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잊혀진 전쟁, 사라져 가는 사람들 (끝편)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후원을 받아 작성한 것입니다. 기자 주)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레프 트로츠키의 전쟁에 대한 명언이다. 앞선 편에서 언급했듯이 2차 대전이 막을 내린 지 5년여가 된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은 당시의 미국 젊은이들에겐 내키지 않은 전쟁이었다. 막 시작된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간의 냉전의 개념도 의미도 몰랐다. 그러던 차에 그들은 주둔지 일본을 비롯한 해외 군사기지에서, 그리고 본국에서 급파되어 한국전을 치렀다. 듣도 보도 알지도 못했던 한국이란 나라에서 3년여 간 치른 전쟁은 참전 베테랑들에게 육체적인 상처 뿐 아니라 정신적인 상흔을 남겼다. 미국사회는 이들의 희생을 알아주려 들지 않았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애써 자신들의 존재감을 확인하려 들었다. 이들은 전쟁관련 국가기념일에 참석하고 줄기차게 정기 비정기 모임을 가져왔고, 미 전역 100여 곳 이상의 도시에 한국전 메모리얼을 건설했다. 이 같은 결실에는 늘 헌신적으로 몸을 던져 봉사한 개인들이 있기 마련이다. 기자가 알고 있는 한국전 베테랑들 가운데 플로리다 올랜도 거주 빌 러셀(80대 후반)은 한국전이 끝난 이후 이 같은 노력을 개인적으로 또는 조직적으로 주도해온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1951년 6월부터 1953년 3월까지 한국전에 참전한 그는 가장 치열한 전투 가운데 하나였던 백마고지 전투를 직접 취재하여 미국과 전 세계에 타전한 종군기자 출신이다.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러셀은 한국전 이후 워싱턴에서 30년 동안 사회문제 영역에서 저술 활동을 하는 한편, 한국전과 인도 차이나 전쟁 등과 관련한 여러권의 소설을 냈다. 그가 열흘간의 백마고지 전투를 소재로 쓴 소설 <스테일메이트와 스탠드오프(Stalmate & Standoff, 교착과 대치, 1993)>와 <페이스 오브 에니미(Face of the Enemy, 적의 얼굴, 2002)는 한국전 베테랑은 물론 한국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진 책이다.
지난 8월 29일과 9월 29일 두 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그가 겪은 한국전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잊혀진 전쟁'으로서의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베테랑들의 전후 삶의 일단을 엿보기로 했다. 레셀의 말을 빌리면, 한국전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일생일대의 경험이었고, 그는 이 잊을 수 없는 전쟁을 미국사회가 잊지 않도록 오늘도 기억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의 편린 속에는 당시 참전 군인으로서의 한국전에 대한 생각, 국제정세, 전쟁의 상흔, 아쉬움 등이 들어있다. 그는 현재의 어려운 한반도 상황에 대한 고언도 아끼지 않았다. 러셀에게 한국전 참전은 누가 뭐래도 의롭고 정당한 것이었고, 그래서 더더욱 '무시당한 전쟁(ignored war)'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짧은 만큼 격렬했던 전쟁, 그래서 상흔도 컸던 전쟁, 좀더 일찍 끝낼 수 있었던 아쉬움이 남는 전쟁, 하지만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전쟁에 대한 그의 목소리를 들어 본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한국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전쟁" - 한국전에 막 참가했을 당시 당신은 한국전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었나. "내가 한국에 도착한 것은 1950년 8월이었다. 막 개성에서 휴전 회담을 진행중인 때였다. 사실상 대부분의 참전 미군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정도 외에 한국의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다. 한국에 배치되고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 당신에게, 또는 인간에게 전쟁이란 무엇인가.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전쟁이란 나라들 간에 존재하는 어떤 이슈가 오로지 전쟁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될 때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한반도는 이승만과 김일성이라는 각각의 통치자들의 신념에 따른 통일을 위해 피차 간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참전 군인에게 전쟁이란 무엇인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다음날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심신을 있는대로 소진해야만 하는 경험이다. 종종 한국의 기자들이 "당신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라고 묻곤 한다. 그 같은 '어리석은 질문'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충분한 대체병력이 올 때까지 견뎌내는 것"이라는 '막연한 대답'을 할 수 있겠지. 당시 우리들의 상당수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 한국전에서 귀환한 후 한국전과 관련하여 당신의 일상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전쟁으로부터 귀환한 후 한국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혹은 잊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나는 한국전에 대해 여러권의 책을 썼다. 베테랑협회의 멤버로서 한국전의 이미지(기억)를 살려내기 위해 무던 애를 썼다. 한국전이 '잊혀진 전쟁'이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은 2차대전과 베트남전에 끼인 전쟁이다. 보통의 미국민들은 한국전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반전 운동으로) 적대적인 분위기에서 귀환하여 관심을 크게 끌었던 베트남전의 베테랑들과는 달리, 한국전 베테랑들은 무관심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 속에서 돌아왔다." - 한국전은 본래 국제전이 아닌 '내전'이었다. 그런데 미국, 소련, 중국 등 강대국들이 한국전에 개입했다. 