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주와 김어준을 생각한다
Newsroh=소곤이 칼럼니스트
‘본지는 한국 농담을 능가하며 B급 오락영화 수준을 지향하는 초절정 하이코메디 씨니컬 패러디 황색 싸이비 싸이버 루머 저널을 지향한다..’
1998년 7월 6일, 한국 최초의 인터넷 풍자매체(諷刺媒體)로 탄생한 딴지일보(DDANJI ILBO) 창간선언문이다. 재벌에게나 붙던 ‘총수’를 스스로 자처한 당시 30세의 김어준은 ‘똥꼬 깊수키’로 상징되는 비속어와 성적 농담을 유려하게 섞어내며 정치 경제 사회의 기존 권력을 비판해 큰 호응을 얻었다.
비제도권 언더그라운드 미디어인 딴지일보는 한때 직원 50명을 둘 정도로 성장했지만 진보정권(국민의 정부) 탄생이후엔 사세(?)가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부패한 권력과 모순된 기존질서를 통렬하게 풍자하는 비주류 미디어는 비판적 언로가 뚫리기 시작하면 힘이 약해지는 법이다. 김어준이 어느날 성인용품 판매 등 ‘섹스’를 화두로 한 비즈니스 창출에 힘을 기울인 것도 그 때문이다.
진보정권 10년간 별다른 존재감이 없던 딴지일보는 이명박보수정권 회귀(回歸)이후 서서히 영향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특히 김어준은 2010년부터 국내에 본격 소개된 팟캐스트에 눈을 돌려 시사평론가 김용민, 전국회의원 정봉주 등과 함께 2011년 4월부터 ‘나는 꼼수다(나꼼수)’를 시작해 공전의 히트작을 만들었다.
나꼼수 8회부터 탐사기자 주진우가 합류한후 각자의 특성을 활용, 폭발적인 시너지로 많은 고정 청취자를 확보한 것이다. 이듬해 12월까지 20개월간의 나꼼수 방송은 한국에 팟캐스트 열풍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사실 난 김어준이 영원한 아웃사이더 언론인일줄 알았다. 어쩐지 기존 질서와는 도무지 맞지 않을 것으로 보인 스타일도 그렇고 그러나 종편 등 달라진 방송환경속에 기존 미디어와 팟캐스트의 융합(融合)이 이뤄지면서 그는 라디오(김어준의 뉴스공장), TV(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까지 거침없이 진출, 오늘날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인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싫든 좋든 제도권 언론인이 된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막강한 언론권력을 가진.
어떤 분야든 권력을 누리게 되면 오해도 받기 쉽고 설화(舌禍)에 휘말릴 가능성도 많아진다. 수구 정권하에서 나름의 언로(言路)를 구축한 김어준 등 나꼼수 4인방은 오늘의 영향력을 향유할 자격이 있지만 동시에 겸손해야 하고 진실과 정의의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언필칭 언론이라면 누가 정권을 잡든 ‘워치독’의 역할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여기엔 진영논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2011년 12월 구치소 수감전 나꼼수 멤버들과 함께 한 정봉주(왼쪽 세번째) 전의원
그런 점에서 지난 한달여간 김어준과 정봉주가 보여준 행태는 실망과 분노를 가져오기에 충분하다. 서지현 검사가 JTBC에 출연해 용기있는 ‘미투 고백’을 한 이후, 사회 전반에 켜켜이 쌓였던 성폭력의 적폐가 봇물처럼 터져나오던 그때 김어준은 돌연 ‘미투 공작설’을 꺼내들었다.
