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엔 이덕규 시인의 '허공'이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시를 읽자마자 하나님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생각하며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없이 계신 이'라고 하던 유영모 선생의 하나님 이해가 새삼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자라면서 기댈 곳이
허공 밖에 없는 나무들은
믿는 구석이 오직 허공뿐인 나무들은
어느 한쪽으로 가만히 기운 나무들은
끝내 기운 쪽으로
쿵, 쓰러지고야 마는 나무들은
기억한다, 일생
기대 살던 당신의 그 든든한 어깨를
당신이 떠날까봐
조바심으로 오그라들던 그 뭉툭한 발가락을
시인의 믿음 앞에서
시인은 나무들이 기댈 곳이 허공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기막힌 발견입니다. 누구나 나무들이 허공을 향해 자라는 것을 보지만 실제로 그 사실을 인식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시인은 그런 나무에게서 완전한 절망을 봅니다. 기댈 곳이 허공 밖에 없다는 것은 기댈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댈 곳이 없는 이는 절망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 절망의 상황 속에서 위대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기댈 곳이 없는 허공 속에서 시인은 든든한 어깨를 보았습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허공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바라봅니다.
뿐만 아니라 단락을 달리 하여 결론부에서 제시하는 '뭉툭한 발가락'은 하나님의 애간장이 끊어지는 사랑을 절절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허공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마음까지 느끼고 있습니다. 더구나 시인은 허공에 기대는 나무들이 한쪽으로 기울다 마침내 쓰러진다고 말합니다. 초지일관 주님 향한 일편단심을 시인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한 번도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어떤 이의 믿음의 고백보다 진실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조바심으로 오그라든 하나님의 뭉툭한 발가락을 느낀 적이 없는 저는 시인의 믿음 앞에서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시인의 통찰이 절묘합니다.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은 허공에 몸을 맞기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들은 말로는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도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을 보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사람에게 의존합니다. 물론 거기서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돈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돈을 의존하면서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의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모순을 우회하는 길은 하나님이 돈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전인수의 전형입니다.
하지만 도움이 절실할 때 하나님은 허공이 되어주십니다. 우리도 나무처럼 그 허공을 향해 가지를 뻗어나가야 합니다. 허공을 향해 가지를 뻗는 나무의 심정을 시인은 이미 자신의 삶을 통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구석이 오직 허공뿐이라고 하는 것에서 우리는 절망을 경험한 시인의 인생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걸 시인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쪽으로 기운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이 바른 선택이었다는 것을 '든든한 어깨'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 의존 신앙
그러나 시공에 갇힌 인간은 그렇게 아무 의지할 것이 없는 허공이 두렵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찾게 됩니다. 물론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다면 그럴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로 넘쳐납니다. 그럴 때 인간은 의지할 수 있는 가시적인 대상을 찾게 됩니다.
