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의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68-69)
Newsroh=강명구 칼럼니스트
고르간은 엘부르즈 산맥 북동쪽 기슭에 고르간 평야를 끼고 있다. 그러나 이 평야는 곧 황량한 사막(沙漠)으로 바뀐다. 구름 한 점 없는 사막의 지평선 끝은 황사먼지로 뿌옇게 지워져 있었다. 생명이라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이 땅 위에도 자세히 내려다보면 무수히 많은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다. 개미도 있고 작은 갑을 쓴 생명체들이 무수히 많이 보인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조그만 구멍들이 보이고 그 구멍으로 도마뱀들이 분주히 드나든다. 그리고 간혹 양떼들과 말들도 보인다. 까마귀와 이름 모를 새들, 그리고 그 너머로 사람이 사는 가옥이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나그네에게 초현실적인 모습도 이곳에 사는 사람들과 생명들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어떤 이유로 이곳에 뿌리를 내기기 시작한 생명이건 이곳에 뿌리를 내린 한 치열하게 살아간다. 오늘 33도 까지 오를 사막을 달리는 나의 모습도 잠시 명상 속에 유체이탈하여 바라보니 치열하기 짝이 없다. 이란과 투르크메니스탄 국경마을인 인체보론을 향해 달린다.
오늘 유난히 국경을 향해 가는 차가 많다. 한국의 추석이나 설날처럼 차량행렬이 줄을 섰는데 반대로 가는 차는 별로 없다. 이렇게 많은 차량이 국경을 넘으면 입출국 수속에 시간이 많아 걸릴 것을 염려하면서 국경에 도착하니 거기에 큰 바자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란과 투르크메니스탄의 국경무역을 하는 곳인가보다. 그러니까 투르크메니스탄 상인들이 이란에 물건을 가지고 와서 이란 사람들이 장을 보러오는 그런 장이었다. 장 근처에 텐트나 돗자리를 펴고 가족끼리 식사하는 시골장터의 모습이 사막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제는 국경을 넘는 차는 거의 안 보이는 것이 오히려 불안해졌다. 간혹 우리나라 60년대 승합차 같은 버스가 국경을 넘고 있었다. 국경을 넘어서려 앞으로 다가서니 차를 세우고 서류를 보자고 한다. 비자와 차량서류를 보더니 이곳에는 차량을 통과시키는 시스템이 안 돼 있으니 바그란으로 국경을 넘으라고 한다. 바그란은 이곳에서 460km나 떨어진 곳이다. 큰 사단(事斷)이 벌어졌다. 빨리 달려야 저녁 10시 가까이 가야 그곳에 도착하고 그 시간에 국경을 통과시켜준다는 보장도 없다.
더 큰 문제는 인체보론 국경을 넘어서 그곳에서 우즈베키스탄 국경까지 거리가 1200km가까이 되는데 30일 비자로 하루도 안 쉬고 아무 일 없을 때나 가능한데 오늘 그냥 허비하고 내일 다시 그곳까지 이동하느라 허비하면 도저히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면 한발자국도 빼먹지 않고 유라시아대륙을 내 발자국으로 고스란히 잇겠다는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는 없다.
이제 방법은 비그란 국경에서 넘어서 그곳에서 우즈베키스탄 국경까지 달려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마저도 안 되게 되었다. 그 국경에서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인 아슈하바트까지는 군사지역이라 가다가 중간에 내리지도 말고 사진도 찍지 말라는 경고를 엄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차량에 위치추적 장치까지 달아서 내가 어디로 이동하는지 국경을 넘을 때까지 감시해야겠단다.
어쩔 수 없이 460km를 잘라먹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미리 말해두자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정당성을 찾아냈다. 원래의 코스에서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으로 돌아오느라 500내지 600km를 더 달렸고 이란의 서쪽국경을 통과해서 동쪽 국경까지는 갔으니 거리로나 내용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인데 마음의 위로라도 필요했다. 꼭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마음이 찜찜해서 더욱 그랬다.
좌절감은 안고 국경검문소를 다시 나와 남쪽으로 조금 달리다 풀을 뜯는 낙타들의 모습을 보니 반가웠다. 낙타들은 얼마 전까지 이 유라시아대륙을 이어주던 급행열차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낙타는 사막에서 생존력이 강한 동물이다. 낙타 등에 달린 불편할 것 같은 혹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고비사막을 중심으로 몽골이나 중국의 타글라마칸 사막에 있던 쌍봉낙타가 수송용 가축이었다면 아라비아 사막의 단봉낙타는 다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낙타가 단봉낙타이다. 젖은 사람이 먹었고 걸음이 빨라서 전투용으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창건이가 사온 낙타 젖의 맛은 시큼떨떨했다.
