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민인생 40년을 회고하는 송석춘씨. 지난 10일 올랜도 닥터 필립스 자택에서 만났다. |
기가 막혔다. 겨우 중학교 2학년에 불과한 아들놈이 영창에 가다니. 그렇잖아도 뻑하면 "왜 잘 나가던 자리 팽개치고 와서 이 '쌩고생'을 시키느냐"며 대들던 아내의 얼굴이 떠 올랐고, "어떤 학교에도 전학이 불가하다"는 교장의 말이 겹치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자식새끼 잘 키우겠다고 왔다가 이게 왠 청천벽력인가"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송씨의 기름때 묻은 얼굴 위로 뜨거운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가슴은 타들어가는 듯했고, 힘든 정비노동에 찌들대로 찌든 몸은 말라 비틀어지는 듯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들의 대형 밴덜리즘(기물파손) 소식이 신문 1면 톱으로 나오고부터 온 가족은 좁은 응접실 구석 모퉁이에 앉아 통곡을 했다. "한국인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는 비난은 기본이었고, 등하교때 "그 집을 피해 가라"는 한인들도 있었고, "같은 교육구 학교에 내 아이를 보낼 수 없다"며 전학을 시키는 부모도 있었다. 나이 젊은 어떤 한인은 면전에서 "당신 자식 빵에 갔다며?" 하고 야기죽 거렸다. 그동안 겨우 겨우 나가던 교회 조차도 사람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아 발길을 끊었다.
"아들 죄가 바로 내죄"... 온 가족 이끌고 학교청소에 나서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영어도 짧고 왜소해 보이는 아들이 학교에서 '불리(왕따)'를 당하게 된 것이었다. 동양 아이가 단 한 명뿐인 아들은 미국아이들에게 좋은 놀림감이 되었고, 그때마다 피하지 않고 반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교장에게 여러 차례 불려가 체벌을 받았다고 했다. 불만이 쌓인 아들은 어느 휴무일 이틀 동안 다른 미국인 친구와 함께 학교 건물에 들어가 이곳 저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당시 돈으로 1500불의 변상금이 나올 만큼 파손이 심했다. 지역 신문에는 카운티 교육구 역사상 가장 큰 밴덜리즘이라는 뉴스가 나올 정도였다.
더욱 원통한 일은 함께 일을 저지른 미국 아이는 가족들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는 유명 변호사를 써서 풀려 나왔고, 아들만 '주범'으로 찍혀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었다. 송씨는 그때 처음으로 '돈없는 사람의 미국'을 뼈저리게 체험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숨만 쉬고 있을 수 없었다. 아들에게는 "니 애비 닮아 성깔부리다 학교에서 짤렸으니 이제 복교하기는 글렀다. 독학으로 검정고시 준비나 해라" 그러고는 다시는 발걸음도 하기 싫은 학교를 찾아 갔다. 아들의 석방이나 복교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들을 잘못 가르친 애비'로서 속죄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송씨의 '속죄'가 유별났다. 매주 주말에 온 가족을 동원하여 학교청소를 하겠다고 했고, 교장은 '별난 아버지'라는 표정으로 허락했다. 송씨의 이 별난 행동은 나중에 다시한번 플로리다 주류 사회를, 아니 전 미국을 흔들었다. 감방에 간 중2 아들의 속죄를 위해 부부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네 아이들과 함께 매 주말마다 학교 운동장을 청소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그러던 어느날 아침, 이웃 미국인이 신문을 가져다 주며 "이 신문 기사 내용이 너희 가족이야기 같다"며 읽어 보라고 했다. 무심하게 받아둔 신문을 그날 뒤늦게서야 읽어본 송씨는 어안이 벙벙했다. 마이크 실버와 한국계로 보이는 수 홍이라는 <에이피 통신> 기자가 쓴 "가족의 명예와 아들을 위해 부모는 모른 체 하지 않았다"는 제하의 기사였다.
▲ 송석춘씨 큰아들 밴덜리즘(기물파손) 사건을 크게 다룬 1978년 2월 4일자 <센티널 스타>(현 <올랜도센티널>)1면. 이 신문은 송씨가 "내 아들이 죄를 지었으면, 내가 죄를 지은 것이다. 내 아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변상은 물론 어떤 일이든 하겠다"고 말한 내용을 실었다. |
미 전국 뉴스에 오른 '송씨 가족 학교 청소 사건'
급반전이 이뤄졌다. 미 전역의 신문들이 <에이피 통신> 기사를 받아쓰면서 송씨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며칠 만에
수백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변호사비로 쓰라며 5불, 10불 짜리 수표와 현찰을 보내오기도 했다. 미국의 신문들에서는 송씨의 "아들 죄가 바로 내죄"라는 고백을 들어 "미국인 부모들도 본받아야 한다"거나 "미국 교육계도 유교적 가족관계에서 이뤄지는 독특한 교육 철학을 배워야 한다"는 논지의 기사와 논평을 내보냈다.
