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나 칼럼] 서 로벨또 신부의 기도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하늘밭교회)
주여, 나날이 내 자신을 잊으면서 살도록 하여 주소서, 당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에도 나의 기도는 "타인"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주여, 내가 모든 일에서 진지하고 진실 되게 행하게 하여 주시고, 당신을 위해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들이 모두. 타인 을 향한 것이 되도록 나를 도와주소서.
내 몸이 박해받아 죽고, 또 땅에 깊이 묻혀, 그래서 모든 것이 허사가 되더라도, 나의 수고는 "타인"을 위한 삶이 아니라면 다시 살아나지 않도록 하여 주소서.
그리고 지상에서 내 일이 끝나고 천상에서 나의 새로운 일이 맡겨졌을 때. 타인 을 향한 생각으로 내가 받은 왕관을 잊도록 하여 주소서.
주여, 타인 , 예, "타인"입니다. 이것이 내 삶의 신조가 되게 하여 주소서,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당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되도록 하여 주소서.
서 로벨또 신부님의 기도입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에 들어와 소록도성당, 전남 일로성당, 목포 연동성당, 부산 금정성당을 맡았고, 농촌사목과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애쓰다 2000년 7월 29일 65세로 소천 했습니다.
그분의 기도의 목표는 주님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대로 타인을 위해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눈에는 무척 존경스런 일로 비쳐지지만 사실 타인을 위해 사는 삶은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14:8)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당위성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묘사한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주님께 속한 삶이었고, 그 삶은 곧 타인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서도 우리의 믿음이 복음에서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서 로벨또 신부님은 그런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줌은 물론, 본이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예수 부활을 믿는다고 입술로 많이 고백하고 있어도, 예수의 부활이 나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냥 형식적인 고백은 예수의 부활을 내 머리로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 삶과는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신앙의 삶의 이유를 부활에서 찾았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속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에게 부활이 실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이도 있었고, 그것을 전해들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부활을 실재로 받아들이고 부활의 삶을 살았습니다. 로벨또 신부님은 그 부활의 삶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고백보다는 예수가 우리 안에 부활하여 살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좀 더 중요한 것 같다. 이처럼 부활한 예수가 우리와 함께 사는 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가 있겠지만, 한 가지 설명은 우리가 예수의 비전을 함께 나누는 것이고 그 비전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그분은 부활의 삶을 너무도 실감나게 설명해줍니다. 그분은 부활의 삶이 예수의 비전을 함께 나누며 그 비전대로 사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삶을 다음과 같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습니다.
"특히 공관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의 비전을 주고 있다. 루가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는 예수의 비전을 선포하는 것 같다. "교만한 사람들과 그들의 개인 계획들을 함께 부수시고, 높은 사람들을 옥좌에서 넘어뜨리시고 낮은 사람들을 높이셨다. 배고픈 사람을 배불리 먹이시고 부자는 배고프게 하셨다"는 노래이다. 이 부분만 생각해도 예수는 평등한 사회의 비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계급이나 상하 차이를 비판하여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예수는 당신의 비전을 실제화 하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었다. "
로벨또 신부님은 아주 완곡한 어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전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바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로벨또 신부님이 소개하고 있는 '마그니피캇'이라고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는 하나님 나라의 서곡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 나라를 잘 보여주는 노래이며 기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저는 오래도록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설교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 설교를 듣고 예수를 따르겠다고 결심을 한다 하더라도, 예수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로벨또 신부님의 말처럼 예수의 비전을 공유하고 그 비전대로 따라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비전을 공유하고, 예수님의 비전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평등한 평화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평등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늘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꿈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큰 자가 아니라 작은 자들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가난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관문을 통과하고,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이기심이라는 자아와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지고 작아져 기꺼이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작은 자가 되었기에 죄인과 세리와 같이 사회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분들에게 다가가 섬김으로써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고,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일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 교회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강남에 큰 아파트에 사는 것이 꿈인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대학 나오고, 고시패스하고, 사회에서 성공해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주장합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그렇게 듣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검사, 판사, 의사, 교수, 고위 공직자, 재벌들이 사회를 정의롭게 변화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분들은 안타깝지만 돈과 권력에 도취되어 세상 연락을 즐기며 사느라, 다른 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가난한 자들이 얼마나 힘든지, 경쟁에서 진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이 얼마나 외로운지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노숙자들 근처엔 가지도 않습니다. 범죄자들은 물론 경제적 약자들을 동정하기는커녕, 노력의 부족과 도덕적 해이를 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란 불합리한 어불성설일 뿐입니다.
로벨또 신부님이 완곡한 어법을 사용했다고 말하는 이유도 이런 한국 교회의 상황 때문입니다. 복음은 분명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은 언제나 약자들의 신음소리에 반응하는 분이신데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난이라는 말만 나와도, 약자라는 말만 나와도 진저리를 치며 '종북'이니 '좌빨'이니 '빨갱이'니 해가면서 얼굴이 붉어집니다.
심지어 누가복음의 거지 나사로가 복음을 몰라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았다며 정말 불쌍한 존재라고 설교하는 목사까지 있습니다. 그런 목사에게 환호하며, 떠나가라 아멘을 외쳐대는 이들이 하는 일이란 공감과 긍휼이 아니라 차별과 멸시입니다. 그러면서도 방언까지 받았다며,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백성들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이 대한민국 백성인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닌 것 역시 분명합니다.
신부님은 이런 한국교회의 상황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의 정신과 삶에 자신의 온 삶을 걸고, 그 예수에게 뿌리를 내린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고 내어주는 삶에 그 의의를 두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깊은 사랑에, 그리고 넘쳐흐르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여 내어 주는 삶, 더불어 사는 삶, 곧 가난한 삶을 선택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는 분명히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가 지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라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러한 예수의 말을 믿고 고백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 교회는 이 세상 안에서 살아계시는 예수를 따르고 있을까요? "
한 마디, 한 마디를 음미해 보십시오. 정말 정금보다 귀한 말들입니다. 신부님의 말에는 복음이 제대로 스며들어 있습니다. 신부님은 과격하지 않은 어조로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면서 스스로 느끼고 결정할 수 있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신부님은 얼마나 많은 손가락질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갑니다. 외면을 당했을 것입니다. 기대가 무너지고, 실망하고 또 실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들이 신부님을 온유하게 만들었고, 신부님은 이렇게 조근조근 핵심을 짚어가며 말할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비전을 함께 나누며 그 비전대로 사는 부활의 삶은 먼저 본인 스스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면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범위를 넓혀가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런 삶을 살아가며 모든 것을 압축하여 '타인'이라는 한 단어에 예수의 비전인 하나님 나라를 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그것이 아무리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타인을 위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지닌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했다는 것은, 이후로는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겠다는 각오와 결단이며, 주님만을 위한 삶은 결과적으로 타인을 위한 삶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현란하게 자기를 위장할 줄 아는 우리의 자아를 극복하는 길은 단순하게 '타인'을 위한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의 신조가 될 때, 우리는 온 우주를 위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사람들과 온 피조세계를 살리는 촉매제와 도화선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구원은 곧 주님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며, 주님 위한 삶은 곧 타인을 위한 삶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과 하는 모든 일이 타인을 위한 것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샬롬을 경험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새 노래로 감사 찬양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