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노창현 칼럼니스트

 

 

‘위안부’와 ‘정신대’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신문 연재소설을 통해서였습니다. 1975년부터 일간스포츠에 연재된 김성종의 대하소설 ‘여명(黎明)의 눈동자’였지요. 40대 이하라면 소설보다는 1991년 MBC에서 방영된 동명의 대하드라마(송지나 각본 김종학 연출)가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70년대 유일한 스포츠신문이었던 일간스포츠를 집에서 정기구독한 덕분에 ‘여명의 눈동자’를 자연스럽게 탐독했습니다. 소설은 연재되는 동안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윤여옥과 최대치, 장하림. 세명의 인물들이 많은 독자들에게 회자(膾炙)되었지요. 요즘 TV드라마를 화제 삼듯 신문 소설을 화제 삼는것도 자연스러웠습니다. '여명의 눈동자'는 6년만인 81년에 대미(大尾)를 맺었습니다.

 

중학생때 우연히 읽기 시작한 소설에서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의 역사적 사실을 처음 접했지만 놀라지 않았습니다. 일본놈들이 식민치하에서 인간이하의 짓들을 한 것이 어디 한두가지였던가요. 사실 종군위안부는 신문에 연재되기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었거나 실체적 진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단어였습니다.

 

1965년 ‘굴욕외교’로 일컬어지는 일본과의 외교정상화 조치를 취한 박정희정권의 반민족적 행태가 초래한 정치권의 기류가 우선 작용했구요. 먹고살기 힘든 국민들의 현실, 고루한 유교사상이 지배하는 당시 우리 사회에서 능욕(凌辱)당한 피해자들이 사실을 드러내기를 꺼리고 주변에서도 쉬쉬하는 풍조(風潮)때문이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신군부 시대가 끝나가는 1980년대 말이 되고서야 과거 잘못된 역사를 하나씩 끄집어낼 수 있었고 초기 시민운동가들의 노력과 김학순할머니와 같은 용감한 피해자들이 증언을 하기 시작하면서 위안부 문제가 세계적 이슈로 공론화 된 것입니다.

 

종군위안부와 같은 엄청난 역사적 사실이 신문, 그것도 대중지에 연재소설로 첫 등장한 것은 아이로니컬한 일입니다. 일부에선 원작소설이 위안부의 참상과 시대적 문제를 제대로 짚지 못하고 과도한 폭력과 섹스, 사랑 등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그 무렵 종군위안부를 소재로 한 소설 자체가 커다란 문제를 제기한 셈이니까요. 당시 박정희정권하에서 아마도 대중지가 아니었다면 그런 소재를 연재할 수 있는 매체는 없었을 것입니다.

 

원작자 김성종씨는 소설연재후 후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를 처음 놀라게 한 것은 일본군의 제물로 바쳐진 여자정신대 출신 종군위안부에 관한 자료가 전무하다는 사실이었다. 막연히 조선 처녀 7, 8만명이 그것도 열일곱 열여덟 꽃같은 숫처녀들이 전쟁터에 끌려가 일본군들의 섹스 배설물을 받아내는 공동변소로 전락하여 처참하게 짓이겨졌다는 것 정도외에는 구체적으로 정리된 자료가 하나도 없었다. 일어를 아는 사람들은 많기도한데 어째서 그 비참한 기록은 없을까. 더욱 놀라운 것은 국내에 여성단체가 그렇게도 많은데 종군위안부들의 원혼을 달래줄 비 하나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일본군에 끌려가는 위안부들 앞에서 장도를 축하해주고 박수까지 쳐준 인문들이 지금까지 이 사회에서 버젓이 행세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자대학앞을 지나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지각있는 총장이라면 캠퍼스에 자기 동상을 세울게 아니라 이 역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종군위안부들의 넋을 달래주는 비를 세워 학생들에게 그 생생한 아픔을 전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비록 그것이 대중소설의 형식을 취했다 해도 자료도 전무하고 사회적 금기로 쉬쉬하는 70년대 중반 신문연재소설로 나온 것만으로도 ‘여명의 눈동자’는 역사적 작품으로 평가해도 좋을 것입니다.

