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시대
[i뉴스넷] 최윤주 발행인/편집국장 editor@inewsnet.net
요즘 욕설은 확실히 다르다. 험악한 언어폭력 혹은 정을 담은 막말(?)에 가까웠던 예전과는 다른 특별한 감정이 실려있다.
대표적인 게 ‘충’이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수많은 신조어 욕설에 벌레 충(虫)자가 붙어 있다.
맘충, 자전거충, 노인충, 급식충, 출근충, 설명충, 진지충.
맘충은 아이 엄마들을 비하하는 단어다. 상황에 맞지 않게 진지하면 ‘진지충’이고, 아침에 출근하느라 지하철을 타면 ‘출근충’이 된다.
냉소와 비하의 표현이다. 누군가를 향해 토해내는 단어들 사이에 존중이 사라지고 비방이 춤춘다.
그저 눈살 찌푸릴 일에도, 조금 거슬릴 뿐인데도 순식간에 벌레가 된다.
그 뿐 아니다. 바늘가는데 실 가듯 ‘~충’에는 ‘극혐’이 따라 붙는다. 극도로 혐오한다는 뜻이다.
인간을 벌레 취급하는 것처럼 혐오스러운 건 없다. 개나 돼지같은 동물에 빗댄 ‘~같은’이라는 욕보다 몇 수 위다.
더 큰 문제는 욕이 더 이상 욕이 아니라는 데 있다. ‘벌레’로 취급받을 만큼 상식없는 사람들이 늘어났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를 향해 ‘~충’이라 손가락질하는 비난이 난무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모멸의 대상으로 넘지 말아야 할 모성, 종교, 여성의 경계선마저 허물어 버린 혐오는 사회 전반에 팽배하다. 일상어가 된 혐오의 언어들이 삭막한 세상에 나비효과를 일으켜 냉소를 더욱 부채질한다.
오죽하면 당연한 배려와 친절이 ‘미담’이 되어 신문기사를 장식할까.
비단 언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생각, 다른 피부색, 다른 종교, 다른 정체성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극혐’이 되는 세상이다. 가히 혐오의 시대다.
혐오와 차별의 반대편에는 다양성과 포용이 있다. 다양성이 죽은 사회는 발전이 없고, 포용이 없는 사회에서는 신뢰를 찾아볼 수 없다.
평창올림픽이 열리는 강원도 강릉에 설치가 검토됐던 ‘무슬림 기도실’이 기독인들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무산됐다. 무슬림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와 개신교의 폐쇄적이고 편협한 시각이 낳은 씁쓸한 결과다.
오죽하면 교계 내부에서 “전국 사찰을 다 돌아다니며 문닫으라 하지. 기독교계,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고 힐책하고, “무슬림에게 기도실을 제공한다고 하나님께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속 좁고 약해 빠져서 선교는 언제 하냐”며 쓴소리를 뱉어낼까.
종교마저 인간애와 존엄성을 잃어가는 각박함 속에 혐오가 더욱 판치고 있다. 혐오의 시대에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가 그토록 강조했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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