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트럭킹 도전기
Newsroh=황길재 칼럼니스트
어제 잠자리에 들었다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나는 이미 메디컬 카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2월달에 뉴욕에서 이미 받아 놓은 것이다. 그것으로 DMV에 가서 퍼밋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 닥터 리포트는 나중에 집에 갈 때 새로 받아서 제출하면 되고. 나는 갑자기 희망에 부풀었다. 가슴이 뛰었다. 덕분에 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헛된 희망이란 것은 아침에 알았다. 수업 전에 강사를 찾아가 다른 주에서 발급한 메디컬 카드로 퍼밋을 받을 수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단칼에 회사에서 발급한 것이라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나는 그런 경우 최소한 DMV에 가서 시도는 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 닥터 리포트는 나중에 책임 지고 해결할 수 있다는 등의 예상 답변을 준비해 갔으나 그냥 나왔다. 깨달은 것이다. 설령 DMV에서 퍼밋을 받을 수 있더라도 나는 이미 공식적으로 탈락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침 수업 출석 확인에서는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각각 다른 부서가 회사 전체의 시스템으로 연결돼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고, 그 중 하나의 절차에서라도 문제가 생기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또 한국식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절차대로 가자. 최선을 다 하되 무리는 말자. 절차를 어기면서까지 하는 것이 무리다. 최근 그 댓가를 치르는 정치인들이 많지 않은가. 최선을 다 했으니 후회는 없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생각났다. 주인공이 수용소(收容所)에서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희망 때문이었다. 최후에는 죽음을 당하지만 자신의 아들을 살려냈기에 헛된 희망은 아니었다. 설령 아들 조차 죽었다고 해도 헛된 희망은 아니었을 것이다. 희망 없이 살아가는 것은 죽는 것 만큼이나 고통이기 때문이다. 나도 잠시나마 헛된 희망을 가졌을 망정 잠은 편히 잤으니 그걸로 됐다. 헛된 희망이란 없다. 실패도 경험이다.
어제 밤에 인터넷으로 그레이하운드 표 일정을 확인했더니 오늘 일정은 모두 매진이었다. 내일 아침 표도 4장 남은 상태였다. 자칫하면 토요일 떠날 수도 있다. 리쿠르터에게 표 예매를 환기(喚起)시켰다. 곧 될 것이라는 답변이 왔다. 그리고 얼마 후, 예매가 됐으니 사무실에 가서 약속 어음에 서명하라는 연락이 왔다. 다행히도 내일 아침에 출발하는 표를 용케도 구했다. 약속 어음에는 교통비와 이자를 기일까지 갚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중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언제까지 갚으라는 기일은 없었다. 그냥 경비 지출에 대한 형식적인 절차 같았다. 어떤 이유로든 왔다가 탈락해 집으로 돌아간 사람이 한 둘이 아닐텐데 무슨 수로 회수를 하겠는가. 집으로 가는 교통비를 안 주는 회사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돌아가는 교통비 청구가 나중에 있었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다.
나와 같이 수업을 들은 사람들은 퍼밋을 받고 즐거워 했다. 게중에는 나와 같은 차를 타고 온 사람도 있었다. 그는 내 사정을 듣더니 유감을 표했다.
미국에 식구들 보다 먼저 왔을 때 청년산악회에 가입해 자주 등산을 다녔다. 그때 알게된 맨발이라는 동생이 있는데 페이스북 포스팅을 보고 연락이 왔다. 그때 회원 중에 장거리 트럭을 하는 사람이 있다며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보라는 것이다. 좀 전에 통화를 했다며. 고마웠다. 맨발은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1년 전에 결혼했다고 한다. 속초에서 모텔에서 일하는데 올림픽 기간 동안 평소보다 손님이 적었다고 했다. NJ산님에게 전화를 했더니 운전 중이었다. 십여 분 정도 통화를 하고 내 상황에서는 프라임이라는 회사가 꽤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에 가면 자세하게 통화하기로 하고 끊었다.