 

TV드라마로 만들어진 것도 소설연재후 10년이 지난 90년 11월 37개 여성단체가 모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韓國挺身隊問題對策協議會)가 만들어지고 이듬해 8월 김학순할머니가 일본군의 위안부범죄를 최초로 공개 폭로하는 등 시대적 변화속에 이뤄진 것입니다.

 

 

여명 채시라.jpg

MBC '여명의 눈동자' 동영상 캡처

 

 

주인공들이 상당부분 미화된 TV드라마와 달리 원작소설에선 여옥(채시라 분)이 비참할정도로 많이 짓이겨지고 의식있는 엘리트 출신의 학도병 최대치(최재성 분)는 세월의 흐름속에 인격상실의 저급한 캐릭터로 변모하지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종군위안부는 처절한 역사적 사실이었으니까요.

 

2015년 그 애비에 그 딸이 아니랄까봐 박근혜정권이 벌인 소위 한일위안합의는 그들만의 밀실거래에 불과한 반역사적인 야합의 폭거입니다. 일본은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조치를 모색하며,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을 확인하고 상호 비난과 비판을 자제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우익 정치인들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매춘부로 지속적으로 매도한 사실은 그들 스스로 약속의 위반이요, 자동 파기한 것이 아닌가요.

 

문재인정부는 위안부합의가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규정하면서도 “재협상 요구도, 10억엔 반환도 안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특히 지지자들은 ‘국가간 합의를 파기하는 것은 국가의 신인도에 문제가 있다’, ‘공식파기는 아니지만 사실상 파기의 효과를 줬다’ ‘일본의 트집을 피해나갈 외교적 묘수’라고 평가합니다. 마치 ‘솔로몬의 지혜’라도 발휘한 양 칭송하지만 '조중동' 류들은 ‘이러려고 그 난리를 쳤냐? 죽도 밥도 아니다’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키웁니다.

 

수구꼴통의 생트집에 대해선 글이 아까우니 논외로 하더라도, 문재인정부의 이번 결정은 분명 잘못입니다. 한일위안부합의가 문제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면 당연히 무효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을 안담그나요? 어차피 일본은 반발하게 돼 있습니다. 역사의식도 민족의식도 없는, 부패한 박근혜정권의 합의는 100% 일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문재인정부는 국가간 합의라도 비양심적이고 부도덕하며 국민들의 뜻을 위배한 밀실 합의는 어떠한 것이라도 무효화되야 한다고 당당하게 선언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국민을 대변하는 정부의 바른 태도입니다. 한일양국의 바람직한 미래와 세계를 향한 역사의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도록 했어야 합니다.

 

미국이 자국에 손해가 되고 있다며 FTA협정을 새로 하자는 판국에, 협정도 아닌 밀실야합에 불과한 것을 "국가간 합의도 지켜야 한다"며 점잔 빼는 것은 옹졸한 위장(僞裝)입니다. 문재인정부를 구구절절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슬그머니 꼬리내리는 모습을 ‘후폭풍(?)을 고려한 절묘한 외교적 해법’이라고 찬사를 보내는 것도 낯뜨겁습니다.

 

위안부문제는 국가간 합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수많은 영령(英靈)들을 대신해 국가가 대체 무슨 합의를 할 수 있다는 건가요? 오로지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보상하고 영원히 사과를 되풀이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이 생존 할머니들이 요구하는 일곱가지 원칙입니다. ▲ 일본군 성노예 제도에 대한 일본정부의 책임인정 ▲ 철저한 진상규명 ▲ 일본정부의 공식 사과 ▲ 모든 피해자에 대한 법적 배상 ▲ 범죄자 기소 ▲ 일본 내에서 지속적 교육 ▲ 박물관과 추모비 건립 말입니다.

 

이 원칙은 일본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사과와 보상, 그리고 앞으로의 다짐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국가간의 합의가 아니라 일본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옮겨야 하는게 아니라 도쿄 한복판에 소녀상을 세워 다시는 이같은 범죄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새해 집권 2년차를 맞는 문재인정부가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산적한 적폐들을 청산하기 위해선 안팎의 반개혁 세력들을 솎아내야 합니다. 강력한 반발과 조직적인 음해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꿋꿋이 가야 합니다. 담대하게 뚜벅뚜벅 전진해야 합니다. 일본과의 밀실야합은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말고 즉각 파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의 정의요, 문재인정부의 성공을 약속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입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노창현의 뉴욕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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