며칠 후에 반가운 소식이 송씨 가족에게 날아들었다. 법정에서 송씨의 아들을 방면한다는 소식이었다. 교육청에서는 다니던 학교로는 되돌아 갈 수 없고 멀리 떨어진 다른 학교에 갈 수 있다는 서한도 보내왔다. 일종의 정상참작인 셈이다.
송씨는 "당시 그 신문 기자 가 아니었으면 아들놈과 우리 가족이 어찌되었을 지 아찔하다"면서 고마움을 표하는 한편, "당시 내가 어떻게 학교 청소를 자청하고 나섰는지, 아내와 아이들이 군말없이 따라 주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고 회상했다.
▲ 송석춘씨 큰아들이 방면되어 가족의 명예가 회복되었다는 내용이 실린 1978년 2월 28일자 <센티널 스타>. |
기자는 지난 10일 올랜도 닥터 필립스 자택에서 송석춘(76)씨를 만나, 그의 아들 얘기를 포함한 이민생할 40년의 애환을 들어봤다.
1937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송씨는 1970년 공군 대위로 전역과 동시에 현대자동차에 입사하여 1971년 차장으로 고속 승진한 후에 1973년에 퇴사했다. 1974년에 자동차 정비공으로 취업이민하여 30여년간 자동차 정비업에 종사하다 2005년 은퇴, 현재 부인과 함께 올랜도 닥터 필립스 지역에서 안락한 노후를 즐기고 있다.
송씨는 자동차 정비업을 하면서도 짬짬이 본보 '이민생활이야기'에 기고한 글들을 묶어 <기름때 묻은 원숭이의 미국이민 이야기>(코리아위클리 출판, 299쪽)를 최근 세상에 내 놓았다. '기름때 묻은 원숭이'란 송씨 스스로가 자신의 정비공직을 낮잡아 지칭한 것이지만, '정비공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반어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의 책 <기름때 묻은…>에는 "'현대 회장 구속' 피켓든 여인"을 첫 글로 시작하여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사고친
큰 아들", 맨처음 신문에 기고한 "김치 지아이(GI) 등을 거쳐 "기름때 묻은 원숭이의 역사를 쓰다"로 끝을 맺는다.
그가 쓴 글들은 머리로 쓴 것이 아니다. 몸으로 쓴 글들로 엮어진 그의 책에는 어렵던 시절 물건너온 이민자의 애환이 생생하게 묻어나 있다.
▲ 송석춘씨는 틈틈이 <코리아위클리>에 이민생활이야기를 써 냈고, 최근 이를 엮어 <기름때 묻은 원숭이의 미국이민 이야기>(코리아위클리, 299쪽, 16000원)를 펴냈다. |
- 최근 책을 낸 소감이 어떤가.
"나는 글쟁이가 아니다. 책을 읽으며 이민인생 40년을 되돌아 보니 내가 나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초당초보다 더 매운 생활이었다. 내 얘기가 이민자들에게 크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 자녀들이 아들 둘에 딸 셋 모두 5명이다. 그 가운데 특히 애착이 가는 자녀는?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큰 아들놈이 대견하게 보인다. 사고를 쳤을 때만 해도 '아이고 저놈이 자라서 뭐가 될꼬'하고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지금은 가장 가까운 곳에 살면서 챙겨준다. 내가 좋아하는 낚시를 시도 때도 없이 함께 가 주니 얼마나 좋은가. 선트러스트 은행의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큰 딸도 명절때마다 제법 큰 용돈을 보내준다. 다른 애들도 미국사회에서 제몫을 다해 뿌듯하다"
▲ 송시영(50)씨가 부모와 함께 자신의 근무처 인근 비치에서 낚시를 한 내용을 기고한 <플로리다 스포츠맨> 2013년 10월호 잡지. 송씨는 중학교 2학년 시절 학교기물파손 사건으로 미국신문에 올랐었다. |
"미 항공우주국(NASA) 산하 방산업체 고위 탑제사로 일하고 있다. 우주선을 쏘아 올릴때 수 십명이 달라붙어 점검을 하는데 그 가운데 최고참으로 일하고 있다.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서 오는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들에게
직접 브리핑을 하는 유일한 한국계 직원이다."
