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달러의 기적 5] 해주 바닷가에서 쪽배로 황해를 건너다 '8달러의 기적'은 재미과학자 한도원 박사(84)의 일대기 입니다. 현재 올랜도에 거주하고 있는 한도원 박사의 일생은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삶이면서 귀중한 현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하여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여름 풀벌레 소리와 어디선가 짐승 우는 소리, 그리고 우리 일행이 저벅저벅 걷는 소리만 들리던 한적한 산길에서 느닷없이 북한 경비병들이 나타나다니. 미리 매복하여 잡아들일 계획이었다면 우리가 수없이 지나쳐온 동네길과 야트막한 야산 둘레길도 있었을 것을, 왜 오밤중에 그것도 민가도 없고 인적도 드문 험한 산길에서 매복했다 나타난단 말인가.
온 몸에서 힘이 쫙 빠진 채 얼이 빠져있던 우리에게 북한 경비병이 음험하고 컬컬한 목소리로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앞에 던져 놓으라고 명령했다. 우리를 체포하기 위한 동작을 취할 줄 알고 덜덜 떨고 있던 차에 '돈'을 내놓으라니! 그제서야 나는 이들의 목적이 돈이란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는 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그들은 짐 더미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돈 전대들을 미리 준비한 포대에 재빠르게 쑤셔 넣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를 하나씩 돌려 세우고는 온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굳은 우리는 이들이 하는대로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내 앞으로 경비병이 다가왔다. 이마에서 땀이 솟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는 양 손으로 내 허리춤을 요령껏 이리 저리 만지작 거리더니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가 잡혀지는 것을 느낀 듯 했다. 이윽고 허리춤에 둘려져 있던 돈 전대를 홱 잡아채 듯 빼내서는 보란 듯이 내 눈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흐흠, 이 속에 제법 많은 돈이 들어 있겠군. 안그래?" 나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으나 입술만 달싹거릴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눈앞에서 두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포함한 3만원이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었으나 두려움으로 몸이 굳어 대꾸할 염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그 돈이 어떤 돈인가. 후창을 떠나기에 앞서 어머니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마련한 돈이 아니던가. 당시 북한에서는 '붉은 화폐'와 남북 모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조선은행권 '원'이 통용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일행으로부터 꽤 만족할 만한 성과를 올린 탓인지 기분좋은 내색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고, 되려 동정하는 투로 우리가 갈 길을 가리켜 주는 척하고는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내 수중에는 배낭 속에 넣어둔 약간의 비상금과 옷가지, 그리고 책 한권만 남게 되었다. 앞뒤를 분간하기 조차 어려운 숲속 어두움이 우리를 깊은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해주로부터 우리를 안내하고 숙박을 시켜주며 돈을 챙기고, 북한 경비병들과 짜고 다시 돈을 털어내 챙겼을 안내원 남자를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북한 경비병들과 사기꾼 안내원 남자도 사라진 상황에서 한동안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리에 주저 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총격을 당하거나 노동교화소에 끌려간 것도 아니니 천행아닙네까. 뱃턱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으니 죽기살기로 가봅시다래!"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심전심이었다.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우리는 북한 경비병들이 가리켜 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차례 위기를 겪었으니 뭔가 행운이 올 것이란 억지 기대감으로 우리는 숲속으로 난 길을 한참 헤쳐 나갔다. 한 시간쯤 걸어가자 비릿한 갯내음이 콧속으로 느껴져 왔다. 30여 분쯤 더 가자 드디어 달빛에 반사된 바다 물결이 춤을 추고 있는 광경이 우리 눈앞에 펼져졌다. 