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년) 탄생 150주년 기념전이 파리 팡테옹에서 개최되고 있다. 1903년 퀴리 부부의 노벨 물리학 수상장을 비롯하여 연구기록물, 실험도구, 당시 신문기사들, 바캉스 사진과 서신 등 개인 유품들이 웅장한 넓은 홀 한 켠에 마련되어 있다.
'마리 퀴리' 신작영화도 지난 1월 24일 개봉했다. 2016년 10월 함부르크 영화페스티발에서 소개된 영화로 프랑스에서는 150주년 기념행사와 맞물려 최근에서야 개봉했다.
팡테옹 기념전과 2018년 개봉작에서 찾아보는 공통적인 경향이 있다면, 과학자, 소르본 대학교수, 아내이자 연인, 두 딸의 어머니라는 복합적인 역할을 거침없이 해냈던 강한 여성파워를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딱딱하고 차가운 지성적인 이미지를 완화시키는데 주력했다는 점이다.
▶ 여성적 관능미가 추가된 퀴리 부인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전설적인 우상이나 역사적 인물에게 현대적인 마스크를 덧씌우는 경향도 없지 않다.
2018년 개봉작 ‘마리 퀴리’에서 히로인을 맡은 여배우 카롤리나 그루즈카(37세)는 최근 인터뷰를 통해, 천재 과학자가 지니는 딱딱한 이미지보다는 여성적인 관능미를 돋보이는데 주력했다고 밝혔다. 여배우 역시 마리 퀴리와 동향출신인 폴란드 바르샤바 태생이다.
1997년 개봉작 ‘쉬츠 교수의 아카데미훈장(Les Palmes de monsieur Schutz)’에서는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마리 퀴리 역을 맡았다. 줄거리는 마리와 피에르의 첫 만남에서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하는 연구과정을 거쳐, 1903년 노벨물리학상 공동수상까지 담는다. 여기에 젊은 부부의 우두머리나 다름없는 연구실 책임자 쉬츠 교수가 이들의 업적을 이용하여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고자하는 야심이 배경에 깔린다.
2018년 개봉작은 1903년을 시점으로 마리 퀴리가 남편하고 사별한 이후 미망인이 되어 두 딸을 키우며 연구에 전념하는 모습을 담는다. 남성들만의 세계에서 홍일점 여성이 입지를 지키기 위해 벌이는 페미니스트적인 투쟁, 특히 물리학자 폴 랑주뱅(1872~1946년)과의 짧고 화끈한 로맨스에 포커스를 둔다.
▶ 아인슈타인까지 중재했던 스캔들
1906년 소르본 대학교수였던 피에르 퀴리(1859~1906년)는 석탄 마차의 바퀴에 깔리는 참변을 당했고, 퀴리 부인은 남편을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연구와 자녀 양육에만 더욱 몰두했다. 그러던 1910년 어느 봄날, 퀴리 부인은 저녁만찬에 초대되어 나타나는데, 이때 다른 초대 손님들을 어리둥절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허리에 분홍빛 벨트를 맨 하얀 드레스차림의 미망인이 열애에 빠진 여성 특유의 행복스런 표정을 지었던 때문이다.
1910년 7월경 마리 퀴리는 남편의 제자였던 폴 랑주뱅과 비밀스런 만남을 위해 그들의 연구실에서 멀지 않는 곳에 아파트를 임대하기에 이른다. 랑주뱅이 퀴리 부인에게 “우리 집(chez nous)에 8시30분 경 들리겠소.”고 편지를 보내는데, 여기에서 ‘우리 집’이란 그들 만의 비밀 아지트를 의미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랑주뱅 부인은 남편의 외도를 눈치 챘고, 두 과학자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랑주뱅은 퀴리 부인과 헤어지겠노라고 다짐하며 아내를 진정시켰고, 마리 퀴리는 두 딸과 함께 브르타뉴 지방으로 떠났다. 하지만 휴양지에서 퀴리 부인은 “우리의 사랑은 더욱 견고하며 그 누구도 파괴할 수 없다”고 연인에게 서신을 보내며, 그가 이혼하기를 기대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랑주뱅 부인의 감시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두 연인의 비밀스런 만남은 지속됐다. 1911년 어느 봄날, 랑주뱅 부인이 보낸 ‘밀사’에 의해 두 연인의 비밀아지트에 보관된 사랑의 편지들이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어서 11월경 서신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프랑스와 유럽 과학계를 흔드는 스캔들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퀴리 부인의 연인은 네 자녀를 둔 연하의 유부남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보다도 가톨릭전통과 보수적 풍습이 더욱 강했던 시대였다. ‘폴란드 여자’, ‘가정파괴범’이라는 지탄을 받자, 급기야 마리 퀴리는 두 딸을 데리고 한동안 이태리로 피신하여 살아야했다.
