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안도의 놀라운 항일역사(1)
Newsroh=장기풍 칼럼니스트
나는 이튿날 아침 일찍 버스정류장에 나가 노화도 동천항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조금 있으니 어제 배에서 만난 노인이 무거운 가방을 끌고 나왔다. 반갑게 인사하니 엊저녁 나와 술 한 잔하고 싶어 찾았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 보길도 은거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노인의 성공과 건강을 빌어주었다. 동천항에서 그는 완도행 배를 타고 나는 소안도 배를 기다렸다. 동천항 옆에는 거대한 교량공사현장이 보였다. 앞으로 노화도와 소안도의 구도와 체도를 연결하는 두 개의 연도교로 총연장이 2Km가 넘는다. 몇 년 안에 노화도 보길도 소안도는 교량으로 연결된 삼도일체의 섬으로 변한다. 남해안 곳곳의 교량 건설현장을 보면 마음이 착잡했다. 물론 교량이 연결되면 주민들 교통도 편리해지고 관광객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육지와 조금 떨어져 섬 나름대로 형성된 고유한 삶의 문화와 풍속은 급격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섬 고유의 따뜻한 인정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견문이 짧아서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이나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다. 지차체가 경쟁적으로 투입하는 건설비를 건설업자 배불리기에 사용할 것이 아니라 주민복지 예산에 더 투입하면 어떨까 싶다. 주민 백 명도 안 되는 작은 섬에 수십 수백억 투입하는 교량공사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잠시 후 소안도로 가는 연락선이 도착했다. 이 연락선도 교량이 완공되면 더 이상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완도군 소안면인 소안도(所安島) 면적은 23.22 km2로 본래 남북의 2개 섬이었으나 너비 500m, 길이 1.3㎞의 매립도로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섬이 되었다. 총면적은 28.55㎢에 달한다. 해안선 길이는 42㎞. 중앙에는 해발 350m의 가학산을 비롯한 228m 부흥산, 338m 대봉산 등 굴곡이 심한 산지로 이루어졌다. 인구는 2500여 명이지만 주민들 말로는 전복양식을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천여 명이 더 살고 있다고 한다. 소안도는 조선시대 영암군에 속했다가 1896년 완도군이 생기면서 군내 19개 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많은 피난민이 들어와 주민이 늘기 시작했다. 정조 때 가혹한 세금징수로 삶이 곤궁해지자 주민들은 자신들의 어려움을 적극 상소해 조정에서 별장(別將)을 주둔시켜 주민을 보호하게 했다. 부당한 정책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소안도의 저항정신의 전통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른다. 소안도는 함경남도 북청과 부산 동래와 더불어 항일운동의 3대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연락선은 한 시간도 안 걸려 소안항에 도착했다. 부두에는 ‘항일의 섬 해방의 섬 소안도’라는 커다란 돌비석이 여행객을 맞이했다. 마을로 향하는 해변은 온통 태극기 물결이었다. 태극기 행렬을 마을에서도 계속되었다. 공공건물은 물론 가정집들도 거의 빠짐없이 태극기를 게양했다. 1년 365일 매일 게양한다고 한다. 나는 해안도로를 천천히 걸었다. 소안도는 일제 36년 내내 저항과 탄압의 세월을 보냈다. 해방 전 소안도 인구는 1천 가구 6천 명이었다. 그 중 6백여 명이 일제의 블랙리스트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혀 감시와 투옥의 대상이 되었다. 절반이상 가구가 해당되는 셈이다.
소안도의 항일정신은 한일병탄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다. 1880년 대 일본인들은 소안도에 몰려와 거주지를 이루고 해산물을 약탈했다. 참다못한 주민들은 1866년 일본인 거주지를 불태우고 이들을 내쫓았다. 또한 동학전쟁 당시 이곳은 동학군의 훈련 장소였다. 자연히 많은 주민이 동학군에 가담하면서 주민들의 저항의식이 높아졌다. 1894년 12월 동학군 접장을 맡았던 주민 4명이 총살되고 3명이 태형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주민들이 일본을 원수로 생각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일제는 이 지역 해상교통의 중요성을 깨달고 일찌감치 등대를 설치했다. 이에 주민들은 1909년 2월24일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4명을 처단하고 등대를 폭파했다. 동학혁명 때 죽도록 곤장을 맞고 풀려난 의병들이 주동이 된 것이다. 지금도 등대에는 일본인들이 세운 ‘조난기념비‘라는 것이 우리가 세운 항일전적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일본인 기념비에는 “등대 간수들이 1909년 2월24일 폭도들 흉탄에 쓰러졌기에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1910년 이 비를 세운다”고 기록돼 주민들의 항일투쟁을 증명해 준다.
소안도 주민의 항일투쟁은 한일병탄 뒤 더욱 거세어졌다. 일제는 당시 국유지이던 토지를 매국노 이기용 자작에게 넘겼다. 주민들은 13년 간 소송투쟁 끝에 되찾았다. 이러한 끈질긴 투쟁은 지식인들이 앞장서고 주민들이 적극 호응한 결과다. 소안도 주민들은 나라를 빼앗긴 것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자각으로 교육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 지도자들은 기존 서당을 통폐합해 1913년 신식 교육기관인 중화학원을 설립하고 이듬해 전라도 경상도 지방에 항일단체 수의위친계를 조직했다. 1915년에는 송래호 등이 주동되어 영호남에서는 처음으로 지.덕.체를 목표로 하는 배달청년회를 결성했다. 주민들은 3.1만세 사건이 터지기 무섭게 3월15일 완도 장날에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주동했다. 나는 이러한 소안도의 항일역사를 접하고 외딴 작은 섬 주민들의 엄청난 투쟁에 놀랐다. 우리나라 어느 지역보다 치열한 항일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특히 주민들은 “배움만이 살길이다”는 자각아래 의연금(義捐金)을 모아 1923년 5월 230명 학생으로 소안학교를 설립했다. 나는 소안도의 엄청난 역사에 놀라면서 현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믿어지지 않는다. 왜 까맣게 몰랐을까.
<계속>
*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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