오아시스를 연결하여 실크로드를 다니는 상인을 페르시아어로 카루반이라고 하는데 카라반은 여기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낙타 한 마리가 실을 수 있는 짐은 270kg이고 하루 이동 거리는 45km 정도라고 한다. 그 옛날 세상이 평화로웠던 시기에는 1000~5000마리의 낙타를 이용한 대규모 캐러밴도 있었다니 당시에 실크로드 무역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낙타는 아무리 봐도 눈이 잘 생겼다. 성격은 유순하면서도 퉁명스럽고 신경질적이다. 짜증난 녀석은 되새김질한 오물을 귀찮게 구는 사람 얼굴에 뱉기도 한다고 한다. 나는 차에서 내려 사진 촬영을 위해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이 말을 되새김질 했다.
저녁 늦게 국경을 넘는 일은 포기하였다. 여러모로 현명한 생각 같지 않아서 국경에 들어서기 전 시르반에서 자고 아침 일찍 국경을 향했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 이란 쪽 수속이 다 끝나고 투르크메니스탄 수속이 마칠 무렵에는 어느덧 해가 기울기 시작할 때였으니 결과적으로 어제 시르반에서 자고 온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버스를 타고 와서 걸어서 국경을 넘는 사람들은 좀 있어도 하루 종일 차로 국경을 넘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었다. 짐은 샅샅이 뒤집어 업어졌다. 그리고도 잘 훈련된 테리어 두 마리가 차에 올라타 이곳저곳을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녔다.
유로 존 지역을 제외하고는 국경을 넘을 때마다 애를 먹는다. 지도를 펴면 보이는 국경선은 인류 역사상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국경선의 역사는 기껏해야 300년 밖에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국경선은 불과 반세기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유라시아를 달리면서 국경선의 벽을 머리에서 지우면 무언가 확연하게 달리보이는 것들이 있을 것 같다. 나는 그 달라진 세상을 꿈꾼다.
국경을 넘어 군사작전 지역을 넘어서니 바로 수도인 아슈하바트이다. 멀리서 하얗게 바라보이는 도시는 이국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낯설다. 사막에 핀 눈꽃처럼 차갑다. 점심을 굶었으므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식당이었다. 하얀 도시는 깨끗하다 못해 창백하였다. 잘 포장된 넓은 도로에는 차 몇 대 다니지 않았다. 거리에 다니는 사람도 그리 많이 눈에 띄지 않은 유령의 도시 같았다. 모두 하얀색으로 높이 솟은 건물은 네온사인이라든가 간판도 보이지 않고 상점도 그리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거리에 휴지조각 하나 담배꽁초 하나 심지어 먼지도 하나 없는 것 같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싱가포르가 세상에서 제일 깨끗한 나라인줄 알았는데 투르크메니스탄에 비하면 상대도 안 된다. 이렇게 결벽증(潔癖症)에 걸린 도시가 사람을 답답하게 만든다. 수도 ‘아슈하바트’는 사랑의 도시이다. ‘아슈하’는 사랑을 의미하고 ‘바트’는 도시를 뜻한다. 그곳에 깨끗한 걸 유난히 좋아하는 지도자가 사랑마저도 청소시킨 것이 아닐까 절망감에 빠져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 곳곳에 휴지조각만도 못한 경찰들이 널브러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경찰이 그 다음날 하루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는데 호텔로 들이닥쳤다. 정보과 형사반장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힘 좀 쓸 줄 알 것 같은 형사 두 명과 영어통역을 맡은 여자 하나를 동반하고 들이닥쳤다. 이들은 이미 우리가 어제 이동한 동선을 훤히 꿰차고 있었다. 식사하고 호텔을 찾으러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 것뿐이었지만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이 나그네의 기분을 확 뒤집어놓았다. 이들은 다짜고짜 당장 짐을 싸서 아슈하바트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아슈하바트에 들어오지 말라는 명령도 있었다. 이유는 수도의 치안을 위해서라고 한다.
나는 지금 너무 피곤한 상태라 움직일 수 없고 대신 내일 아침 7시에 여기에서 나가겠다고 통사정을 해서 해결이 되었다. 그리고 통역을 하던 여자가 소개해준 아시아 식당을 찾았다. 거기에서 김안젤리나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한국말은 몇마디 못하지만 한국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고려인을 만났다. 한국인이라고 말해준 것이 왜 그리도 고맙던지 스카프를 한 장 선물했더니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 자랑을 하고 있었다.
