들의 부적응 등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봉 밀산 개척지는 이후 한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특히 홍범도는 1916년 빈민 300여 호를 이곳에 이주시키고 한흥동에 소학교를 세워 한인 자제들의 교육과 독립군 양성사업을 추진하였다.” 출처 *** “독립운동의 방법론 - 외교론과 무장투쟁론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사) 대함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 독립정신 60호 2011년 11,12월호”
* 글로벌웹진 NEWSROH www.newsro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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