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무라카미하루키씨가 한 수필집을 저술하며 창조해 낸 신조어입니다. 우리에겐 ‘상실의 시대’ ‘IQ84’등의 소설로 유명한 그는 2017년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진지한 사과를 주장하다가 매국노로 내 몰리는 사태를 경험하기도 했지요. 그의 정치적 신념이야 어떠하던지 소설가인 그의 직업과 국제적 명성에 걸맞게 이 소확행, 우리말로 하자면 작고 확실한 행복, 이라는 단어는 창조된지 삼십년이 넘게 지난 요즘에 들어서야 각종 방송, 출판 매체에 등장하며 나날이 그 유명세를 더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랍을 차곡차곡 가득히 채운 단정하게 접힌 하얀 속옷들이나 갓 구워 따끈한 식빵을 손으로 찍어먹는 느낌은 분명 작고 소소하지만 인생에서 무시할 수 없는 확실한 행복을 선사한다”
요즘 그 단어를 마음속에 담아놓고 간간히 들춰보아서 그런지 살아가며 겪는 작은 사건들 중엔 소소한 행복을 선사할만한 요소들이 꽤 많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물론 이 소확행의 때 늦은 유행이 가족, 건강, 재산으로 대표되던 전통적인 가치의 큰 행복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거나 이미 포기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 시야를 어쩔수 없이 작고 소소한 곳으로 돌리다보니 자연 발생한 대체 행복론이라고 규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전통 사회가 붕괴되고 일인가구가 늘어나면서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이 외로움과 단절을 겪고 있는 현대사회의 어두운 면을 적절한 방법으로 포장하려는 자기보상심리의 일종이라는 거지요.
뭐..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은 되지만 어쨋든 생각없이 지나치기 쉬운 시간의 조각들 속에서 행복을 건져낼 수 있다면 그리 부정적인 감상만은 아닐듯 합니다.
언젠가 달빛도 희미했던 금요일 밤. 터덜터덜 걸어서 재활용 쓰레기통을 끌어다 길 가에 세우고 돌아서니 언제 따라왔는지 저희 고양이가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앞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있었습니다.
아내와 제가 분명히 고양이의 탈을 쓴 강아지라 의심해마지 않는 그 녀석이지요. 명색이 고양이인데도 ‘기다려’와 ‘앉아’를 알아듣는다면 유전자구조의 돌연변이를 의심해 볼 수 밖에는 없을테니 말입니다. 항상 집 근처에서만 어슬렁거리며 놀다가 누구 하나라도 집을 나서면 꼭 ‘동구밖’까지 배웅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이다 보니 덜덜거리는 쓰레기통을 끌고 나선 제 뒷꼭지를 아니 따라붙고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 뻔합니다.
쭈쭈쭈 이름을 불러가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그게 또 좋은지 꼬리를 두어번 살랑대더군요. 짧지않은 드라이브 웨이를 둘이서 돌아오는 동안 고양이는 꼭 한 걸음만큼 뒤에 따라오면서 제가 뛰면 저도 뛰고 제가 서면 저도 서는 장난질로 잔잔한 즐거움과 웃음을 선사합니다.
집에 들어와 오랫만에 아이들과 TV를 봤습니다. 거실 바닥에 아예 담요를 깔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아빠와 두 아이는 서로의 배에 머리를 고이고 꼬무락대는 삼각형이 되어 TV삼매경인데 소파에 앉아 빨래를 개키던 엄마는 그 모습이 또 재미있는지 자꾸만 웃어댑니다.
다시 떠올려봐도 따뜻하고 행복한 그림입니다. 그야말로 소확행이 아닐까 싶네요. 반려동물의 재롱이나 가족과의 즐거운 시간이 삶을 생기있고 유쾌하게 하는 소확행임이 분명한 것처럼 누군가는 취미생활을 통해, 또 누군가는 친구들과 보내는 Healing의 시간 속에서 작고 확실한 행복을 느끼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렇게 짧고 행복한 순간들이 마음에 잔잔히 퍼지는 시간의 파문으로 남는 것은 평소 우리의 나날이 그리 행복하지 만은 않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한 주 내내 혹은 한 달을 통틀어 변함없는 행복과 즐거움 속에서 살아간다면 과연 이리도 달달하고 따스한 행복의 기억들을 가질 수 있을까.. 아무래도 대답은 ‘아니오’일 듯 하군요.
우리가 소확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웃음을 짓고 힘을 얻는 이유는 매일매일의 삶이 녹녹하지 않고 만만하지 않고 여유롭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작은 여유에도 한가롭고 작은 즐거움에도 웃음짓고 작은 우연에도 손뼉을 치게되는가 봅니다.
큰 행복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작은 행복을 모으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소한 일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큰 일이 성취된 상황에서도 결코 행복해질수 없다는 말로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소확행에 민감한 사람만이 큰 행복에 즐거워 할 수 있다는 이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의 학업성취과정을 적절히 묘사하는 한 문장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간혹 학생들은 자신의 노력을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삼당사락’ ‘땀 흘린 노력이 배신하는 경우는 없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등등의 격언을 많이 듣고 자라서인지 긴 시간동안 자리에 앉아 읽고 또 읽고 줄 그으면서 한 번 더 읽는 공부방법을 맹신하는 경우가 많지요.
잘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난 시간에 ‘한 시간만 더 버티면 Merit 가 Excellence로 바뀌겠지’라고 기대하며 졸린눈을 비비는 학생들도 있고 ‘여기에서 요기까지 다 외우면 최소한 80%는 받을거야’라며 책에 구멍을 뚫을 듯 파고드는 학 생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들이는 공부방법을 곰팡내 풀풀 나는 철 지난 구식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과정의 비효율성 때문에 아이들은 언제나 자신이 투자한 시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성취의 크기를 보고 실망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난 며칠간 밤을 새워가며 공부했는데 겨우 5% 올랐네..’ ‘모든 챕터를 열심히 공부해서 달달 외우다시피 했는데 하필이면 내가 공부하지 않은 딱 한 챕터에서 시험문제가 다 출제됐네..’라며 실망감에 공부의 의욕을 다 날려버리는 학생들은 사실 자신의 노력이 헛되이 사그라진 이유가 ‘고비용 저이익’스타일의 공부방법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비효율성의 이유가 노력을 쏟아부어야 할 대상을 지나치게 크게 잡았기 때문이라는 사실 또한 알지 못합니다. 작은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 큰 행복에도 둔감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작은 개념의 단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전체의 개념을 파악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노력을 집중해야 할 대상이 한 과목, 한 챕터가 아니라 한 주제, 한 공식으로 세분화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개별적인 그 작은 내용들에서 하나 하나 확실한 성공을 이루어내야 그 작은 ‘소확성’들이 모여 그토록 바라던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공부의 비법을 따라하지 못합니다.
각급학교의 연례 중간고사가 막 끝이 났습니다. 학교에 따라 지금도 진행 중일수도 있겠네요.
공부를 하며, 시험을 준비하며, 이제 몇 달 앞으로 다가 온 학년말 시험을 고민하며 우리의 아이들이 방법적인 문제에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습은 폭 넓게 상하좌우의 연계를 고려하며 진행해야 하지만 점수와 연결되는 시험준비를 할 때 만큼은 작은 보폭으로 한 걸음씩 하나 하나의 ‘소확성’을 거둬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녹녹하지 않고 만만하지 않고 여유롭지 않은 공부의 시간들이겠지만 작게 잘린 성공들이 하나 둘 모여 어느덧 동산을 이루는 큰 성공의 가도를 달려갈 수 있기를 기원 합니다.
칼럼니스트 김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