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의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66-67
테헤란 나이트(Teheran night)
Newsroh=강명구 칼럼니스트
이제 길 떠나온 지도 6개월이 지났다. 이때쯤이면 고향과 가족, 친구들을 향한 지독한 향수(鄕愁)가 묵은지처럼 곰삭아간다. 카스피 해의 파도는 이렇게 미칠 듯이 밀려오는 그리움에 비하면 참 점잖고 온순한 편이다. 그렇게 시리도록 가슴을 파고드는 그리움도 매순간 변화하는 눈의 즐거움과 매일 만나는 새로운 인연으로 위안을 얻는다.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거대한 장벽이 아니다. 우리 앞에 놓인 높은 산이 아니라, 신발 속의 작은 모래알이 발걸음을 중단시킨다. 나는 달리면서 수도 없이 산발을 털어낸다. 지원차량의 엔진 오일이 자꾸 샌다. 정비소에 들어가서 고치려고 물어보니 이 차는 테헤란에 가서야 고칠 수 있다고 한다. 테헤란에도 폭스바겐 서비스센터는 세군데 밖에 없다고 한다. 이란은 목요일 금요일이 공휴일이다. 오늘이 수요일이니 오후 늦게나 테헤란에 도착하면 목금 쉬고 토요일 하루 작업을 한다고 쳐도 일요일이나 차를 찾을 수 있다. 이제 할 수 없다. 투르크메니스탄 비자도 간 길에 해결해야한다.
마음의 여유를 찾아 떠나온 길이지만 마음은 언제나 조급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어쩔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격언(格言)에 순종한다. 하늘이 내게 준 휴가라고 받아들이고 푹 쉬어야겠다. 지난번 테헤란에 왔을 때는 내 친구가 이란에 근무할 때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던 여자를 만나서 저녁이나 같이 하라고 했는데 연락을 못하고 와서 그녀로부터 다음에 올 때는 꼭 연락을 하라는 아쉬운 전화를 받은 참이었다.
그녀와 만난 곳은 테헤란에서 비교적 좋은 분위기의 이태리 식당이었다. 마단나는 여동생과 같이 나왔다. 처음 만나는 사이지만 그녀는 식당 문을 들어서자마자, 눈동자가 마주치는 순간부터 나를 알아보고 내게로 다가왔다. 아마도 내 옷차림과 한국인의 생김새를 보고 대번에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녀는 오래 전에 내 친구 영국이와 근무하면서 한국인에 대해서 좋은 감정이 생겨서 테헤란에 오는 한국 손님에게 식사대접이라도 하고 싶었다고 했다. 페르시아의 두 공주님과의 시간은 꿈결처럼 흘어가고 있었다.
낯선 여인과의 만남은 호기심과 어색함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마치 전생에 내가 신라의 왕자로 페르시아의 여인과 인연이 있었던 듯 어색함은 간데없이 금방 나의 평화마라톤이야기며 이란에서의 느낀 점과 궁금한 일들과 그녀들이 한국에 대하여 궁금한 일들 등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녀는 내일 자기 조카 니샤의 9살 생일인데 혹시 내일 테헤란에 있으면 집에 와서 같이 저녁을 하며 파티를 즐기자고 하였다.
길 떠나온 지 6개월 만에 처음으로 현지인들의 파티에 초대받아서 갔다. 파티는 그들의 삶의 일부를 엿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이다. 저녁은 9시가 넘어야 먹지만 그 전에 오면 스낵하고 음료수는 있으니 6시 반쯤 오면 좋겠다고 해서 시간을 맞추어 갔다. 무엇보다도 술이 있다는 말에 귀가 갑자기 커졌다. 술을 어떻게 구하냐고 했더니 그런 건 걱정 말고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 알려주면 보드카, 위스키, 맥주, 와인 다 준비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지금 몸이 많이 지쳐있어 독주는 못 마시고 와인이면 좋겠다고 했다.
6시 반은 저녁식사로 이들에게는 무척 이른 시간이었다. 일찍 도착한 아파트는 평수가 상당히 넓었다. 테헤란에는 북쪽의 토찰산 자락이 서울의 강남에 해당된다고 한다. 남쪽으로 갈수록 생활수준이 떨어진다. 9시가 다 되어서야 사람들이 부부동반해서 왔고 놀랍게도 몇 명의 여자들이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마단나 남편에게 이란에서 저렇게 입고 다녀도 되냐고 귓속말로 물어보니 거리에서는 종교경찰이 단속을 하고, 저렇게 입고 차를 타고 이동하여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간다고 한다. 사람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은 인력으로 아무리 막아도 겨울 얼음장 밑에서 싹트는 생명과 같은 것이다.
