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태극기의 섬, 항일운동 성지 소안도(5)
Newsroh=장기풍 칼럼니스트
나는 동래의 학생 항일운동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발견했다. 첫 째는 섬마을 지도자들이 주도한 소안도와 달리 학생들 스스로 일제초기부터 말기까지 줄기차게 투쟁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일제시대 최후의 대규모 항쟁이란 점이다. 셋째로 단순한 시위가 아닌 게릴라투쟁까지 시도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화투쟁까지 전개했던 점이다. 이는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래중학은 사립에서 공립으로 전환된 후에도 항쟁을 이어갔다. 3,1 만세운동 이후인 1925년7월 4백여 학생들은 퇴학생복교와 경찰의 학생감시를 허용한 학교의 사과를 요구하며 동맹휴학했다. 1933년 11월에는 3,4학년 학생 150명이 교장과 8명의 교사배척과 조선역사 수업, 수업료 인하 등 7개 요구조건을 내걸고 동맹휴학했다. 특히 일제말기 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당과 순국당 비밀결사를 조직했으며 '노다이 사건'으로 불리는 부산항일운동을 주도했다.
1940년대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으로 최후 발악할 때다. 조선을 합병한지 30년이 지나 조선인들의 항일정신이 무뎌지고 동화되었다고 믿던 때다. 일제는 이런 자신감으로 내선일체를 내세워 창씨개명과 징병, 징용을 실시했다. 이런 때 일어난 ‘노다이 사건‘ 의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후 각급학교 군사훈련을 강제했다. 1940년11월21일 노다이 육군대좌 지휘로 경남학도 연합군사대연습이 열렸다. 부산, 경남의 중학생들을 경기관총과 38소총으로 무장시켜 동군과 서군으로 나누어 전투훈련을 실시했다. 동군은 부산2상(한), 부산중(일), 부산1상(일)으로 편성해 구포에서 김해방면으로 진격하고 서군은 동래중(한), 마산중(일), 진주농고(한), 진주중(한)으로 진영에서 김해방면으로 진격했다. 이때 노다이(乃台)는 철저히 일본학생과 조선학생을 차별했다. 이틀 뒤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 입장도 전년도 우승교인 동래중보다 부산중을 먼저 입장시켰다. 조선학생들이 항의했으나 묵살되었다. 부상자 후송 담가(擔架)경기 때도 동래중학이 우승하자 재시합을 시켰다. 무장행군도 전년도 1등인 부산2상을 가장 불리한 코스에 배치하고도 부산2상이 1위를 달리자 반칙이라며 우승을 가로챘다.
이 같은 차별에 조선학생들이 폐회식 불참을 결의했으나 학교 측 간청으로 참가한 후 일장기 하강식 때 학생들은 애국가와 아리랑을 제창하면서 울분을 폭발시켰다. 운동장은 한 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이에 놀란 경남지사와 노다이 대좌 및 일경들은 도망쳐버렸다. 학생들은 교사들 만류에도 1천여 명이 시내를 행진하면서 '황성옛터' '아리랑'을 부르면서, '조선독립만세!' '일본놈 죽여라!'를 외쳤다. 이날 저녁 중앙동에 재집결한 학생들은 노다이 관사를 습격하려고 몰려갔으나 도망치고 없었다. 마침내 이날 밤 부산헌병대에서 경찰서에 긴급지령을 내려 시위학생 2백여 명을 검거했다. 이 중 부산상고와 동래중 15명은 주모자로 투옥되었다. 홍병희 등 12명은 1심에서 징역 8월과 징역 8개월 집행유예 3년 등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즉시 항소했는데 이 과정에서 유복자인 추유복 처지를 동정한 동지들이 전혀 가담한 일이 없노라고 입을 맞춰 무죄로 풀려난 미담도 있었다. 그러나 고문과 수감 후유증으로 김선갑과 김명수 두 학생은 출옥 2주 만에 순국했다. 일제의 강압으로 두 학교는 자체적으로 퇴학 21명, 정학 44명, 견책 10명 등으로 징계했다.
동래 학생의거는 일제 말 국내에서 전개된 최후의 대규모 항일투쟁이지만 우리민족의 독립정신이 살아있음을 밝힌 것이었다. 보도통제만 없었다면 광주학생사건 못지않게 전국에 확대되었을 것이다. 나는 동래 항일운동을 보면서 나라를 빼앗겼을 당시 태어나지도 않은 학생들이 애국가를 외웠다는 사실에 놀랐다. 물론 그들이 부른 애국가는 안익태가 만주황제 즉위기념 교향곡으로 작곡한 지금의 곡과 달리 독립군들이 불렀던 올드 랭 사인이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학생들이 조직한 조선청년독립당은 1940년 겨울 양중모 남기명 등이 중심된 독서회에서 비롯되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8월 당원들은 군용열차가 구포를 통과할 때 폭파하기로 결의했지만 순국당 사건으로 이관수가 검거되면서 당원 9명 모두 체포되었다. 순국당(殉國黨)이란 1943년 봄 만주에서 귀국한 차병곤이 초등학교 동창들과 독서회를 하면서 동래중 학생들과 접촉해 1944년5월 13명이 모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뜻으로 조직한 것이다. 순국당은 행동목표로 총독암살, 군사시설파괴, 일본인 거주지 방화, 은행습격, 미군 공습시 산불놓기 등을 결의하고 이를 지면에 적어 혈서로 서명했다. 그러나 이들은 1944년7월31일 일제히 검거되고 말았다. 조국이 해방되기 불과 1년도 안 되던 때다.
<이상 KNN 캡처>
이러한 적극적인 항일투쟁과 함께 동래중학 허웅(許雄) 등 18명 학생들은 조선어연구회를 설립했다. 이들은 동래고보 스승이던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崔鉉培 1894~1970) 선생 정신을 계승해 한글을 후배들에게 교육했다. 허웅은 최현배 선생 ‘중등 말본’을 교본으로 학생들에게 강의했으며 5학년생 9명이 하급생 한명씩 맡아 가르치고 5학년이 졸업하면 또 하급생을 선발해 민족정신을 이어갔다. 일본의 감시가 삼엄했던 1930년대 중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조선어를 연구하고 이를 통해 한글과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 항일의식을 고취한 것이다. 이들은 해방 후 부산에 한글문화회를 조직하고 한글강습소를 설치하는 등 한글교육의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동래 항일투쟁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교육과 한글이 독립정신의 중요한 자양분이었다는 교훈이다. 일본이나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경영 중요한 포인트는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말살하는 것이다. 무력침략 못지않게 두려운 것은 문화침략이라는 교훈이다. 소안도에서 8시간 이상 걸려 부산에 도착한 나는 또 한 번 좌절했다. TV 뉴스는 풍랑으로 남해안 출항이 묶였다는 것이다. 귀국날짜가 닷새 밖에 남지 않아 더 이상의 도서여행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나는 부산 인근 모텔에서 피곤한 몸을 눕히고 남은 닷새를 유용하게 보내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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