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작은 자의 감사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 = 천주교 서점인 바오로딸을 드나들면서 서점에 근무하는 분과 가까워졌습니다. 비교적 자주 드나들게 되자 그 서점의 여직원이 제게 혹시 목사님이 아니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더니 성직자분들에게는 책을 더 많이 할인하여 준다면서 카드를 만들어주었습니다. 혹시 너무 거룩한 척을 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분의 세심한 관찰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후로 서점을 들르면 그분은 먼저 "목사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인사를 듣고 제가 목사라는 것을 알게 된, 같은 서점에 근무하는 나아 드신 수녀님이 어느 날 제게 책을 하나 소개해도 좋겠느냐면서 책 한 권을 건네주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으로 그 책을 받아들고, 그 책을 샀습니다. 그 책은 어떤 장로교 신학대학 교수 부부가 쓴 책이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천주교가 이단이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천주교가 주장하는 성서를 연구하였습니다. 당연히 마리아 숭배, 고해성사, 화체설과 같은 대표적인 주제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연구하던 부부는 천주교의 성서해석이 오히려 더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천주교 대학에서 자신들이 연구한 것을 천주교 신자들과 개신교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처음 그 책의 취지를 서문에서 읽고 '어쩔 수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어떻게 장로교 신자에서, 이단으로 여기던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지, 그들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책잡을 요량으로 그 책을 면밀히 살피며 자세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책을 다 읽었는데도 그들이 주장하는 성서해석의 논지를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자세히 읽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교리 연구에 열성을 가진 목사님에게 아무 언질도 주지 않고 드리면서, 교리에 정통하신 목사님이 한 번 자세히 분석을 해보시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 그 목사님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확인을 해보았습니다. 어떻게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셨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고개를 저으며, 아무런 수식어도 없이, 발견하지 못했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틀림없이, 너무도 분명하게 이단의 교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었는데 막상 그 책의 흐름을 따라 읽어 내려가면서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깨어진 신앙
그것은 단순히 지평이 넓어지는 경험이 아니라 모든 것이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전의 저는 늘 '심판자'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옳은지 그른지, 이단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자리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은 일이지만 저의 적은 지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내려오니 제가 참 작은 존재라는 것, 그리고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분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현실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제가 얻은 것은 미약하긴 하지만 들을 귀와 볼 수 있는 눈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 놀라운 변화가 이어졌습니다. 제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신앙이 깨졌습니다. 이전에는 옳고 그름만이 들리고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옳고 그름이 아니라 사랑이 들리고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쓰레기로 치부되었던 것들(자유주의, 해방신학, 여성신학, 신비주의, 예수 세미나, 김교신, 서남동, 안병무, 함석헌, 이세종, 이현필, 유영모, 천주교, 이슬람, 불교, 노장사상, 관상기도, 여호와의 증인, 전교조... 등등 너무 많아 전부를 열거할 수 없는)이 사실은 보물과 같이 귀중한 것들이었다는 자각과 함께 새로운 복음과 새로운 세상 이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복음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가 죽은 후에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 그것을 위해 일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전도나 선교가 거들먹거리며 하는 영혼구원이 아니라, 먹을 것이 있는 곳을 알게 된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그것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과 같은, 당연한 것이라는 새로운 이해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갔던 분들과 그분들의 흔적이 너무도 고마웠고, 읽어도 헤아릴 수조차 없는 그분들의 마음과 깨달음이 존경스러워졌습니다. 물론 나서기 좋아하는 자아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늘 하나님의 시험에 실패하지만, 그 역시도 부끄러움이 되어 저를 작아지게 하는 데 기여할 뿐입니다.
점점 더 무능해지고 약해지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길에서 자신의 무능과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더 깊은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합니다. 사랑과 용서는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능과 약함을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힘에 의존하는 노력은 자기를 시험하는 또 다른 힘을 키울 뿐입니다. 힘으로 자기의 약함과 무능을 극복하려 할 때 결국 힘에 의존하며 자신의 힘을 자랑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인간을 교만하게 하고, 여러 가지 유혹에 빠지게 하고, 지치게 하고, 마침내 좌절하도록 이끕니다.
무능과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먼저 자신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힘에 의존하는 자신의 힘이 한계가 있다는 것, 자신이 의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버려야 할 대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힘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는 은총입니다. 성령이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과 같다는 것은 인간이 검불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지적해줍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존재가 되기 위해 우리는 검불과 같이 철저하게 무능하고 약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부끼는 갈대가 아름다운 것, 꺾어지지 않는 것은 그렇게 바람에 자신을 맡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과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은 불고 싶은 바람과 같은 성령에 자신을 내맡길 줄 압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은 이처럼 무능하고 약하기 때문에 자신을 성령에 맡길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멸시와 천대는 작은 자의 숙명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도 저의 무능과 약함을 바라보며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직 작은 자만이 서로 사랑할 수 있고, 무능과 약함을 통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기대할 수 있고, 성령의 이끌림에 따라 갈대처럼 흔들리고, 민들레 홀씨처럼 멀리 날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게 책을 소개했던 수녀님이 저의 이런 미래까지 바라보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책 한 권이 제게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앎과 소유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알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힘을 강화하며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들의 성취는 영원히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교만한 저를 무능과 약함의 길로 인도해주신 수녀님과 그 수녀님을 만나게 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