- 자녀 교육 방식이 독특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녀 교육에 후회되는 것이 없나.
"(웃으며) 이민초기에 좀 거친 얘기로 '미국놈들에게 절대로 지지 말아라, 불리(왕따) 당하면 싸우라!'고 가르쳤다. 결국 큰아들놈이 내가 가르친 것을 오버해서 사고를 쳤지만, 영어도 짧고 가진 것 없던 그 당시를 견뎌낼 힘은 강한 정신력 밖에 없었다. 학교도 자주 찾아가고 아이들에게 좀더 가까이 가지 않은 것이 좀 걸린다. 하지만 힘들게 먹고 사느라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었다."
- 이제 이민 인생 후반을 살고 있다. 전체적으로 자신의 이민생활을 평가한다면?
"올해 대학 3학년인 손녀가 내가 쓴 칼럼을 오려낸 신문쪽지를 학급 친구들에 흔들며 '우리 할아버지를 존경한다. 자랑스럽다' 했다고 한다. 자신은 한글을 읽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웃으며) 그 정도면 이민생활 성공한 거 아닌가?"
- 이민 온 것을 후회한 적이 있나?
"이민 초기 너무 어려워 후회감이 들 때도 있었다. 현대자동차 정비 차장 시절에 욱하는 성질에 사표를낸 것이 후회스럽곤 했다. 현대 정세영 사장이 극구 말렸지만 끝내 그만뒀다. 뇌물을 찔러주고 상사에게 아첨을 해야만 진급을 하는 풍토가 진절머리가 났다."
- 이민와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비행기표도 외상으로 왔고, 정착금도 없이 왔던 초기였다. 너무 무모하게 이민을 온 것이다. 대졸 초임이 2만원일 때 나는 현대에서 15만원을 받았었다. 이걸 포기하고 왔으니 심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우리 애들에게는 '사표 쓰려거든 직장 미리 잡아두고 하라'고 신신당부 한다"
- 현대 자동차 입사 동기들은 출세했을 듯한데.
"현대자동차 회사 생활을 하던 당시에 몇백대 일의 경쟁을 뚫고 입사한 4명의 동기가 있는데, 나를 포함해 3명은 밀려나거나 적응하지 못해 일찍 퇴사하고 '약아빠진' 1명은 끝까지 남아 기아 자동차 부회장까지 지냈다.
당시 현대에는 '쓰리아웃'제도가 있었는데, '영어, 운전, 컴퓨터 실력을 갖추지 못하면 퇴사 시킨다'는 방침이었고, 나는 당시 수준으로 영어에도 손색이 없었고, '운전'에 관한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로 특급 대우를 받았다. 컴퓨터는 회사에서 대주는 돈으로 배울 수 있었다."
- 과거를 되돌아 보았을 때, 자신의 삶에서 제일 잘한 결정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자동차 정비를 직업으로 택한 것이다. 3만개의 자동차 부속을 술술 암기해 내고 지적해 낼 정도로 빠른 습득력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자동차 책을 보지 않고 부속 이름을 정확히 댈 수 있다. 아들놈에게 어릴 적 자동차 일을 시킨 적이 있는데, '부전자전'이라더니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부속을 외우는 걸 보고 깜짝 놀랬다"
- 직업으로서 자동차 정비가 좀 '험한 일'에 속한다. 왜 '정비공 노동자'일을 택했나.
"자동차 정비일이란 것이 본인이 좋아하고 건강만 하다면 망할 일은 없다. 나 같은 경우 종합 정비 보다는 딱 한가지 휠 얼라인먼트에만 매달린 것은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자동차 정비가 '땅짚고 헤엄치기'였다. 항상 110% 성실하게 일하려고 했다"
- 그래도 다른 직업을 가져본 적이 있을 듯한데.
"자동차 정비가 험하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모아둔 돈으로 5에이커 지렁이 농장을 한 적이 있다. 1년 만에 폐업하고 다시 정비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내 직업은 정비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분야에서 '베스트' 소리 들으며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이란 깨달음이 왔다."
