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하늘밭교회) = 최근에 읽은 김동문님의 글 '혐오가 복음이고 정답이다?'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배제와 혐오에 깔려있는 정치적으로 극우적 편향은 보수 정권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무비판적 지지로 기울곤 한다. 정치세력화를 꾀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자신들의 존재감을 강화하고 드러내기 위해 더한 혐오, 배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른바 혐오하기 경쟁인 것 같다. 약한 자에 대해서는 강하게, 강한 자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그 목소리를 조절하는 비뚤어진 모양새를 보이곤 한다. 인종, 성, 계층 등에 바탕을 둔 장벽을 무너뜨린 것이 복음이지만, 이런 목소리를 오히려 장벽이 되고, 장벽을 더 두텁게, 높게 쌓아올리고 있다. 기독교 정신은 배제가 아닌 포용이고, 혐오가 아닌 사랑이라는 주장은, 동성애자, 무슬림에게는 무의미한 듯하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의 이웃도 하나님의 피조물도 아닌 것 같다. 이런 현실이 안타까움이고 부끄러움이다. 씁쓸한 현실이 다가온다.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저 역시 한국 교회의 이러한 현상을 파악하고 있었고, 안타까워하던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인 개인들 역시 폭력적이 되어 사납고 무정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소위 말하는 '싸움 하는 곳'이 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국가에 충성하는 곳이 되었고, 섬기는 곳이 아니라 지배하고 통제하고 다스리는 곳이 되었고, 치유 받고 은혜로 충만해지는 곳이 아니라 상처나 주는 냉정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되었고, 자기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곳이 아니라 욕망에 따라 춤추며 하나님을 종 부리듯 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힘과 영향력을 추구하는 그런 교회들에서 권위주의적인 목사의 전횡과 세습이나 헌금유용, 그리고 성범죄와 같은 각종 타락이 불거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교회의 모습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개혁과 쇄신의 길에 나선 이들 역시 친절과 인내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보이지 못하고 똑같이 사나운 폭력적인 모습으로 결과적으로는 주님의 사랑을 잠식하는 일에 공헌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빛으로 드러나야 할 교회의 모습이 거꾸로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혐오와 배제가 생활이 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모습을 지적하는 저와 같은 사람들 역시 진영논리에 따라 배제하고 자신들이 마치 기독교의 마지막 보루라도 된 양 호기를 부립니다. 종교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반성과 성찰의 기능 역시 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순히 그러한 현상에 주목만 할 것이 아니라, 왜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를 심도 있게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범주화와 전체성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는 다양한 범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정치영역은 가장 쉽게 그 범주를 확인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정치에서는 언제나 '적이냐 동료냐'로 참예하게 피아를 구분합니다. 필요에 따라 합종연회하고 '적의 적은 친구'라는 아주 본능적인 구분이 자연스러운 영역이기도 합니다. 모든 관계를 범주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나 사실 정치영역보다 더 엄격하게 범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영역은 종교영역입니다. 그 이유는 종교영역에서의 범주화는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종교영역에서의 범주화가 무서운 이유는 신의 이름으로 사랑을 내세우면서도 막상 현실에서는 무서운 폭력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피아간의 구분이 단순히 다름을 드러내는 지표가 아니라 신을 위한 헌신을 촉발하기에 무시무시한 폭력을 행하게 되고, 그것을 정당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9·11테러나 요즘 흔히 보게 되는 테러들은 그 분명한 예입니다.