‘평화’라는 단어는 어떤 집단에게는 위험한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사람의 평화를 위해서 만인의 평화를 담보로 저당 잡은 사회 말이다. 차량 앞뒤로 대문짝만하게 써 붙인 ‘Peace Marathon’이란 글자가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거기다 내가 누구란 말인가? 2016년 겨울 작은 촛불로 시작된 것이 한반도 남쪽을 뜨겁게 불태워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독재자와 적폐세력을 용광로 속의 불순물처럼 제거해버렸던 그 유명한 ‘촛불혁명’의 나라 한국에서 온 평화 운동가이다. 정보당국은 내가 ‘사드 반대 마라톤’ ‘핵발전소 반대 마라톤’을 한 이력을 파악했을 것이다. 이들은 필시 촛불의 바이러스가 번질까봐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 것 같다.
거물은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투르크메니스탄에 와서 거물로 대접을 잘 받았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강명구의 마라톤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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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크 초원의 빛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 그 시간이 되돌아오지 않더라도/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빛을 찾으리.”
초원은 말 그대로 풀밭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목가적인 풍광과 양떼들과 목동, 그리고 낙타들의 행렬, 뭉게구름 떠가는 푸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연상되는 곳이다. 그러나 초원의 삶이 그렇게 녹녹하기만 하겠는가? 사실 어떤 삶인들 그렇게 아름답고 평온하기만 하겠나! 초원은 온대 지방의 반 건조기후로 산림지대와 사막지대 사이에 나타난다. 이 드넓은 초원은 중국의 동북지방의 대흥안령 산맥에서 시작해 몽골 초원과 카자흐 초원을 지나서 동유럽의 헝가리까지 푸른 띠를 이룬다.
다 말라죽은 듯 황폐한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생령(生靈)들이 봄을 맞아 물이 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이렇게 여름이 오면 초원은 충만하고 가축들은 살이 찌고 하늘은 푸르고 아름답다. 들판은 온갖 생명이 환희에 넘쳐난다. 목동은 말을 타고 푸른 초원을 달리며 가축을 돌보면 하늘과 땅, 천지의 온 생령 그리고 자신이 하나가 된 것 같은 일체감을 느낀다. 그러다 기나긴 겨울의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세상은 순식간에 척박해진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대자연의 원리이다. 이제 모든 생령들은 봄이 올 때까지 참고 인내하고 생명을 유지해야한다.
20세기 초 이 땅을 점령한 러시아 정권은 이 땅에 살던 호전적인 유목민들을 도시에 정착시키려 무척 고생을 했다. 아슈하바트는 1948년 대지진으로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곳이기도 하다. 나는 이란에서 모든 SNS 활동이 금지되어 빨리 이란을 벗어나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에 오는 순간 이란은 양반이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더구나 차량에 부착된 위성위치추적 장치는 나를 더욱 옥죄었다.
초원의 유목민은 억세고 강인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들다. 오늘도 한 아이가 아버지를 따라 낙타를 몰고 천진난만하게 걷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에게 가축은 친구이자 놀이기구이다. 이들은 여름에는 가족단위로 평원에 흩어져 가축을 먹이고 살다가 겨울이 오면 산의 남쪽 언덕과 계곡 사이에서 집단으로 모여 월동(越冬)을 한다. 가족단위의 부족을 이루며 어떻게 협동하며 살아가는지 어려서부터 배운다. 그래서 유목민은 집단의 귀속성과 개인의 생존능력과 의식이 그들의 문화와 삶 속에 같이 존재한다.
1990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 나라의 국토는 우리나라의 두 배나 되지만 90%가 사막이고 나머지 목화밭이 조금 있을 뿐이다. 하지만 황량한 사막 밑으로는 아무도 상상하지 모를 만큼의 석유가 매장(埋藏)되어있다고 한다. 소련연방 시절에는 송유관이 러시아로만 연결이 되어 러시아 석유회사가 쳐주는 가격을 그냥 고맙게 받아썼지만 중국이 자원외교를 펼치면서 가격을 올려놓았고 여기에 유럽으로 연결되는 송유관이 건설되면서 가격은 폭등하게 되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금방 돈방석에 올랐으며 미래의 경제대국을 꿈꾸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그 돈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고 산업시설이 발달하지 않은 이 나라는 일자리 창출을 위해 경찰과 군인인력을 늘렸고, 깔끔하신 분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거리 청소부가 필요 이상으로 많았다. 검정색 차도 우중충하다고 싫어하셔서 거리에 검정색 차도 잘 보이지 않는다. 아슈하바트의 가정집에 매달린 위성 안테나도 도시 미관에 안 좋다고 다 치우란 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국가적인 비전이나 인류애도 없는 사람의 독특한 미적 감각을 맞추느라 아슈하바트 시민들이 견뎌내야 하는 고통이 초원의 겨울보다 혹독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투르크메니스탄은 예로부터 사막에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오아시스를 연결하며 동서 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북으로는 낙양이나 장안에서 출발하여 안서에서 남도로 갈라진 후 구차를 지나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이곳에 이르렀다. 타쉬겐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마리, 니샤푸르를 지나 이란을 거쳐 이스탄불까지 이어져 로마에 이른다. 이곳은 실크로드의 교통의 요지이자 미래의 유라시아 공영권의 주요 길목이다. 유라시아 횡단열차가 질주를 할 이곳이 지금 심한 동맥경화에 걸려있다.