”제가 예언을 하나 할까봐. 이거는 공작의 사고방식으로 사안을 바라봐야 보이는 뉴스..미투운동하고 그 다음에 권력 혹은 위계에 의한 성범죄 뉴스들 엄청나게 많잖아요. 이걸 보면 ‘아, 미투운동을 지지해야 되겠다. 그리고 이런 범죄를 엄단해야 되겠다’ 이게 일반적인,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공작의 사고방식으로 이걸 보면 어떻게 보이냐. 첫째, 섹스. 좋은 소재. 주목도 높아. 둘째, 진보적 가치죠. 그러면 피해자들을 좀 준비시켜서 진보매체를 통해서 등장시켜야 되겠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진보적 지지자들을 분열시킬 기회다. 이렇게 사고가 돌아가는 겁니다..지금 나온 뉴스가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예언하는 것이다..올림픽이 끝나면 그 관점으로 가는 사람들이나 기사들이 몰려나올 것이다.." (2월 24일 팟캐스트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김어준의 언급은 우선 사실관계에서 문제가 있다. 최초의 폭로자인 서지현 검사는 보수 정권의 부패한 검찰 권력이 대상이었다. 이어 터진 시인 고은, 연극인 이윤택, 감독 김기덕 등 진보정권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이들이 미투 가해자로 쏟아져 나왔지만 그들의 범죄적 행위가 명백하다는 점에서 공작적 사고는 견강부회(牽强附會)다. 김어준의 언급이후 발생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미투’(JTBC)와 정봉주(프레시안), 민병두(뉴스타파)의 잇단 ‘성추행 미투’는 김어준의 예언(?)을 더욱 논란거리로 만들었다.
김어준의 말이 논리적으로 이해되려면 지금까지 부패한 보수정권과 정면으로 맞섰던 진보언론이 대체 무슨 목적으로 진보인사들의 성추행을 들먹여 적진을 유리하게 만드는 공작적 음모를 꾸미느냐는 의문이 설명되야 한다.
성범죄는 좌도 우도, 이념도, 사상도 그 무엇도 아니다. 유독 진보인사들이 많은건 우연한 현상일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진보가 보수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도덕적 잣대로 인해 더욱 적극적인 미투가 가능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김어준의 예언은 그와 특수관계인인 ‘봉도사’ 정봉주가 미투 폭로에 대해 “새빨간 거짓말” “대국민사기극”이라고 목청을 높이면서 진보진영의 내분과 갈등을 몰고 왔고, 결과적으로 미투운동을 심대하게 훼손하고 말았다.
정봉주사건은 여러 정황상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정봉주의 대응방식도 이해가 안갔지만 합리적 판단을 도외시한 그의 지지자들이 박사모와 어떻게 다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처럼 읍소(泣訴)하던 정봉주는 피해여기자가 렉싱턴 호텔에 있었던 시간을 증명하는 자료를 공개하고 나서야 호텔에서 결제한 영수증을 뒤늦게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만난 기억은 없다며 피해자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호텔에 간 기억이 진실로 없다면 치매검사를 해보든가, 크레딧 카드의 도난여부를 주장하는게 합리적인데 대국민사과와 정계은퇴를 선언하다니 이것도 참 어이없는 일이다.
김어준 역시 TV(김어준의 블랙하우스)를 통해 정봉주가 결정적인 증거라며 제시한 780장의 사진을 선택적으로 분석해 그를 옹호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대신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시간을 통해 “사진을 왜 다 공개 안했냐는 말도 있는데 첫째는 경찰 수사중이었고 두 번째는 다른 시간대까지 제시하면 법원이 내는 결론을 대신 내는 것과 같았다, 못한 게 아니고 하면 안 된다고 판단한거다"라고 변명했다. 그는 ”어떻게 기억 못하냐고 할 수 있는데 오래된 일은 부정확하다. 같이 있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면서 “정 전 의원이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하려 마지막 조각을 찾으려다가 자신의 주장을 반증하는 증거를 스스로 찾아낸 것, 굉장히 아이러니한 결말”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진보진영이 얻은 내상(內傷)은 실로 크다. 특히 김어준은 미투공작설의 진원지 역할을 한데다 막강한 영향력의 TV와 라디오 방송을 자신과 아주 가까운 이를 위해 활용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소곤이의 세상뒷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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