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회가 총기 규제를 둘러싸고 심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2월 14일 미국 플로리다의 한 고등학교에서 또 한차례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해 총 17명이 희생되면서 총기 규제 강화에 대한 미국 시민들의 목소리는 전국의 중고생들의 연대로 확산됐습니다.
총격사건이 발생한 플로리다 주 마조리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 학생들 가운데 총기 규제 강화 캠페인을 주도해온 남녀 학생 5명은 최근 발행된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에 등장하면서 총기 규제 여론을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미국에서는 총기 사고로 매일 96명이 목숨을 잃고 있으며 연 사망자 수는 3만3천명, 부상자 수는 7만9천명에 이른다는 수치는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3월 마지막 주말에는 미국 전역에서 50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총기 규제를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다수의 시민과 학생들은 “호주처럼 총기 규제 강화법을 도입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아무튼 플로리다 총기 참사 사건 이후 호주의 총기규제강화법’은 다시한번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대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호주의 총기소지규제법 도입의 발단은 지난 1996년 호주 최남단 타스마니아주의 유적지 포트아서에서는 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이었습니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중인 마틴 브라이언트의 무차별적인 총기 난사로 무고한 시민 35명이 목숨을 잃게 되자 당시 자유당 연립정부의 존 하워드 연방총리는 연립정부의 한 축인 국민당의 핵심 지지 계층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총기규제강화법을 통과시켰습니다.
하워드 당시 연방총리는 총기 규제 반대 시위대를 상대로 양복 속에 방탄조끼를 착용한 상태로 나타나 이들을 직접 설득하는 연설을 강행하는 등의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11년 최장기 집권의 기반을 다진 바 있습니다.
그리고 호주는 22년째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의 무풍지대의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평가하며 “국가 지도자 리더십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사례’로 지적합니다.
실제로 1991년 8월 17일 시드니 스트라스필드에서 발생한 사실상 호주의 첫 총기 난사 사건을 통해 우리는 국가 지도자 리더십의 중요성에 대한 산 교훈을 얻게 됩니다.
지금은 ‘리틀 코리아’로 불리는 호주의 대표적 한인밀집지역 스트라스필드의 ‘심장부'인 ‘스트라스필드 플라자’에서 호주 역사상 첫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해 주민 7명이 숨지고 6명이 총상을 입게 됩니다.
플라자 안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당시 33살의 범인 웨이드 프랭컴(Wade Frankum, 택시 기사)은 갑자기 사냥용 대검을 꺼내들어 그의 앞을 지나가던 15살 소년의 등을 마구잡이로 찌른 후 소포용 봉투에 은닉했던 반자동 소총으로 쇼핑객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합니다.
카페 주인을 비롯 쇼핑객 모녀 등 7명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숨지고 스트라스필드 쇼핑센터는 문자그대로 아수라장이 됩니다.
범인은 총기를 난사하면 쇼핑센터 옥상 주차장으로 뛰어가 차량을 탈취하고 도주하려다 경찰차량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자, 그는 자신의 반자동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스트라스필드 플라자 총기 난사 사건 직후 당시 노동당의 봅 호크 정부도 총기규제 강화법을 추진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당시 노동당 정부도 전국 단위의 총기 규제 강화법을 추진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타스마니아 주와 퀸슬랜드 주에서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결국 1996년 4월말 타스마니아 주에서는 사망자 35명, 부상자 23명이 발생한 호주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다수의 정치 평론가들은 “당시 노동당의 봅 호크 정부가 좀더 강력한 총기 규제법을 도입했다면 포트 아서 총기 난사 사건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더욱이 노동당 지지층은 총기 규제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계층이었던데 반해, 총기규제강화법을 통과시킨 존 하워드 정부의 지지층은 현 미 공화당 정부와 마찬가지로 총기 규제에 결사 반대한 계층이라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스타 정치인’으로 불렸던 마이크 베어드 전 뉴사우스웨일즈 주총리가 그레이 하운드 경주 금지 조치에 대한 국민당 지지층의 강력한 반발로 ‘백기투항’한 후 결국 주총리직에서도 물러나는 촉매제가 됐다는 점 역시 상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국가의 안위는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을 거듭 인식하게 됩니다.
http://www.topdigital.com.au/node/5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