어제 찾아온 경찰들이 우리를 아슈하바트에서 나가서 자라고 한 아나우에는 호텔이 없었다. 100km나 이동하여 물어물어 찾은 민박집에 짐을 푸는 순간 주인의 얼굴이 사색(死色)이 되어서 우리가 지불한 돈을 다시 들고 나타나서 짐을 다시 싸서 나가라고 한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경찰이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경찰이 우리를 위치추적장치로 감시를 하다가 여기서 멈추니 전화를 해서 쫒아내는 것이다. 외국인은 오로지 호텔에서만 잘 수 있다고 하는데 아슈하바트에서 쫓겨난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300km나 떨어진 마리뿐이었다.
갑자기 앞이 노랗게 변했다. 하루 42km 이동하는 내가 300km나 떨어진 곳에 숙소를 정하고 왔다 갔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감시를 하는 그들이 노숙(露宿)을 하게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의 절망적이었다. 목동들에게 들이닥친 초원의 겨울보다 내게는 더 절망적이었다. 투르크메니스탄 구간은 포기하고 어서 우즈베키스탄으로 넘어가서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스스로 포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쫓아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하루만 더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250km를 되돌아가서 달리면 얼마 못 달리겠지만 하루 달리고, 다시 노숙을 해보고 하루 더 달려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250km를 되돌아가서 그날 25km를 달렸다. 그리고 비 내리는 길거리에 차를 세워놓고 차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아니나 다를까 경찰이 왔다 가는데 다행히 아무 말도 없이 확인만 하고 갔다. 그날 40km를 달리고 나니 이제 숙소까지 거리가 많이 줄어들었고 다시 완주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시 힘을 내어 다음날 일정을 35km로 마무리 하려는 참에 이민국에서 전화가 왔다. 이 나라는 3일 이상 체류를 하려면 등록을 하여야하는데 등록을 하지 않아서 비자가 문제가 있으니 당장 이민국으로 오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 정말 힘들게 하는구나! 차라리 추방시켜주면 고맙겠다.” 그리고 만약 혹시 이런 글들을 쓴 것이 문제가 되어 노트북을 압수당하고, 남영동 분실 같은데 가둬버리면 어떻게 하나 겁이 나서 우리나라 대사관에 연락을 했다. 적어도 누군가는 나의 위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민국은 시 외곽에 진짜 남영동 분실처럼 자리 잡고 있었고 군인들이 업무를 보고 있었지만 다행히 큰일은 없었다.
유목민들은 태생적으로 자급자족이 불가능하다. 그들은 오아시스의 마을과 공생을 하여야 한다. 마을은 물건과 사람과 정보, 문화의 교차점이다. 종종 유목민은 유동성과 집단성이 강해 활쏘기 말타기 기술이 결합되어 군대로 변신되었을 때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한다. 총과 화약이 등장하기 전, 근대 이전에는 유목민 집단은 가장 훌륭하고 강한 기동군단이었다.
유목민들은 자신들의 삶과 문화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 정주민들은 그들을 야만인들로 생각했고 버림받든 땅으로만 알려져 있던 중앙아시아가 이제는 학자들의 끈질긴 연구에 의해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단지 중국과 유럽을 연결해주는 실크로드의 가교로서의 길로만 인식되어서 평가 절하되었던 국가들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워진 환경에 순응하고 적응하며 극복하며 역사의 부침(浮沈)에 동참하고 인류 역사에 큰 족적(足跡)을 남기기도 했다는 공부는 내게 놀라운 발견이었다. 나그네는 이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에서 펼쳐진 격동의 세월을 다 이해하기가 어렸다.
한때 그렇게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젠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 찾을 길 없을지라도 우리 서러워 말지니
도리어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얻으소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강명구의 마라톤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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