술잔이 돌아갔고, 음악이 흘러나왔고 여자들의 몸이 음악에 맞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쪽 한 구석에서 후카 또는 시샤라 불리는 물담배의 연기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우리나라 사람들 술잔을 돌리듯 담배파이프를 돌아가면서 빨며 물에 타르가 걸러진 하얀 연기를 뿜어낸다. 여자들도 예외 없이 돌아가면서 하얀 연기를 빨아서 뿜어낸다. 나도 이들과 하나나 되는 의식으로 담배를 끊은 지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연기를 빨아드리다가 재채기를 하는 사고를 치렀다.
담배 연기가 가슴을 파고들고 와인이 핏줄을 타고 빠른 속도로 몸으로 퍼져나갈 때 ‘강남스타일’이 흘러나왔고 우린 다함께 두 손을 손목에서 교차하며 무릎은 약간 구부리고 엉덩이를 흔드는 신나는 춤을 추면서 하나가 되었다. 그 중간 창건이가 한국노래를 두 곡을 불렀고 나는 ‘Love me tender’를 부르다 가사를 잊어버려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그리 멀 것 같았던 테헤란이 이웃처럼 가까이 느껴지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처음엔 10시쯤에는 작별인사를 하고 미리 나오려고 갔는데 10시나 되어서 저녁이 나오고 저녁식사가 끝나자 생일케이크 자르는 순서가 있었다. 시간은 11시가 넘었고 내가 마시던 와인 병은 비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한창 흥겨워할 때 우리는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헤란 밤하늘에 휘영청 떠있는 보름달이 낯설지 않다. 테헤란에는 ‘서울의 거리가 있고 서울에는 ’테헤란로‘가 있다. 1973년 팔라비왕의 한국 공식방문을 기념해 강남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테헤란로라고 명명했다. 테헤란의 서울로는 3km에 이르는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중요 도로이다. 유라시아대륙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평화마라톤이 몸은 고되기는 해도 이렇게 중간중간 우정과 사랑이 싹트기도 하고 평화의 담론을 펼치기도 하며 거리의 간격을 마음으로 좁히는 보람으로 거친 그리움을 잠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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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의 물결을 타는 봄의 활력
이란 여학생들과의 유채꽃 추억
달리기는 이 자연과 가장 에로틱한 만남의 순간이다. 자연이 가장 에로틱할 때는 역시 봄이다. 봄에 모든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짝짓기를 하기 위해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을 치장한다. 나도 이 봄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되기 위해 혼신(渾身)의 힘을 다해 대지 위를 달린다. 온몸의 신경이 다 일어나서 사랑하는 자연을 깊고 아련하게 느낀다. 달리며 심장의 박동 소리가 빨라지면 내 삶은 온통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 네카를 지나니 이제는 그 거대한 엘부르즈 산맥의 기세도 다하고 낮은 산 가득히 유채꽃 향연이 펼쳐졌다.
생동하는 봄의 대지에 노랑의 물결이 일렁이니 가슴에 감동이 피어난다. 감동은 스위치가 되어 심장을 요동치게 하고, 요동치는 심장은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서 흐르는 활력의 원천을 찾아 철철 뿜어 올리는 모터가 된다. 활력의 생수는 몸과 영혼을 깨끗하게 정화시키고 영양을 공급하는 젖줄 역할을 한다.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끌어 올려진 활력의 생수는 육신과 영혼을 넘나들며 의욕으로 자신감으로, 독특한 창의력으로 열매를 맺는다.
노랑의 물결을 타고 전해져오는 봄의 활력을 즐기며 달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차를 가까이 대고 뭐 도울 것 없냐고 능숙한 영어로 묻는다. 베흐샤흐르라는 작은 도시의 초입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특별한 도움을 필요하지 않지만 지금 점심시간이 되었으니 식당이 이 근처에 있는지 물었다. 그는 자기를 따라 5분만 가면 좋은 식당이 있느니 따라오라고 했다. 처음엔 망설였지만 나는 금방 상대가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식당은 일종의 유원지 비슷한 곳에 있었다. 언덕 위에서 저 아래 노랑의 유채꽃 밭이 끝없이 펼쳐져있고 그 뒤로 카스피 해가 아련히 보인다. 곳곳에 정자모양의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 유채꽃처럼 피어나는 여고생들이 봄소풍을 나왔다.
