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다
[i뉴스넷] 최윤주 발행인 editor@inewsnet.net
광해군 때 고비라는 구두쇠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 유명한 ‘자린고비’ 이야기가 이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일설이 있을 정도로 지독하게 인색했던 이다.
워낙 큰 부자이다보니 사방에서 돈버는 비법을 가르쳐달라며 은밀히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고비는 그럴 때마다 찾아온 사람을 동구 밖 큰 나무로 데리고 가 높은 나무 가지에 매달리도록 했다. 가지 끝에 매달리면 한 손을 놓으라 했다. 힘겹게 한 손을 떼면 나머지 한 손 마저 놓으라고 시켰다.
두 손을 모두 떼었다간 나무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을 판이니 이 쯤에서 고비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사람은 없다. 혹자는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해 살려달라 애원하고 혹자는 화를 내며 어렵게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제서야 고비는 비법을 내놓는다.
“돈벌이에서 생겨나는 고통을 나뭇가지 붙들 듯 참아내야 하고, 수중에 들어온 돈은 손을 놓으면 목숨을 잃듯 악착같이 붙들어야 하는 것이오.”
상술로 하나의 세력권을 이루며 17세기에서 일제시대까지 대표적인 상인집단으로 군림한 개성상인들의 가풍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아기 돌상에 오르는 ‘돌잡이’가 그것.
아기가 집는 물건에 따라 장래를 가늠하는 돌잡이에는 책, 돈, 떡, 명주실 등을 펼쳐놓는 것이 예사. 그러나 개성상인의 돌상에는 데른데서는 볼 수 없는 가래엿이 놓여있다.
개성상인들은 아기가 그 어떤 다른 물건보다 엿가래를 잡는 것을 기뻐했다. 엿을 손아귀에 쥐면 끈적거려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한번 잡으면 놓치지 않는 개성상인의 장사 마인드를 닮아, 돌을 맞은 아이가 장차 거상이 될 것이라 해석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야기는 나라 밖에도 있다. 중국과 인도, 서유럽을 이었던 고대 무역길 실크로드, 이 길목에 사는 소그드족 상인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최고로 장사를 잘하는 민족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기묘한 탄생의식을 베푼다. 눈두덩이에 꿀칠을 해 눈을 못뜨게 하고 손바닥에 아교를 쥐어줌으로써 펴지 못하게 했다. 눈을 못 뜨게 함은 이윤이나 물욕에 눈을 밝히지 말라는 뜻이고, 손을 붙이는 것은 들어온 재물을 악착같이 놓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놓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고비의 나뭇가지처럼, 개성상인의 엿가래처럼, 소그드족의 아교풀처럼 결코 놓아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에는 자존심일 수도 있으며, 어떤 이에게는 인연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이에게는 능력일 수도 있다.
어쩌면 놓칠 수 없는 게 하나가 아니라, 수천 수만가지일 수도 있다. 자신이 쥐고 있는 모든 것을 놓을 수 없어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더 많은 것을 쥐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아둥바둥 사는 게 인간사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움켜쥐어도 손을 펴면 스르르 흘러내리고 마는 바닷가의 고운 모래같은 게 우리네 인생이다. 손 한가득 움켜잡아도 여지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모래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끝내 손아귀를 벗어나고야 마는, 그래서 많은 아쉬움을 남기는 ‘후회’의 다른 이름일런지도 모른다.
2017년도 벌써 다 갔다.
남들이 ‘꽉 쥐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것을 내 인생의 목표라고 믿고 쉼없이 내달리는 동안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는지 한번쯤 돌이켜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