- 종종 한국 사회에 대한 불만을 글로 표현하곤 했다. 한국사회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
"한국사회에선 '줄'을 잘 서고 '보험' 들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삶이었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듯하다. 미국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회다. 아직 차별이 있다고는 하지만 능력있고 성실하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나도 그걸 경험했고, 내 자녀들이 이만큼 주류사회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민자들, '4분의 1 생활철학' 본받았으면
- 이민생활 40년된 대 선배로, 이민 후세대에 할 말이 있을 듯한데.
"사소한 듯 보이는 법을 잘지키고 주류사회에 신뢰받는 한인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직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 한인 가정들도 있더라. 미국 사람들 가운데는 한국인을 잘 쓰지않으려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직장을 잡자마자 그만 두는 한국인들이 있다는 얘기였다. 이러면 후손들이 미국사회에서 살아가기 힘들다."
- 지난 5~6년간 경기가 너무 안좋아 힘들어 하는 한인들이 많다.
"한인들이 미국인들의 표면적인 삶을 따르고 사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진짜 미국인들인 중산층의 삶은 애국심과 내핍생활에 철저하다. 대부분의 중산층 미국인들은 아침은 빵, 스프, 밀크로 때우고, 점심도 간단하게 해결한다. 상위 몇 %만 외식을 즐긴다. 그런데 중산층에도 이르지 못한 한인들이 너무 상류층 행세를 하는 같다."
송씨는 미국 중산층이면 상식적으로 알고 실천하여 살고 있다는 '4분의 1 생활철학'을 소개했다. 4분의 1 생활철학이란, 총 가계수입을 거주비, 교통비(차 구입 및 수리비 포함), 생활비, 보험.세금 등 4등분으로 나누어 생활하는 방식을 말한다. 송씨는 이민 초기에 어느 미국인으부터 이 4분의 1 생활철학을 소개받고 이를 실천하려고 애써왔으며, 다른 한인들에게도 이를 권유해 왔다고 했다. 큰 꿈을 안고 이민 왔다가 분수를 모르고 살다 쩔쩔매며 사는 한인들을 자주 목격한 탓이다. 이민생활 40년이 된 송씨 자신은 4분의 1 생활철학을 실천한 탓에 그 '열매'를 톡톡히 누리며 살고 있노라고 했다.
▲ 송석춘씨가 자신의 집 뒷마당에서 거둔 스타 푸릇 열매를 들어 보이고 있다.
|
인터뷰 말미에 송씨에게 "이민생활 중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였냐'는 질문을 하자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 송씨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평생 고락을 같이한 아내는 늘 고마운 사람이고, 자동차 부속상 주인 '미스터 필립스'라는 미국인은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찡하게 하는 은인'이라고 했다.
미스터 필립스를 평생 은인으로 꼽는 사연은 이랬다. 송씨가 미국인이 운영하는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던 어느날이었다. 미스터 필립스가 어느날 일하고 있던 송씨를 부르더니 "자동차 정비일을 얼마나 했느냐"고 캐 묻더니 "정비공장을 차려볼 생각이 없느냐"고 했다. 처음에는 무심코 보인 관심이려니 지나쳤다가, 6개월쯤 지난 어느날 송씨에게 다시 "정비공장을 차려볼 생각이 없느냐"고 했다.
하지만 모아둔 돈도 없고 7식구 생활도 하기에 빠듯한 마당에 감히 정비공장 주인이 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던 때였다. 필립스의 제안에 반신반의하면서 일단 '계획서'를 들고 갔더니 당장 10만불어치의 정비기기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때 필립스는 '9만불에 정비기기를 줄 테니 1만불을 다운하고 5년 안에 나머지를 갚으라'고 했다. 꿈 같은 얘기였다. 순전히 "일이 없어도 일을 하는 동양 친구" 송씨를 눈여겨 본 필립스의 배려였다.
미스터 필립스에 대한 일화는 또 있다. 송씨가 가게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손님을 끌 요량으로 '30% 세일' '50%
세일' 광고판을 만들어 달고 길거리에도 꽂아 두었을 때였다. 어느날 송씨의 정비공장을 지나치다 이 광고판을 본 필립스가 차에서 내리더니 다짜고짜 광고판을 떼어 박살을 냈다. 그리고는 "네 기술을 싼 값에 팔지 말라"고 충고하고는 유유히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송씨는 "일생을 살다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나는 다행히 사람을 잘 만났다"며 미스터 필립스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못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서려는 기자에게 송씨는 이민자들에게 반드시 전해줄 말이 있다고 했다.
"충실히 살면 돕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