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장일순 선생의 삶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하늘밭교회) = 원주에는 협동조합이 많이 있습니다. 협동조합이 다른 협동조합이 탄생하는 것을 도울 정도로 원주는 협동조합이 상대적으로 많은 도시입니다. 그 한 복판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무위당 선생을 만난 적도 없고, 그다지 잘 알지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분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그만큼 그분의 사상과 행동이 걸출하고 배울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장일순 선생의 호는 일속자입니다. 좁쌀 한 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분에게 한 기자가 선생님은 어째서 좁쌀 한 알이라는 가벼운 호를 쓰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 장일순 선생 ⓒ자료사진 |
"나도 인간이라 누가 뭐라 추어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어. 그럴 때 내 마음을 지그시 눌러주는 화두 같은 거야. 세상에서 제일 하잘 것 없는 게 좁쌀 아닌가. '내가 좁쌀 한 알이다.' 하면서 내 마음을 추스느는 거지."
보지도 않은 그 너털웃음 소리와 웃는 모습이 귀에 들리고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그 얼굴에 또 다른 보지 못한 얼굴인 예수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못 말리는 예수쟁이의 상투적인 습관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런 제가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분의 세례명이 요한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에 대해 그다지 잘 알지 못하는 저로서는 그분의 세례명 요한이 세례 요한인지 사도 요한인지 모르겠지만 그분의 삶과 흐름으로 대강 미루어 짐작컨대 사도 요한이 아니라 세례 요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의 신발 끈을 매기에도 부족하다고 자신을 낮추었던 세례 요한의 모습이 그분에게서 보이기 때문입니다.
헌데 생각하면 할수록 그분 앞에 서면 부끄러움만이 느껴지는 건, 그분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좁쌀 한 알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복음에 올인 한 이후에 저는 늘 자칭 좁쌀 한 알이 아니라 그냥 객관적으로 좁쌀 한 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좁쌀 한 알로 살아가는 삶은 쉽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좁쌀 한 알인 인생이 되자,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더 커졌습니다. 하지만 좁쌀 한 알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하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아무도 좁쌀 한 알을 보고 겸손하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꿋꿋할 수 있느냐고 대견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 길어지자 놀라운 변화를 스스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건 바로 다른 좁쌀 한 알들에 대한 공감이었습니다. 그들의 에린 마음과 외로움과 아픔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절대로 제 삶을 미화하려거나, 합리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좁쌀이 되었기에 좁쌀 한 알들에 깃들어 있는 생명의 존귀함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이 있는 모습 그대로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장일순 선생 역시 그런 현실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좁쌀 한 알의 현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을 좁쌀 한 알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어쩌면 좁살 한 알이 아닐 수 있는 사람이 좁쌀 한 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좁쌀 한 알이 아닌 분이 좁쌀 한 알처럼 살아가는 일도, 좁쌀 한 알인 사람이 좁쌀 한 알로 살아가는 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미 낮은 곳을 지향하는 그 마음이 이미 그리스도를 닮았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려는 인간의 의지는 매우 귀한 일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이 섬기는 자가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나름 노력해 보지만 한계에 부딪히는 결정적인 이유는 스스로 좁쌀 한 알이 되는 삶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좁쌀 한 알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영적인 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복음의 핵심에 위치한 근본적인 요구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이 곧 좁쌀 한 알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의 본질이 상대방과 같은 눈높이를 가지는 것이며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어 행동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힘을 가지고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해로 자주 대체되기 때문에 복음이 말하는 섬김의 도를 기독교 안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아이러니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좁쌀 한 알>이라는 책에 장일순 선생에 관한 이런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그분이 언젠가 제재소를 경영하던 최아무개라는 이에게 “너나 나나 거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장일순 선생이 뜨악해 하는 그 사람에게 물었다.
“거지가 뭔가?”
“거리에 깡통을 놓고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여 먹고사는 사람들이지요.”
“그렇지. 그런데 자네는 제재소라는 깡통을 놓고 앉아 있는 거지라네. 거지는 행인이 있어야 먹고 살고, 자네는 물건을 사가는 손님이 있어 먹고 사네. 서로 겉모양만 다를 뿐 속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선생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하느님인가?”
얼른 답을 못하자, “거지는 행인이, 자네에게는 손님이, 고객이 하느님이라네. 그런 줄 알고 손님을 하느님처럼 잘 모시라고. 누가 자네에게 밥을 주고 입을 옷을 주는지 잘 보라고.” 하였단다. 밥집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 집에 밥 잡수시러 오시는 분들이 자네의 하느님이여. 그런 줄 알고 진짜 하느님이 오신 것처럼 요리를 해서 대접을 해야 혀. 장사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은 일절 할 필요가 없어. 하느님처럼 섬기면 하느님들이 알아서 다 먹여주신다 이 말이야.”
이 글을 읽으며 성경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엡6:5-7)
잔인한 주인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가뜩이나 힘겨운 현실을 살고 있는 종들에게 현실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는 이런 주문을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매우 잔인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실천임을 그분은 내다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빌레몬서를 통해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주인과 종들이 형제와 자매로 한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자신을 거지로 생각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을까요? 자신을 좁쌀 한 알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을까요? 오늘날 혼탁한 교회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목사는 목사대로, 성도는 성도대로 크고자 하고, 자신을 위대하게 여기려 하기 때문에 힘을 내세우는 싸움이 일상화되고 온갖 탐욕이 성령의 이름으로 미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이토록 분명하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이토록 분명하건만, 그 길을 가려는 사람이 없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 불행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옳은 말을 하는 분들은 많습니다. 그런 분들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처방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핵심은 옳고 바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좁쌀 한 알과 거지'입니다. 그런 분들은 그렇게 옳은 것을 주장하면서 자신에게 힘이 없음을 탓하고,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힘을 가져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나서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겠다고 결기를 부립니다. 더 위대해지겠다고,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출하는 그 모습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역행하고 그리스도를 역행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실은 언제나 불의한 모습으로 힘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거기에 대항하되, 힘을 가진 자 스스로가 자신이 불의하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당해주라는 것입니다. 오리를 요구하는 자에게 십리를 가줌으로써 오리를 가자고 한 자신의 요구가 부당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하라는 것입니다. 한쪽 뺨을 치는 자에게 다른 쪽 뺨을 들이댐으로써 그의 분노를 크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때리는 자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자신의 분노가 불의한 것이었음을 스스로 자각할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힘으로 그들의 권리를 빼앗으라던가 성공해서 기회를 만든 후에 변화를 이루어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좁쌀 한 알이 되어 섬기라는 것입니다. 시키는대로, 혹은 억지 춘양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단 마음으로 다시 말해 상대방이 의아해 할 정도로 그래서 생각하도록 만들라는 것입니다. 개혁이나 쇄신, 혹은 변화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장일순 선생은 씨앗 한 알에 우주 만물이 들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땅에 떨어지고 썪어야 하는 씨앗의 숙명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좁쌀 한 알인 장일순 선생이 귀한 것은 이렇게 씨앗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좁쌀이 되어 우리에게 복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떨어져 썩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아니 자신 안에 들어 있는 우주의 생명이 발아하지 못하도록 하는 우리 자신을 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크고 힘을 가진 자가 아니라 스스로 낮아져 좁쌀 한 알이 되고 다른 이들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들의 나라라는 이 가장 근본적인 사실을 볼 수 있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우리들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빛으로 드러나는 생명의 역사를 이 땅에서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