아마도 그런 대상 가운데 가장 손쉬우면서도 신뢰가 가는 것이 목사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목사를 의존하는 목사 의존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목사 의존 신앙을 가지게 되면 자신이 해도 좋은 기도를 목사에게 부탁합니다. 스스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일들도 목사에게 물어야 안심이 됩니다. 어떤 모임이든 목사의 기도로 끝나야 잘 끝난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식으로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목사 의존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갇히고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의존하는 것에 그렇게 매여 허공을 향해 뻗어나가지 못하고 땅바닥을 기거나 의존하는 것에 기대어 기생하게 됩니다. 그런 모습은 결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 모습은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생명의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목사는 물론 그 어떤 것도 의존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상이라고 천명합니다. 목사 의존 신앙은 기껏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교회에 나와서 목사라는 우상을 섬기는 헛된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는 함께 신앙의 길을 걷는 길벗입니다. 물론 목사는 성도들을 섬기는 책임을 맡고 있지만 성도들은 목사의 양이나 밥그릇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목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먼저 된 자로서 의당 해야 할 일입니다. 게다가 그 순서는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모두가 상호 섬김을 실천하는 형제와 자매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높고 낮음이나 계층이 없습니다. 모두가 평등한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양육한 성도들에게 피차 안위함을 얻었다는 고백을 합니다.(롬12:1참조) 그것은 믿음 안에서 서로 격려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주고, 믿음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해주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는 대인들이 사람들을 임의로 지배하고 다스리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두가 동등한 형제와 자매로 함께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길벗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은 겸손도 과장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일상이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이 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여호와의 불 성곽
사실 허공의 개념은 성서에서도 예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스가랴서 2장에는 회복될 예루살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모습은 스가랴가 들은 예언의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미래의 예루살렘에 수많은 사람들과 육축들이 거하게 될 것인데 그 도시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성곽을 두를 수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성곽을 쌓을 수 없을 만큼 큰 도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음 말이 이어집니다.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미래의 예루살렘은 사람이 쌓은 성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불 성곽이 되셔서 그 안의 사람들을 보호해주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여호와의 불 성곽은 인간의 어떤 철옹성보다도 더 안전합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은 성곽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 성곽이 되어주십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불 성곽은 믿음으로만 보이는 무형의 성곽입니다. 시인이 보았던 허공과 같습니다. 하지만 성곽이 없어 무방비로 보이지만 그 어떤 성곽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벽한 성곽이 바로 여호와의 불 성곽입니다.
사람들은 성곽이 없는 성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의존하기에 허공과 같은 공간 속에서 믿음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허공을 의지하는 믿음은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이처럼 여호와의 불 성곽을 실제로 믿는 굳건한 믿음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참으로 영광되게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믿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인간과의 사랑을 완성해 가시는 것입니다.
자유의 창공
그러나 아무 것도 의지할 것 없는 허공은 자유의 창공이기도 합니다. 나무는 창공을 향해 마음껏 가지를 뻗을 수 있습니다. 북미 대륙에 있는 세콰이어 나무가 생각납니다. 열대 우림의 거대한 나무들도 떠오릅니다. 그런 나무들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자유롭게 뻗어나간 나무들입니다. 새삼 그런 나무들이 믿음의 나무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자유롭게 허공을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나무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그 자유를 처음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갈 바를 알지 못하는데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갈 곳을 지시해주시기도 전에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그런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 행동인지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무가 허공을 의지하는 것과 같은 믿음의 행동입니다.
그런 그의 행보는 모리아 산 정상에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목에 칼을 내리꽂는 순간 클라이맥스에 다다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물론 이전의 전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후대의 히브리서의 기자는 그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고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의 손에 들린 칼이 허공을 가르고 이삭을 향하는 바로 그 순간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만류합니다. 렘브란트는 칼을 쥔 아브라함의 손을 천사가 잡아 그 칼이 그의 손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그 순간의 긴박함과 진실성을 시각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허공을 향해 믿음의 손을 뻗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믿음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믿음을 완성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바로 그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모든 희망이 사라진 그 순간 그분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니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운명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십자가에서 그분은 믿음으로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허공을 향해 손을 뻗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든든한 어깨가 되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믿음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실한 제자들은 그래서 예수님처럼 허공으로 계시는 '없이 계신 이'이신 하나님을 믿고 모든 것을 의탁했습니다. 재물로부터 생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겼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버지는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희망의 등불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바로 그런 믿음의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나무들같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은 허공에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의지할 것 없는 허공은 그러나 자유의 창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창공을 향해 마음껏 가지를 펼칠 수 있습니다. 세콰이어 나무처럼, 열대 우림 속의 장대한 나무들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제자들이 마땅히 향해 나아가야 할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허공처럼 우리 곁에 계셔서 참 감사합니다. 허공을 향해 가지를 뻗는 우리의 사랑에 그분의 발가락은 오늘도 뭉툭하게 오그라들고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보고 만질 수 있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 찬양은 찬송가나 복음성가가 아니라 아래 동요를 부르면 어떨까요?
하늘향해 두팔벌린 나무들같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무들같이
하늘향해 두팔벌린 나무들같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무들같이
너도나도 씩씩하게 어서자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