여고생들은 우리의 교복 같은 옷을 입었는데 다른 것은 교복과 같은 색의 히잡을 썼다는 것뿐이었다. 처음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멀리서 힐끗힐끗 쳐다볼 뿐 막상 다가오지 못했고 우리도 이슬람 율법이 준엄하다고 알고 있어서 선뜻 다가가지 못했는데 우리가 선생님하고 같이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자 한 학생이 슬며시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붙이는 척하면서 다가왔다. 우리를 안내한 알리씨는 이 학교의 영어선생님이라고 한다. 영어는 정규과목에 없어서 방과후 과목으로 교육을 하는데 학생들 열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일단 물리적인 거리를 좁힌 여학생은 당돌하기까지 하였다. 주몽과 대장금을 묻더니 김수현, 이민호까지 물을 즈음에는 내 주위에 여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내 주위에는 여학생들 특유의 생기발랄한 짹짹거리는 기분 좋은 소음(騷音)이 가득했고 엑소와 비티에스에 대해서 물었다. “창건아! 비티에스는 뭐니?” “방탄소년단이요.” 그 중의 한 학생이 내 나이를 물었다. “I’m 16” 금방 박수가 터지고 난리가 났다. “I wish I were a 16, but I’m 60” 정말 내가 오늘처럼 16살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가?
내 열여섯 유채꽃보다 더 노란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 노란 꿈이 세파에 시달리며 피어나지 못하다 60에 다시 평화의 노랑꽃으로 피어나 유라시아대륙을 달린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카스피 해 연안의 작은 도시에서 유채꽃보다 더 노란 젊음에 둘러싸여 그들이 살아갈 노랑의 평화를 가슴에 품는다.
아직도 피어나지 않은 석류나무 과수원과 유채꽃이 바라다 보이는 식탁에서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알리 선생님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다시 한 여학생이 다가온다. 내게 자기가 말하는 것을 따라하라고 한다. 이란 말이었다. “세상은 아름다워요!”라는 말이라고 알리 선생님이 번역해준다. 나는 다시 해보라고 하여 입모양을 그대로 보며 따라 했다. 성공적이었나 보다. 뒤따라오던 여학생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한다. 그러더니 다른 여학생이 또 한 문장을 던져준다. “우리 부모님 건강하세요!” 내가 또 잘 해냈나보다. 이번엔 박수와 환호가 더 커졌다.
그러자 재미를 붙였는지 또 한 학생이 문장을 던져준다. 나는 “창건아 이거 그림이 될 거 같으니 비디오로 담아.”하며 그 여학생이 던져준 문장을 따라했다. 그렇게 한참을 따라하다가 “그러면 여러분들도 내 말을 따라 해보세요!” “One world, One Korea!” 학생들과 나는 입을 모아 봄 동산이 흔들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청춘의 한가운데로 들어와 잠시지만 나이를 잊게 해주는 시간은 유라시아대륙을 달리며 고통을 감내한 내게 유라시아가 주는 커다란 선물 같은 귀한 시간이었다. 학생들과 함께 봄동산에서 하나의 세상에서 평화롭게 사는 꿈을 공유하는 것은 귀한 선물이었다.
그런데 선물은 창건이가 받은 선물보따리가 더 커보였다. 나보다 더 크고 잘생기고 젊은 창건이 곁에는 더 많은 여학생들이 따라붙어 공책과 메모지를 펼치며 사인해달라고 몰려들었다. 나도 충분하게 귀한 시간을 즐겼는데 왜 이 순간에 비교를 하고 질투가 나는지 모르겠다. 창건이도 이 귀한 순간을 즐기느라 정신 줄을 놓았는지 아까 비디오를 찍는 것 같더니 버튼을 잘못 눌렀는지 나중에 보니 그 역사에 남을 귀중한 영상이 없다고 한다.
