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 = 촛불집회의 3분 발언대에 나와 발언한 어느 청년의 이야기가 잊히지 않고 귓가에 맴돕니다. 비정규직으로 4년을 지낸 이 청년은 촛불집회가 끝나고 대통령이 탄핵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뭐가 있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계속 최저임금을 받을 것이며, 그 돈으로는 아무리 절약해도 십만 원 이상을 모을 수 없고, 연애도 할 수 없고, 결혼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이 미래에는 달라질 수 있겠느냐고 자조하면서 문제는 현 시국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미래라고 하였습니다.
참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청년의 말이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희망이 없는 미래라는 그의 말이 가슴속에 사무칩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잃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박스를 줍는 노인들을 보는 일은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노숙자들이 다가와 구걸을 하는 일도 낯설지 않습니다. 비정규직이라도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형편이 나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절망적이라면 박스를 줍는 노인들이나 노숙자들은 얼마나 더 절망적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보다 더 시리고 아픈 것은 우리 시대가 이런 분들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 그런 분들의 어려움에 공감하여 청년수당이나 기본수당 같은 것을 실시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것을 포퓰리즘으로 매도하면서 도덕적 해이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도덕적 해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재벌들이 정부와 공모하여 부당한 방법으로 하루아침에 수조 원을 챙겨도 이에 대해서는 자본과 시장의 자유를 내세우고, 보수라는 미덕을 강조하며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을 볼때면 이 시대가 정말 희망이 없는 시대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이란 모든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의 공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사회를 일컬어 '헬조선'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서구사회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풍부한 물자와 자본의 증가로 신 없이도 인간 스스로 낙원을 만들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팽배했습니다. 누구나 인간들이 창조한 유토피아를 꿈꾸며 그동안 자신들을 억제해 왔던 신을 내팽겨쳤습니다. 그리고 인간중심의 새로운 유토피아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기대와 다르게 펼쳐졌습니다. 그들이 꿈꾸던 유토피아는 오직 몇몇 자본가에게만 허용되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가장 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이 스스로 자신이 먹을 것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해 일해도 다른 식구를 부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아원은 버린 아이들로 가득 찼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영양실조에 걸려 죽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아이들은 고아원을 탈출해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다섯 살만 되면 아이들도 일을 해야 했고, 일자리가 없는 아이들은 도둑질이나 구걸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소설이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입니다. 이 소설은 단순한 난픽션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을 배경으로 한 마치 다큐멘터리와 같은 실화에 가까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몇 백 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소설의 현실보다는 덜 하지만 비슷한 현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굶주림의 상황은 낫지만 상대적 박탈감은 더 커졌기에 어느 때가 더 낫다고 말하기 어려운 그런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헬조선'이라는 표현은 합당해 보입니다.
희망
희망을 타나내는 히브리어 단어 가운데 '티그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본래 줄이나 밧줄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희망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은 구약 성서의 이야기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지역을 살피도록 정탐꾼을 보냈을 때, 라합이라는 성전의 창기가 이들을 자기 집에 숨겨주고, 이들을 찾는 추적대를 따돌렸습니다. 그리고 밧줄을 내려 이들을 구해주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집에 분홍색 줄로 표시를 달아 나중에 여리고를 점령한 이스라엘이 라합을 해치지 않게 하였습니다.(여:2:18, 21) 이 사건 이후 밧줄은 구원을 상징하는 도구가 되었고 '희망'의 의미를 담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밧줄이 희망이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선 희망이 관계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희망은 단순히 한 개별자의 욕망의 투사가 아닙니다. 희망은 관계적입니다. 라합이 있고 정탐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있고 라합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또 그 역할이 바뀌어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강남순 교수는 '아직 아닌 세계'를 희망하자'라는 글에서 그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희망하기란 한 개별인의 개인적 구상이고 결단으로 형성되지만, 동시에 타자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사건이기도 하다. 즉, 희망하기란 나의 결단만이 아니라, 종종 타자의 지지와 제도적 장치들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개인적 희망과 집단적 희망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희망의 근거는 찬란한 승리의 보장이 아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낮꿈을 꾸면서 '홀로-함께' 그 세계를 이루어내고자 씨름하는 현장 바로 그 한가운데에, 희망의 근거가 있다. 결국 좋은 희망이란 나 자신은 물론 타자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열정을 실현하고자 하는 희망을 지지하며, 새로운 힘을 내게 하는 것이다.
신학자로서 그녀가 복음을 재해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복음이라는 말 자체가 희망이라는 의미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심할 수 있는 좋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남은 물론 기대를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게 됩니다. 복음이 곧 해방이고 희망인 것입니다.
일자리를 창출하는 교회
복음의 삶은 관계로 드러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초기교회에서는 직업보도, 다시 말해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능력에 따라 차별을 하기에 능력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집니다. 또 그 외에도 수많은 차별과 장벽들이 있었기에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일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고, 일하지 못하는 사람은 기근에 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기교회는 단순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치고 일자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일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능력이 없어 일자리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준다는 것은 교회가 '티그바'를 주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곳이 아니라 희망의 끈을 내려 사람들이 붙잡고 희망을 가지게 함으로써 복음이 복음 될 수 있도록 복음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 시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개혁을 말하고 본질의 회복을 말하면서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개혁이 필요하고, 본질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목사교가 폐지되어야 하고 개독교가 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일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출애굽은 단순한 구원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희망이 없는 이스라엘에게 줄을 내려주셨습니다. 모세를 보내셔서 구원의 밧줄을 잡게 하셨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전도가 영혼구원이라는 말을 하고 그렇게 믿으면서 고통받는 자들의 현실을 외면합니다. 기독교는 영혼구원만을 말하는 피안의 종교가 아닙니다. 치열한 현재의 삶을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가 핵심인 종교입니다. 복음이란 강남순 교수의 말처럼 "나 자신은 물론 타자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열정을 실현하고자 하는 희망을 지지하며, 새로운 힘을 내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더 열심히 일하고 거기에서 얻게 되는 모든 것들을 기꺼이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이 복음의 삶임을 깨닫는다면, 그래서 일자리를 창출해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도록 만들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그렇게 이루어지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아닐까요?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울려 함께 서로 사랑하고 섬기면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예배가 될까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드릴 산제사이며 영적 예배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헬조선'을 몰아내고 희망을 잃은 이 시대의 청년들도 다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교회, 그리고 그 일자리가 성서의 '포도원의 품꾼들' 비유(마20:1-16)에서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하루치 품삯을 받는 일터가 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관계가 없고, 어리석고 불가능한 생각이라 여깁니다. 따라서 능력에 상관없이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일자리의 창출은 애초부터 정부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진정한 예수의 제자인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생이 주어졌고 부활이 약속된 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기꺼이 섬기고 희생까지도 담당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의 삶은 치열한 현재의 삶을 살라는 요구입니다. 일자리 창출은 그 치열한 현재의 삶의 아주 중요한 일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사람이 없는 나라입니다. 모두가 받은 달란트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사는 나라입니다. 그곳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진정한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일자리 창출이야말로 '티그바'가 아닐까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헬조선의 희망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