마리 퀴리가 교수로 근무하던 소르본 대학은 물론, 스웨덴 스톡홀름에까지 그 여파가 미쳐 노벨화학상 수상자에서 제명됐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아예 스톡홀름 노벨상 시상식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한다는 여론도 뒤끓었다. 그럼에도 마리 퀴리는 1911년 12월 10일 두 번째 노벨상을 수여받기 위해 당당하게 시상식에 출석했다. 이후 폴 랑주뱅과의 염문설도 수그러들었다. 이혼 소송에 휘말렸던 랑주뱅은 결국 아내와 타협하여 가정으로 돌아갔는데, 훗날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다른 여성과 다시 로맨스에 빠진 것으로 전해진다.
1911년 퀴리 부인과 랑주뱅의 스캔들이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소용돌이 시기에 아인슈타인도 등장한다. 그는 퀴리 부인에게 보낸 서신에서 “쓰레기 같은 신문기사들을 아예 읽지도 마시오”라고 귀띔했다. 아인슈타인 스스로가 언론이 앞서서 마녀사냥으로 몰아가는 데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신문매체들이 ‘폴란드 외국여자가 착실한 프랑스인 유부남을 유혹했다’며 일제히 퀴리 부인을 향해 집중포화를 날렸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이 “그 누구를 유혹할 만큼 매력적인 여성은 아니다” 라고 마리 퀴리를 방어했다는 말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 피에르 퀴리의 외조
운명의 장난인지, 퀴리부부의 손녀 헬렌 졸리오(1927년 출생)는 1948년에 랑주뱅의 손자와 결혼했다. 헬렌 졸리오-랑주뱅도 부모를 계승하여 핵분야 물리학자로 활동했다. 헬렌은 2018년 개봉작 ‘마리 퀴리’를 두고, 마리 할머니를 지나치게 페미니스트로 그려낸 데에 불만의 목소리를 냈다.
헬렌 졸리오-랑주뱅에 의하면, 마리 할머니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불과 3년 만에 노벨상을 수여받았는데, 피에르 할아버지가 없었더라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마리 할머니가 여성으로서 최초로 소르본 대학교수가 되었던 것도 갑자기 절명한 피에르 할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았던 덕분이라며, 피에르 퀴리의 외조를 강조했다.
사실 피에르 퀴리보다 마리 퀴리가 더 유명한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1995년 퀴리 부부가 파리 팡테옹에 안장되면서 마리 퀴리는 거의 현대인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아내를 따라 남편이 팡테옹에 입성한 이례적인 케이스이다. 이때 퀴리 부부의 초상화가 담긴 고액권 500프랑 지폐도 발행됐는데, 이 초상화에서도 남편은 아내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2018년 개봉작 ‘마리 퀴리’에서 피에르 퀴리 역은 샤를 베를링이 맡았다. 1997년 개봉작 ‘쉬츠 교수의 아카데미 훈장’에서도 피에르 퀴리를 열연했던 배우이다. 그는 지성과 감성, 인성을 겸비한 청렴한 과학자의 모습을 유감없이 재현해냈다. 영화에서 피에르 퀴리는 외국인으로 어려움을 겪는 폴란드 유학생에게 자기와 결혼하여 프랑스국적을 취득하라고 제안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폴란드에서 여성은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리는 1891년 파리로 유학을 왔고, 1895년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여 남편의 실험을 보조했다. 피에르는 아내의 능력을 가장 먼저 인정해 준 장본인으로서, 마리 퀴리가 과학자로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물심양면 도와주었던 최고의 조력자였다.
원래 1903년 노벨상도 피에르 퀴리만 수상자로 지명되었지만, 연구실 동료인 아내의 이름도 첨가해달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던 장본인은 피에르 퀴리이다. 이후 마리 퀴리는 최초의 여성 노벨수상자라는 아우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는데, 마리가 없었다면 피에르가 존재하지 않았고, 피에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마리도 존재하지 않았던 커플이었다.
한편 마리 퀴리 탄생 150주년이 되는 2017년 11월 7일을 기점으로 시작된 팡테옹 기념전은 오는 3월 4일까지 지속될 예정이다. 퀴리 부부가 안장된 8호실 묘지 방문도 빼놓을 수 없는 코스이다.
【프랑스(파리)=한위클리】이병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