대부분의 참전 군인들은 공산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 간의 대결를 특징으로 하는 '냉전(cold war)'의 의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던 채로 한국전에 참전한 게 아닌가. "미국은 (미국의 이익에 따라) 한국을 방어하려 했고, 소련은 극동 지역을 비롯한 아시아에 공산주의의 확장에 관심을 두고 중국을 지지했다. '냉전'에 대해 말하자면, 2차대전이 끝나고 한국전 어간에 정점을 이루고 있었지만, 당시 대부분의 미군들은 냉전의 개념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고위 군 정보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던 나는 냉전 이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 '전쟁'에 대한 다른 관점에 대해 당신의 생각은? 가령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부르스 커밍스나 (<불복종의 이유> 등을 쓴) 하워드 진(작고) 같은 반전운동가들은 미국이 모든 국제분쟁에 사사건건 개입하는 것에 대해 비판해 왔다. "나는 그들이 전쟁을 반대해 왔다는 것 외에 구체적으로 그들의 주장을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2차대전과 한국전을 비롯한 여타 전쟁들에 미국이 개입한 것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 한국전에 대해 아쉬움이 있다면? "앞서 밝혔듯이 나는 한국전(참전)은 극동에서 공산주의의 확장을 저지하려 했고 한 나라를 구하려 든 바른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쟁의) 지휘, 즉 고위 지휘 레벨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유엔은 당초 전쟁 개시 3개월이 지난 시점인 1950년 10월에 전쟁을 중단시키려 했는데, 잘 되었으면 그때 전쟁이 끝났을 지도 모른다. 당시 북한군은 괘멸 수준이었다. 그 시점에서 중국은 38선을 넘으면 참전할 것이란 경고를 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전쟁의 지속을 원했고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도 그를 부추겼다. 결국 압록강변까지 올라간 덕분에 중공군의 참전을 불러왔다. 결국 새로운 국면의 전쟁이 2년 반 동안이나 지속된 것이다." - 정말 많은 미군들(5만 4천여 명)이 한국전에서 죽었고 부상자들도 매우 많았다. 전쟁의 가장 큰 후유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한국전 베테랑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고초를 겪고 있으리란 짐작이 간다. "물론이다. 이라크전 아프간전 베트남전에서 사상자들을 많이 냈고, 참전 베테랑들의 자살률이 다른 전쟁들에 비해 높다. 한번 배치되고 나서 다시 배치되는 일이 다반사였고, 게다가 대로변에서 느닷없이 터지는 폭탄 등 '보이지 않는 적들'과 대치해야만 했던 상황에서 많은 전상자를 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전에서 우리는 (다행히) 적들이 어디 있고 언제 공격해 올 지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한국전은 이제까지의 전쟁들 가운데 공수 전환이 가장 빠른 전쟁이었다. 전쟁 발발 후 서울은 무려 네 차례나 점령군이 바뀌었을 정도다. 전쟁의 첫 2년은 누가 고지를 선점하느냐에 승패가 갈렸다. 전쟁 막바지 2년여 동안에 훨씬 전상자가 많았다. 한국전 베테랑들의 자살률은 다른 전쟁에 비해 크지 않다고 본다. 그들은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왔고 전쟁에 대해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한국전에서 피아간 포격에서 겪은 경험은 무시무시 했다. 사실상 한국전은 2차대전 보다 짧은 기간에 더욱 격렬하게, 더 자주 전투를 벌인 전쟁이었다. 이 때문에 후유증이 컸는데, 쉽게 외과적으로 진단되지 않는 전후외상성스트레스증후군(PTSD)이 바로 그것이다. 번개가 치는 날이면 재빨리 테이블 밑으로 피해 들어가는 증상을 보이는 베테랑들이 아직도 많다. 한국전 베테랑들은 육체적인 고통으로 여전히 고생하고 있다. 전투 중 팔 다리가 잘린 많은 베테랑들이 야전병원에서 조기 치료를 받은 덕분에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일반인들은 이들이 의족과 의수를 끼고 산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 미국에서 한국전 베테랑들을 치료하는 기관들이 얼마나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한 한국전 베테랑만을 위한 치료기관은 따로 없다. 모든 베테랑들은 연방정부 베테랑국이 제공하는 의료시설을 통해 치료를 받고 있다. 현재는 대부분 이라크전과 아프간전 베테랑들이 주로 시설들을 이용하고 있다." - 한국전 종군 기자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당시 전투에서 전투병 못지않게 정말 용감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의무병들이었다. 그들은 부상자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들을 노출시키며 목숨을 내걸고 활약한 사람들이다. (종군 기자로서)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의무병 뱃지를 단 군인들은 '용감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용감한 사람들(bravest of the brave)'이며, 높이 존경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 당신이 전에 묘사한 것처럼 한국전과 한국전 베테랑들은 '무시되어(ignored)' 왔다.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를 향해 불만 사항은 없나? "천만에. 미국 정부 또는 한국 정부에 대해 어떤 불만도 갖고 있지 않다. 사실상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위해 무한한 찬사를 해 왔다. 정말 고무적인 일이다. 한국전 기념일은 물론이고 휴전 기념일 등 많은 행사가 열리고 있는 것을 보라. 미국 정부는 수도 워싱턴에 (1995년) 멋진 한국전 메모리얼 파크를 설립하는데 법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한국전 베테랑들을 기리기 위해 애를 써왔다. 나도 그것을 위해 조금이나마 역할을 한 것을 자랑스레 생각하고 있다."
"끓는 냄비를 휘저을 필요 있나?" 군사훈련 중단해야
'무시당한 전쟁', 잊혀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기획시리즈] '잊혀진 전쟁'의 사라져가는 사람들(2)
노병은 사라질 뿐 죽지 않는다?[기획시리즈] ‘잊혀진 전쟁’의 사라져가는 사람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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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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