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무덤 2차 조국순례기
Newsroh=장기풍 칼럼니스트
나는 부두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었다. 슬로시티답게 음식도 천천히 나왔다. 여객터미널에서 배 시간을 보니 여서도 배가 4시 출항이다. 다리가 불편해 걷는 것을 최대한 줄였지만 슬로길과 범바위 등산을 합하면 8Km 이상 걸은 셈이다. 나는 식당에 퍼질러 앉아 주인아주머니와 아들 상대로 대화를 시작했다. 어머니 식당일을 거들어주는 젊은이에게 섬에서는 좀체 젊은 사람 보기 힘들다고 했더니 자기도 육지에서 살다 고향으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청산도 뿐 아니라 많은 섬이 젊은이가 없어 일손이 딸려 그 자리를 외국인 노동자들이 채우는데 청산도는 관광지라 그나마 젊은이들이 있는 셈이라고 했다. 오후 4시 배가 들어왔다. 완도행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되는 작은 철선이다. 그래도 차량 서너 대 실을 수 있는 페리선이다.
해상에서 바라보는 청산도는 역시 아름답다. 나는 청산도 만큼은 언젠가 사흘 정도 묵으며 마라톤 코스 길이의 슬로길을 모두 걷겠다고 마음먹었다. 배가 항구를 벗어나자 몹시 흔들려 견딜 재간이 없다. 선체기둥을 꼭 붙들고 있는 나를 보고 선장이 이곳은 내해가 아닌 제주 앞바다로 이 정도는 보통이라고 했다. 몇 명 안 되는 선원들은 모두 선실에 누워 있었다. 나는 한 시간 내내 선미 쪽 쇠기둥을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배에서 내일 때 선장이 다음부터는 배가 많이 흔들리면 배 중간부분 마루에 누워있는 것이 좋다고 귀띔했다. 아하, 그래서 선원들이 모두 객실바닥에 누워 있었구나.
여서도는 청산도 부속섬으로 배로 한 시간 걸리며 제주도로 가는 길목이다. 둘레는 10Km로 두 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는 거리다. 주민은 30세대 60여 명에 불과하다. 재미있는 것은 주민이 귀하다보니 마을중앙 돌비석에 전체주민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모르긴 해도 주민 전체 이름을 새긴 비석은 이곳이 유일할 것이다.
여서도에 주민이 정착한 것은 오래전이다. 신석기시대 유물까지 발견되었다. 내가 섬들을 여행하며 놀라는 것은 그 옛날 조상들이 외딴 섬까지 어떻게 흘러 들어와 자손을 번식하며 생활했을까 하는 것이다. 울릉도에는 우산국이란 국가까지 존재했다. 여서도 역사도 상당히 길겠지만 기록으로는 1690년대 강 씨 성 가진 사람이 이주한 후 다른 성 씨 사람들이 합류해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여서도'(餘鼠島), 일제 때는 '태랑도'(太郞島)로 부르다 광복 후부터 ‘아름답고 상서로운 섬’이라는 의미로 '여서도'(麗瑞島)로 부른다.
해발 352미터 여호산이 중심을 이루며, 2백 개 넘는 완도의 섬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해 제주까지는 40킬로로 여소산 정상에서는 제주도 거문도 청산도까지 보인다. 산 중턱에 조선시대 봉화대가 있다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왜구침략을 방어하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교통은 무척 불편하다, 완도와 청산도에서 하루 한 편 씩 오간다.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며 일부는 소를 방목하고 있다. 농산물은 주민들의 자급자족용이다. 그러나 해산물은 민어, 돌돔, 방어, 갈치, 돌김, 미역, 톳 등이 풍부해 연중 낚시꾼이 찾아든다. 파출소와 보건진료소 경유발전소가 공공기관이다. 청산초등학교 분교가 있었으나 학생이 없어 6년 전 폐교됐다. 주민들 식수는 계곡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물이다. 연중 약수를 마시고 사는 셈이다.
오후 5시 도착한 나는 파출소와 마을회관을 지나 몇 집 안 되는 민박집 가운데 깨끗해 보이는 집을 찾아 방을 얻었다. 주인아주머니도 섬사람답지 않게 세련된 모습이었다. 나는 어두워지기 전 골목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외계에 온 느낌이다. 이곳의 집들은 높은 돌담으로 지붕도 보이지 않는다. 집집마다 높다란 성벽에 둘러싸인 성(城)이었다. 집마다 임금과 왕비 공주와 왕자들이 사는 동화책에 나오는 성들처럼 느껴졌다. 돌담마다 위쪽에는 바람이 통하도록 조그만 구멍이 있었다. 마치 외부세계와 통하는 소통의 창구처럼 보였다. 나는 정신없이 신기한 풍광(風光)들을 사진에 담았다. 한국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나는 어디에선가 여서도를 ‘한국의 이스터 섬’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었다. 남태평양 외딴 섬에 거대한 석상을 세워놓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 모아이의 섬 말이다.
저녁에 민박집 주인이 들렸다. 경유발전소 책임자다. 80Kw 발전기 3대 중 2대만 가동한다고 한다. 지금은 경유발전이지만 오래지 않아 태양광 발전으로도 이 섬의 전력수요는 너끈히 감당할 것 같아 보였다. 요즘 한국에는 지역마다 태양광 발전설비가 붐을 이루고 있다. 안전하고 공해도 없는 태양광발전은 아무리 권장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민박집 남자는 저녁만 먹고 곧바로 발전소로 갔다, 언제 정전사고가 날지 몰라 늦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민박집 실내가 너무 아기자기해 식사 후 양해를 얻어 내실까지 둘러보았다. 아기자기한 소품과 수예품으로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대부분 주인여자 작품이라고 했다.
새벽에 다시 섬 일대를 둘러보았다. 워낙 작은 섬이라 볼거리는 많지 않았지만 높다란 돌담은 상상을 초월했다. 전날 청산도 돌담길 보고 놀랐는데 여서도에 비하면 규모에 있어 비교가 안 된다. 나는 아침식사도 거르고 실컷 쏘다니다 민박집을 나와 부두로 향했다. 다시 청산도에 들러 점심식사하고 오후 5시 출항하는 완도행 여객선에 승선했다. 멀어져가는 청산도를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3박4일이면 청산도 슬로길 일주와 여서도 여호산 등반에 충분하리라,
<다음은 보길도>
*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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