구불구불 곡선을 그리며 후미진 곳에 수십 척의 소형 고깃배가 아무렇게나 매어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고, 좀 더 멀리 바다 쪽 깊은 곳으로 제법 큰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우리가 바닷가로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이 들리더니 한 남자가 나타났다. 우리는 여차하면 도망갈 채비를 한 채 조심스럽게 그에게 접근했다. 내 친구 백군을 비롯한 탈출자들이 불과 사흘 전에 이곳에서 당한 일을 생각하니 뒷꽁무니에서 금방이라도 북한 경비원이 총을 들고 나타날 것만 같았다. 이번에야 말로 행운이 따라주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남자는 조용히 따라오라는 듯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채 손짓을 하며 잰걸음으로 배들이 매어져 있는 쪽을 향했다. 완만한 모래사장이 끝나고 50여 미터쯤 떨어져 있는 곳에 우리가 탈 배가 매어져 있었다. 우리는 가지고 있던 짐을 두 손으로 잡아 머리 위로 쳐들고는 물속으로 들어 갔다. 한여름 바닷물인데도 상당히 차가웠다. 물이 목에 까지 차오를 정도로 깊은 곳까지 가서야 겨우 배 앞에 도달했다. 짐을 던져 넣고 하나씩 차례로 올라타자 남자는 익숙한 솜씨로 노를 젓기 시작했다. 해안을 둘러싸고 있는 숲 속에서 꿩인지 매인지 모를 새들이 푸더덕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바람에 모두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갑판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남자가 어서 가라는 듯 등을 떠밀며 배 아랫쪽 짐칸으로 안내했다. 조심스레 사다리를 타고 좁다란 통로로 내려가자 퀴퀴한 냄새가 확 풍겨져 오며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이미 10여명의 다른 탈출자들이 웅크리고 앉아서 우리가 내려오고 있는 것을 불안한 기색으로 쳐다 보고 있었다. 선장인 듯한 남자가 주변에 경비선이 돌고 있으니 찍소리 말고 가만히 있으라며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바닷가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떠 있었고, 일정한 시간을 두고 경비선이 순찰을 돌고 있는 듯 했다. 몇분이 지나자 우리를 태운 동력선이 소리를 작게 죽인 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짐칸 통로 위로 휘영청 밝은 달이 보석 같은 빛을 발하며 떠 있었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을 벽에 기댔다. 이제 드디어 남쪽으로 향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스르륵 눈이 감겨왔다. 잠시 걱정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더니 시커먼 턱수염을 한 로스케들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기도 했고, 친구 백군이 혼비백산하여 어디론가 허겁지겁 달려가는 장면도 나타났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배 밑창에서 스크루가 돌아가는 소리가 심하게 들리더니 배가 이러 저리 방향을 트는 느낌에 잠을 깼다. 그러더니 갑판 위에서 짐칸 아래쪽 통로를 타고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왔습니다. 여기는 남쪽땅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살았습니다. 하나씩 위로 올라 오세요!" 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드디어 우리는 남쪽땅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저기 결리고 쑤시던 온 몸에 아연 생기가 돌았다. 지나온 날들이 꿈만 같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감사합니다, 조상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잡고 기쁨의 눈물을 글썽였다. 하선을 하기 위해 갑판 위에 오르자 바닷가 저편에서 먼동이 트고 있었다. 나는 그때의 상쾌한 바닷바람을 평생 잊지 못한다. 배낭을 어깨에 맬 틈도 없이 끈을 움켜 쥐고는 한 걸음에 배에서 내려와 건너온 황해 바다를 잠시 바라다 보았다. 압록강변 우리 마을을 떠나올 때 막막하기만 했던 여행, 해주 산간 오두막을 떠나 산중에서 북한 경비병을 만났을 때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던 여행, 그리고 불과 몇시간 전 해주 어촌 모래사장에서 오금을 저리며 덜덜 떨리는 발걸음으로 고깃배에 올랐던 '위험한 여행'을 끝내고 삼팔선 남쪽땅 바닷가에 선 것이다. 그러나 내 앞에는 또 다른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술 정리 및 스토리 구성 김명곤 기자, <코리아위클리> 제휴사인 <오마이뉴스>에도 올려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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