이번 결과도 단순히 운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어찌보면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2년 전 사고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은 행정 시스템이 느린 탓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보상을 더 받아보려고 치료를 연장했던 내 책임도 있다.
아직 오늘은 많이 남았다. DMV 근처에 영화관들이 있었다. 점심 먹고 가서 영화나 한 편 보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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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
2번 시내버스를 타고 극장으로 갔다. 월마트 앞에서 버스를 타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1달러 57센트란다. 1달러 25센트라고 들었는데 그새 올랐나? 암튼 버스를 타고 1달러 57센트를 기기에 넣고 나니 버스 기사가 어디 가냐고 묻는다. 목적지를 말 했더니 1달러 25센트 요금인데 너무 많이 넣었단다. 이 아줌마 뭐야? 내가 자기가 가는 곳까지 간다고 생각했나?
가면서 본 스프링필드의 풍경은 몹시 쇄락해 보였다. 명색이 그래도 세인트 루이스에 이은 미주리 두 번째 도시인데도 그렇다. 물론 행정구역 상으로는 미주리에 속해 있는 캔자스 시티가 가장 큰 도시다. 그러나 도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캔자스 주와 미주리 주에 걸쳐 있기 때문에 정체성은 캔자스 주에 가깝다. 스프링필드는 약 16만명이 산다.
지난 번 미국 대선 미주리 주 결과는 트럼프가 압도적으로 이겼다. 스프링필드에는 아시안은 물론이고 흑인도 잘 찾아보기 어렵다. 몰락해 가는 도시의 가난한 백인들이 트럼프의 선거 캠페인에 쉽게 넘어 갔을 것이다.
명색이 다운타운이라는 곳에 갔는데 평일 대낮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니 가게들도 영업이 잘 될리가 없다. 극장도 10개관이 넘는 멀티플렉스인데 사람이 없다. 내가 본 상영관은 나 혼자 전세 내고 봤다. 공포 영화 안 보길 잘 했다. The Hurricane Heist를 봤는데 이 영화를 본 이유는 순전히 시간이 맞기도 했거니와 트렉터 트레일러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세 대나. 트럭 상표는 정확히는 안 보였지만 Freightliner 같았다. 프라임에서 가장 많이 보였던 차종이었다. Freightliner는 Kenworth, Peterbilt, International 등과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트럭메이커다. 이 영화는 특별히 트럭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봐도 된다. 트럭 액션은 봐줄만 했지만 나머지는 별 볼 일 없다. 줄거리도 엉성하고 연기도 평범하다. 악당은 왜 그리 멍청하다 못해 착하기까지 한지. 미국 재무부 시설에 침입해 현찰 6억 달러를 훔치는 대담한 사람이 왜 그리 사람은 안 죽이려고 하는지. 경비 요원들도 모두 마취총으로 제압한다. 주인공도 빨리 죽이면 될 것을 봐주다가 자기가 죽는다.
장장 1박 2일을 가야 하니까 월마트에 가서 버스에서 먹을 거리를 좀 샀다. 내일 아침 카페테리아에서 아침 대신으로 먹을 것을 선택할 예정이다. 아침은 4.5 달러, 점심 저녁은 각 7달러 치 음식을 살 수 있다. 메인 디쉬 하나에 과일이나 음료수를 선택하면 딱 맞는 정도다. 물론 오버되면 그 차액을 더 지불하면 된다. 여기 있는 동안 매끼 챙겨 먹는 규칙적인 식사를 했다.
차는 7시 35분 출발이지만 셔틀버스는 6시에 출발한다. 그레이하운드 버스가 제 시간에 올 지 의문이다. 11년 전에는 무려 6시간 이상을 기다린 적도 있으니까.
돌아가서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려나. 빨리 돈을 벌어야 하는데. 일이 늦어지면 임시 알바라도 해야겠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황길재의 길에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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