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고 있다
남북정상의 단독대화
Newsroh=노창현 칼럼니스트 newsroh@gmail.com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같이
종로의 인경(人定)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고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 ‘그날이 오면’(1930)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 ‘도보다리’에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울 때 문득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읽은 시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40여년전의 아득한 일이지만 그 시를 처음 봤을 때 가슴 깊은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올랐지요.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한 20세기 초엽(1901년) 태어나 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엄혹한 세월속에서도 끊임없이 저항하며 독립의 그날을 오매불망 그리다 1936년 짧은 생애를 살다간 심훈(沈熏). 그의 대표작은 농촌계몽소설로 유명한 ‘상록수’이지만 1930년 삼일절을 기념하여 지은 ‘그날이 오면’은 세계적인 저항시로서 평가받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목숨이 끊기기전 와주기만 하량이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지금 다시 읽어도 온 몸이 끓어오를 듯 합니다. 어떤 언어가 이처럼 절절한 독립의 염원을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백범 김구 선생도 일찍이 ‘독립된 나라의 문지기’가 될 수 있다면 아무 여한이 없다고 토로했습니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통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은 완전하게 자주 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의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 백범일지
이 나라의 자주독립에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던진 수많은 애국지사들, 독립투사들, 무명의 민초들이 있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고 1910년 경술국치의 치욕을 겪으며 반세기만에 해방을 이뤘지만 우리 민족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조국 반도는 미국에 의해 반으로 동강나(애치슨라인)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겪었습니다.
1905년으로 소급하면 우리는 113년째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로 존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 부푼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북정상이 만난 것은 2000년과 2007년 있었지만 이번 정상회담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앞서 두 차례를 뛰어넘는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남북의 지도자가 대단히 강력한 힘과 의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세계시민사회에 전례없는 촛불혁명을 통해 대통령이 되었고 70%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갖고 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1년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권좌에 올랐지만 혹독한 대북봉쇄속에서도 핵무력을 완성시키고 경제까지 아우르는 놀라운 지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지난 1, 2차 남북정상회담은 역사적인 합의와 진전이 있었지만 남의 지도자들이 수구세력의 조직적인 저항에 부딛쳤고 임기말의 상황으로 추진력을 발휘하기 어려웠습니다. 북의 지도자 또한 건강 문제와 불안정한 후계구도, 국제사회의 제재로 인한 경제불안 등 산적(山積)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남이 ‘이명박근혜’라는 10년의 퇴행기(退行期)를 단숨에 뒤집는 위대한 촛불혁명으로 자신감을 얻었다면 북은 90년대 ‘고난의 행군’ 이상의 가시밭길을 걸으면서도 자력갱생하며 확실한 존재감을 키웠습니다. 무엇보다 남과 북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진정성을 확인하였고 그간의 경험을 통해 실질적인 합의 이행을 해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북정상의 판문점 만남은 지금도 꿈인 듯 몽롱한 잔상(殘像)으로 남아 있습니다. 남과 북의 경계를 가르는 군사분계선 앞에서 악수하며 덕담을 주고받던 두 정상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서로의 땅을 오가며 순식간에 경계를 허무는 장면은 적어도 우리 민족에게는 인류가 최초로 달나라에 발을 디디던 그 순간보다 훨씬 극적이고 역사적이었습니다.
그날 수많은 명장면들이 나왔지만 가장 평가할만한 대목은 두 정상이 푸른색 도보다리로 건너가 30여분간 단독회담을 한 장면입니다. 남과 북의 지도자가 아외에서 단둘이 마주앉아 담소를 나누는 장면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흥분됐습니다. 통역이 필요없는 두 나라의 지도자가 때로는 웃음을 터뜨리고, 때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화던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누천년을 함께 살아온 형제요, 혈육이라는 것을 지구촌에 생생하게 보여준 위대한 순간이었습니다.
상상은 현실을 뛰어넘습니다. 그런데 이번 정상회담은 현실이 상상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슴뛰는 장면들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남북정상회담 MPC 캡처>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창현의 뉴욕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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