아무리 즐겁고 귀한 시간이라도 붙잡아 멜 수는 없다. 이제 오늘 나머지 일정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작별을 해야 했다. 그러나 작별도 쉬운 건 아니다. 다시 그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어 사인을 해달라고 하고 사진촬영을 하자고 하고 김수현, 이민호를 만나려면 어떤 방법이 있냐고 묻고 인스타그램이나 이멜주소 적어달라고 하느라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기분 좋은 감동의 여운을 안고 봄 대지 위를 뛰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한참을 그렇게 뛰고 있는데 알리 선생님 차가 멈추더니 오늘은 어디서 잘 거냐고 물어서 오늘 10km만 더 뛰면 일정이 마무리 되는데 아마 이 근처에서 호텔을 정해야할 것 같다고 말하니 자기 집에 방이 많으니 와서 자라고 해서 또 덥석 고맙다고 인사를 해버렸다.
강의가 6시에 끝난다고 해서 차 에어컨도 고치고 시간을 보내다 만나서 그의 집에 갔다. 그의 집에는 손님이 온다는 소리에 가족들이 다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 가족의 집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형님 가족, 여동생 가족이 같이 살았고, 옆집에 사는 작은 아버지와 조카가 왔다. 응접실은 넓었고 우리처럼 좌식문화이다. 신발은 벗고 양반자세로 둘러앉아 오렌지와 견과류에 차를 마셔가며 이것저것 질문공세가 펼쳐진다. 특히 여자조카는 고등학생인데 영어도 잘하고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고 싶어서 물어보는 게 많다.
그런데 나는 얼마가지 않아서 큰 문제에 봉착(逢着)한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저녁을 준다든가 준비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달리는 일이 워낙 체력소모가 많아 저녁 여섯시에는 저녁을 먹고 좀 쉬다가 아무리 늦어도 10시 이전에는 자야하는데 이란인들의 저녁식사는 10시쯤이라는 걸 나중에서나 생각이 났다. 이제 우리끼리 먹는다고 우리 음식을 할 수도 없었고 굶고 내일 일정을 소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례인지 알면서도 먼저 일어나 쉬어야겠다고 방에 들어갔지만 배에서 꼬로록 소리는 멈추질 않았다.
거의 10시쯤 막 잠이 들려는 순간 저녁이 준비됐다고 해서 나가보니 방바닥에 식탁보를 깔고 그 위에 음식을 늘어놓았다. 중산층 이상의 집이었는데 우리의 밥상 같은 것도 없었다. 음식은 검소했다. 토마토와 오이, 양파를 썰어서 만든 야채샐러드와 빵과 약간의 다진 고기에 양념을 한 것이 거의 전부였다. 식사를 마치고 또 먼저 일어나 방으로 들어왔는데 이 대가족은 거의 2시까지 이야기꽃을 피우다 잠자리에 드는 것 같았다.
참 귀하고 소중한 시간을 가졌지만 그 대가는 컸다. 내가 유라시아를 달리는 원동력은 남보다 출중한 체력이 아니라 몸의 균형을 잘 잡는 조절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때문에 몸의 균형이 무너지고 감기까지 들어 일주일 이상을 고생했다. 이 글도 일주일 만에 마무리하는 것 같다. 그동안 밀린 이야기가 천일야화(千一夜話)처럼 많은데 어떻게 들려주어야할지 걱정이다.
들판에 일렁이는 노랑의 물결을 바라보며 팽목항의 매서운 바닷바람에 날리던 노랑의 물결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여고생들과 웃고 떠들며 단원고 학생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슴에 안고 달리는 노랑리본이 있다. 3년 전 팽목항을 찾아 노랑 종이배로 띄워 보낸 나의 헌시(獻詩)가 하나 있다.
하얀 목련
이렇게 많은 꽃들이 피지도 못하고
슬픔의 바다에 잦아드는구나!
그 고운 꽃잎 위에 통곡과 애절한 이름을 하나하나 얹는다.
종이배에 노란 리본 매달아 띄워본다.
어른 된 자 쥐구멍이라도 찾고 있을 때
구차한 오만 원 권은 햇볕에 말려지는데
꽃망울들은 심연으로 가라앉는구나!
살아난 꽃들은 처연해 소복으로 갈아입는다.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이렇게 가슴을 쥐어뜯는구나!
때 아닌 국화가 놓인 자리에
햇볕 따스한 어느 봄날 목련으로 다시 피어나렴.
냄새나는 세상에 꽃향기로 머무르렴.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강명구의 마라톤문학’
http://newsroh.com/bbs/board.php?bo_table=g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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