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인가 이렇게 요상한 제목의 한국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한국판 서부활극 오락영화였는데 세 주인공을 각각 이렇게 묘사한 것이었다. 또, 우스개 소리로 이런 말도 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10명 가운데, 대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1명,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2명, 그리고 관심이 없는 사람이 7명으로 나뉜다고 한다. 이 두가지 내용을 아전인수격으로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 10%는 좋은 사람, 20%는 나쁜 사람, 70%는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희한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러분이 인간관계에서 받는 ‘상처’는 대부분은 20%의 사람군에서, 종종은 70%의 부류에서, 심지어는 아주 가끔 10%의 나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부터 올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에게서 ‘상처를 받는다’….
필자가 해괴한 논리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대인관계에서 오는 모든 괴로움은 나의 의지와 노력과는 관계없이 그냥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함이다. 좀, 격식있게 표현하자면, 관계안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점이 우리에게 무력감을 주기도 하지만, 역으로 뒤집어 보면 위안이 되는 측면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다 다르며, 그 다름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서로 서로에게 갈등과 상처를 주고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도덕과 규범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문화에서 성장한 우리에게는 조금은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다. 공동체 사회의 원칙을 간과한 자기편의적인 주장이라고 치부될 수도 있겠다. 인간 관계에서 따뜻한 배려심없이 어떻게 우정과 사랑과 신의를 쌓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전적으로 동감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너와 나 쌍방의 감정에 충실하여 살펴보자.
우리는 늘 상대방의 평가를 의식하면서 살아간다.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것은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본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어른을 공경하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착한 아이’, ‘공부 잘 하는 아이’를 훈육의 최고 가치로 여기는 한국에서는 남의 평가에 더더욱 민감하게 되는 것 같다. 상황이 이러하니 우리는 의식, 무의식중에 ‘나는 착한 인간’ 이어야 하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한다’는 실현 불가능한 목표안에서 스스로를 옥죄는 상황에 빠지기 쉬운 것 같다.
몇해 전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한국에서 히트를 치며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이 책은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에서 의미를 찾도록 권유하는 내용이다. 저자는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Alfred Adler의 관계심리학에 기초하여 인간관계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고 있다. Adler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타고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상대방으로부터 끊임없이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존재라고 한다. 책의 저자는, 이러한 타고난 열등감과 불안감을 지니고 사는 우리는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의미를 실현하고 있다고 독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라는 말은 인간관계를 소홀히 하라는 의미는 분명 아닐 것이다. 오히려 타인으로부터 받는 상처로 인해 연약해진 나를 돌보기 위하여 자아의 외면을 단단히 하자는 충고일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갈등을 겪을때,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 부터 시작한다면, 타인의 시선에 묶인채 자신을 구속하는 압박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롭게 되지 않을 까 생각한다.
노자의 도덕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이나 귀하게 여긴다면 천하를 줄 수 있고,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 아낀다면 천하를 맡길 수가 있다.” 이 문구를 두고 학자들은 다양한 해석을 내 놓고 논쟁을 하지만, 나는 이 구절을 내 나름대로 해석하고 즐기고 있다.
오늘도 나는 자신에게 고백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는 심술이 많고, 질투도 많고, 아량이 부족하며, 특히, 화를 잘 낸다….’ 그래도 감사하다. 나의 부족함을 내가 잘 알고 있고, 그로 인한 비난과 미움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노력을 통해 다른 사람의 약점도 너그럽게 볼 수 있는 넓은 마음도 가지기를 바래본다.
칼럼니스트 김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