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의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52)
Newsroh=강명구 칼럼니스트
바투미, 그리스어로 ‘깊은 항구’라는 뜻이다. 이곳은 아자르 자치공화국의 수도이며 아주 오래 전부터 문명의 교차로(交叉路)였다. 바투미의 시장이 사람들로 붐비고 흥청망청 거릴 때 동서양은 더욱 가까웠다. 이곳은 예로부터 동서양의 문물이 오고가던 그 어느 곳보다 활발한 삶의 터전이었다. 그리스 신화 속 마녀 메데아가 이아손(Jason) 원정대에게 황금양털을 건넸다는 신화가 이 광장에는 살아서 숨 쉬고 있다.
황금양털을 찾아 나선 이아손과 아르고호의 모험담은 고대신화의 대표적인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속 좁고 질투에 눈 먼 것이 신과 인간이 비슷한 것이 그리스신화가 흥행에 성공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정신 못 차리는 남자들, 사랑에 눈 멀어 부모와 나라를 배신하는 여자들이 모두 출연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야기에 빠져들게 한다. 그 까마득한 옛날에도 그리스 신화의 무대가 이곳 바투미라니 생각보다 실크로드의 역사는 더 오래되고 더 자유롭게 사람들이 왕래했나보다. 메데아는 이 광장에 우뚝 솟아 흑해를 바라보며 아직도 이아손을 기다리는 듯하다.
아르고호에 탄 50명은 이름만 대면 금방 알만한 호화멤버들이다.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 카스토스와 폴리테우케스, 헤라클레스, 아킬레우스의 아버지 펠레우스, 리라 명인 오르페우스 등 당대 최고의 멤버들이 총 망라(網羅)되었다. 이런 기라성 같은 호걸들이 목숨을 내걸고 풋내기 20대 빈털터리 청년을 따라 나선 건 그의 바보스러운 리더십 때문이었다. 그는 어는 순간에도 예의를 지켰고 복수를 하러 가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강을 건너는 할머니를 도와주다 신발을 잃어버리고 숙부에게 왕권을 되찾으러 가면서도 신발을 한쪽만 신고 가기도 했다.
어제 마친 지점에서 시작하여 바투미 시내를 가로 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300년 동안 오스만터키의 지배로 다른 조지아지역과 달리 회교도로 개종했던 지역이어서 아직도 시내 곳곳에 모스크가 많이 남아있다. 사람들도 터키어를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터키어를 구사했다고 생각하진 마시라! 터키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알아본다는 이야기다. 겨울이 긴 그루지야는 터키에서 건너온 야채들이 시장을 채운다. 계속되는 터키의 침략 속에도 자신들만의 조지아 정교를 지키고 그곳을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문화를 지키고 살아왔다.
바투미 시내를 벗어나서 산을 하나 넘고 터널을 지나자 송어양식장이 눈에 들어와 점심시간이 조금 이르긴 했지만 송어를 한 마리 사서 즉석에서 박호진씨가 매운탕을 제대로 끓여낸다. 조지아의 송어와 한국의 고추장의 만남은 치명적인 입맛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고국의 입맛에 영양까지 공급받은 나는 힘차게 흑해와의 마지막 인연을 멋지게 장식하면서 달리고 있는데 아자르 자치공화국의 교육, 문화, 체육부 장관이 보낸 비서관이 우리 일행을 찾아와 장관 면담과 방송국 인터뷰가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한다. 코불레티를 지나서 38.5km를 달린 지점이었다. 우리 일행은 그 지점에서 일정을 마쳤다.
지난밤 묵었던 호텔에서 다시 여장(旅裝)을 풀고 다음날 아침 일찍 아침식사를 마치고 출발하려고 나서다보니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어차피 내일쯤 하루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핑계 김에 잘됐다. 다시 짐을 풀고 늦잠을 즐기고 일어났는데 아자라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고 송교수님이 전한다. 그는 정말 집요한 외교관답게 평화마라톤 홍보에 혼신(渾身)을 다한다. 그렇게 열정적인 사람은 흔치 않다. 내일이 그루지야의 구정 명절인데 아침 생방송에 나와서 우리의 유라시아 달리는 이야기를 방송하자는 제의가 왔다.
그루지야의 제일 큰 명절날 아침 황금시간대에 우리의 평화통일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큰 기회이지만 그러면 하루 더 지체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아쉽지만 거절하고 말았다. 거절하고 돌아서니 일정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번 평화마라톤의 목적이 세계인들에게 한반도의 평화통일의 중요성을 알리고 지지를 받는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 다시 전화를 하여 생방송 출연을 약속하였다. 평화가 중요한 건 그루지야도 더하면 더했지 우리에게 뒤지지 않는다. 유사이래 끊임없이 외세의 침입을 받아왔고 얼마 전에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국토의 일부를 점령당했으니 말이다. 새해 첫날 ‘평화이야기’를 듣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큰 덕담이 될 것이다.
그리오골레티에서 이제 오랜 시간 정들었던 흑해와 작별을 하는 순간이 왔다. 이제부터는 내륙으로 들어서서 본격적인 동장군(冬將軍)의 기세와 맞서야 한다. 드넓게 펼쳐진 때 묻지 않은 야생의 코카서스, 그리스 신화의 영웅 프로메테우스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며, 노아의 방주(方舟)가 도착한 땅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외세의 침력에 맞서 싸우며 자신들만의 전통문화를 지켜온 억세고 순박한 삶이 있는 곳. 푸시킨이 극찬한 맛있는 음식이 있고 그것을 나눌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이다. 약 8000년 전부터 와인을 제조했다고 그루지야인들은 최초의 와인 생산국이 여기라고 믿고 있다.
바투미 중앙광장에서 양털가죽을 안서 서있는 마녀 메디아상(像)을 보면서 이아손과 아르고호의 모험담을 머리에 되새긴다. 이때 문득 드는 생각이 어찌 보면 바보스럽기까지 한 올바른 지도자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꿈과 희망을 망망대해에서 고기를 잡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듯 나누어주는 어부아저씨 같은, 폭풍의 한가운데서도 중심을 잡고 파도를 헤쳐 나가는 선장 같은 지도자. 분쟁이 있는 곳에 화친의 중재자로, 넉넉한 미소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그런 사람. 영혼을 팔지 않고 진흙투성이의 역사의 바닥에서도 연꽃으로 피워낼 줄 알며 사람들을 신명나게 하는 지도자! 바보 노무현이 그립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강명구의 마라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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