정치적 범주화는 국가나 정당 혹은 개인별로 다양한 층이 지닌 이익과의 관계 속에서 때로 상대화되기도 하고, 이익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특성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종교적 범주화는 고질적인 왜곡으로 고착되고 절대화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영역에서의 범주화보다 종교영역에서 범주화는 종종 매우 위험한 양상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종교영역에서의 범주화가 폭력을 낳게 되는 위험성보다 더 근본적으로 파괴적인 것은 종교 자체의 기반을 허무는 것입니다. 그 예가 십자군 전쟁이나 '정당한 전쟁 이론'과 같은 것들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복음에는 폭력이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예수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었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범주화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를 지키고자 전쟁을 불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독교를 모순의 종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기반 자체를 허무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오래 믿거나 잘 믿을수록 완고하고 사나운 양상을 보이는 것은 기독교의 범주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발로입니다. 범주화라는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기독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피아를 구분하고, 기독교를 보호하고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의미로 오히려 혐오와 차별을 부추깁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내의 범주화로 인해, 환대와 하나 됨을 목표로 하는 하나님 나라는 교회에서 멀어지고,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는 미움으로 가득 찬 종교집단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결과를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인식의 주체가 자아에 머물러 있는 한 범주화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범주화는 나아가 전체성을 형성합니다. 전체성은 자아가 인식의 주체인 인간의 숙명이라할 수 있습니다. 전체성은 피아를 구분하고 범주화를 통해 자신에 종속시킬 수 없는 상대를 제거하거나 말살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아가 폭력의 근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혐오와 배제는 대표적인 폭력의 일종입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망각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기부인 혹은 자기망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냐는 겁니다. 어쩌면 솔직한 질문인지 모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자기망각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말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소아 페넬롱의 말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말하는 자기 망각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기를 원하는 영혼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망각은 우리 자신과 관련해서 어떤 것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에 갇혀 자신의 소유와 복락의 관점에서 행복과 고난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 자신에 집착할 때 우리는 소박하고 순수한 사랑을 가질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고 진실 된 온전함을 추구하는 길에서 멀어지게 된다. 자신에 대한 집착은 스스로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전한 삶을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압박, 고난, 불안 속에서 헤매게 된다."-프랑소아 페넬롱, <그리스도인의 완전>, P. 248-
페넬롱의 말처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자신과 관련하여 어떤 것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해도 여전히 자기 자신과 관련하여 어떤 것을 봅니다. 하지만 자신 스스로에 갇혀 자신의 소유와 복락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헤아리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욕망은 자신을 제어하고자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작동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전처럼 언제나 자신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또 스스로 그러한 욕망을 쳐서 복종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인식의 주체가 자아에서 타인으로 넘어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욕망에 이끌리는 자신을 커다란 거울 앞에 세워놓고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타인을 바라볼 때 원래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도 함께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타인의 일을 자신의 일로 간주합니다. 그에게 모든 것은 동일합니다. 더 이상 그의 '나'는 없으며, 그의 '나'를 마치 타인처럼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는 '나' 없는 '나'가 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타자지향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옳음을 주장하지 말고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탄핵정국을 보면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일은 모두가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탄핵의 대상이 된 대통령도 자신은 오로지 나라를 위한 일념에 모든 것을 했고 자신은 개인적인 이익을 취한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범주화의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각종 혐오를 내세우면서도 그것이 기독교를 위한 것이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옳은 것을 주장하며 범주화를 통해 자아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범주화는 명분이나 대의 혹은 교리와 같은 것들을 내세우며 분파를 만들고 분파에 속하지 않는 다른 모든 이들을 제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옳음을 주장하며 실상은 자아를 강화시키고 욕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인간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서서히 데워지는 주전자 안에서 익어가는 개구리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향해 치닫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자로서 종교개혁이 안타까운 것은 불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로운 시작이 결국에는 자신들의 옳음을 주장하며 범주화의 길을 달려감으로써 결과적으로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할 교회 안에 공식적으로 폭력이 자리 잡게 한 것입니다. 이제 그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인 개신교 신자들에게서 또 다른 범주화의 열병을 보게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일입니다. 심은 대로 나고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워드 요더는 "인내란 '진리'와 비교하여 타자를 우선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을 옳음을 주장하는 것보다 타자를 우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인류 역사는 늘 옳은 것을 한다고 더 크고, 더 많은 악을 행해 왔음을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범주화는 옳은 것을 주장하며 자아를 강화시키는 길입니다. 혐오와 배제가 특징이 된 한국교회를 정화하는 일은 단순하게 환대와 포용을 말하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혐오와 배제가 아니라 환대와 포용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는 순간 또 다른 범주화로 찢어진 그리스도의 몸을 더 찢게 될 뿐입니다. 혐오와 배제를 제거하는 일 뿐만 아니라 개혁과 쇄신에 관련된 모든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망각한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 길은 요더가 말한 대로 옳음보다 타인을 우선시하는 인내할 수 있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자신에서 타인으로 변화될 때, 자신의 '나'를 타인처럼 바라보며, '나' 없는 '나'가 되어 타자지향적인 사람이 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통해 역사하고, 우리의 교회들은 혐오와 배제가 아니라 환대와 포용이 넘치는 평화 그 자체인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