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과 스탈린

뉴스로_USA | 미국 | 2018.03.07. 14:13

백만송이 장미 노래의 고향

유라시아의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54)

 

 

Newsroh=강명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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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나온 도시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이라는 것은 참 믿을 것이 못된다고들 하지만 나의 기억은 정말 믿을 것이 못된다. 고리라는 도시에 들어가기 전 마을이었다. 열심히 땀을 흘리며 코카서스의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는 나를 본 식당아저씨가 손짓으로 나를 불러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한다. 방금 전에 휴식 시간을 가져서 쉴 시간은 아니지만 부르는 손짓이 사뭇 진지해서 발걸음을 멈추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따끈한 차도 내왔지만 포도주도 한 잔 가득히 따라준다. 그루지야에는 “당신이 나의 적이면 칼을 받고 나의 친구면 와인을 받으라!”라는 속담이 있다. 그는 우리를 친구로 생각했으므로 와인을 따랐고 나도 친구로 받아들였으므로 한 잔을 단숨에 비웠다. 친구가 된 우리는 통하지 않는 말로 열심히 떠들고 웃고 사진 촬영을 하였다. 사진은 여러 장면을 찍었는데 마지막에 한 남자가 큰 사진을 가지고와서 내게 건네주며 들고 찍으라고 해서 나는 무심결에 자기의 가족사진인 줄 알고 사진을 찍었는데 찍고 나니 스탈린 사진이란다. 나는 순간적으로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고, 얼굴에 묻은 벌레 떨쳐내듯이 사진을 떨어트려버렸다.

 

고리는 스탈린의 고향이다. 거기에 스탈린 박물관도 있다. 레닌이 만든 소비에트를 세계 초강대국으로 끌어올린 이가 바로 그루지야의 고리 출신의 스탈린이다. 작은 시골 마을인 고리의 구두수선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발가락은 기형에다 얼굴에는 천연두(天然痘)의 후유증인 곰보자국에다 키마저 자그마해서 아이들에게 늘 놀림을 당했다. 술에 취해서 심하게 매질을 해대던 아버지는 그가 11세가 되던 해에 다른 사람과 싸우다 칼에 찔려 죽고 만다. 이렇게 성장한 그는 러시아혁명 당시 역할은 미미했으나 레닌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한다.

 

레닌은 그에게 강철의 인간이라는 뜻으로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스탈린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46년 동안 그는 수없이 많은 인민의 피 위에 강철의 제국을 건설하며 자기가 태어난 조국 그루지야도 핍박(逼迫)한다. 숙청이란 미명하에 2천만 명에 달하는 인민들을 죽인 희대의 학살자 스탈린과 같은 무자비한 제국주의자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나의 평화마라톤의 임무 중의 하나인데 그의 사진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게 되는 우발적인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한반도를 두 동강으로 갈라 친 계기가 되는 얄타회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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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소련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완성했다면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함께 페레스트로이카를 주도했고 소련 붕괴를 맞이했던 외무장관 셰바드르나제가 또한 그루지야 출신이며 그는 그루지야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재선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 두 인물이 모두 그루지야 출신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러시아의 역사에서도 그렇지만 그루지야의 현대사에서 스탈린과 셰바르드나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루지야 출신으로 설명만 조금 붙이면 우리가 잘 알 만한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으니 그 이름은 니코 피로스마니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그루지야의 화가이다. 피로스마니는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고 무명으로 젊은 시절을 보내다가 결국 가난과 질병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화가였다. 부잣집 하인, 철도 노동자 등의 일을 하면서 그림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하고 간판을 그리고 남은 페인트로 그림을 그렸던 사람, 생전에는 인정을 받지 못해 평생 가난한 화가였던 그는 죽고 나서야 인정받아서 그림은 비싸게 팔리고 헌정시(獻呈詩)가 바쳐지고 노래가 만들어지고 영화가 만들어졌다.

 

마가리타라는 프랑스 출신의 여배우를 남몰래 사랑한 그는 그 여배우가 장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그녀에게 백만 송이 장미로 여배우의 집 앞을 장식한다. 하지만 여배우가 자신의 정원에 꽃 바다를 이룬 백만 송이 장미를 누가 선물했는지도 모른 채 밤기차를 타고 순회공연을 떠나버렸다. 이 비운의 화가의 사랑은 거기까지였다. 트빌리시에는 유난히 꽃가게가 많다.

 

어머니가 그루지야인이었던 러시아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가 가사를 쓰고 국민가수 알라 푸가초바가 불렀던 ‘백만 송이 장미’는 이렇듯 가슴 아픈 사연을 담았다. 보즈네센스키는 러시아 작가 콘스탄틴 파우스톱스키(1892~1968)의 단편 ‘꼴히다’에서 소재를 취해 시를 썼고, 파우스톱스키는 그루지야의 원시주의풍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18\62~1918)의 실제 사연을 소재로 글을 썼다. 그루지야인들이 걸어온 역사와 삶도 이렇듯 순결하고 비극적이어서 백만 가지 사연을 다 담은 듯하다.

 

그 깊은 사연이 그루지야의 포도주에 담겨서 포도주 맛도 순결하고 비극적이며 치명적인 맛을 담았나보다. 성경에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마셨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기원전 6,000년 전 수메르의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에 따르면 와인의 역사는 기원전 6,000년경부터 시작됐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은 지역이 아라랏산 근처이며, 아라랏산은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 소아시아 지역에 있다. 그루지야의 지정학적 위치와 일치한다. 그루지야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포도나무의 원산지라고 주장하는데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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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빌리시에서 밤차로 작별의 인사도 못하고 떠난 사람은 또 있다. 한 달여 같이 지내며 내게 백만 송이 장미와 백만 개의 가시를 함께 주고 송인엽 교수님이 갑자기 무엇이 급해졌는지 기차표를 끊으러 가시더니 거기서 시간이 많이 지체해서 갈 때 작별의 인사도 못하고 떠났다. 내가 지나게 될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들려서 사전 정지작업을 하신다고는 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런 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여덟시에 기차는 떠났다. 오늘은 선한길 교수님이 오셨는데 이별과 작별은 언제나 동시에 이루어지나보다.

 

“바쿠행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그해 1월은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트빌리시의 올드타운과 뉴타운을 가로지르는 무츠바리 강을 연결하는 다리는 이태리 건축가 미켈 데 루치가 설계한 자유의 다리이다. 자유의 다리를 지나며 평화의 길을 설계하는 나그네의 어께 위에 설산을 비추고 뚱겨 나온 정오의 햇살이 정답게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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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강명구의 마라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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