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에 쨍한 햇살, 그리고 진녹색 잔디와 점점이 떠 있는 동그라한 하얀 구름들이 기가막힌 조화를 이루는 어느 완벽한 오후..
긴 역사를 자랑하는 페블비치 골프장엔 운동복 대신 말쑥한 정장을 빼 입은 신사 숙녀들이 삼삼오오 모여듭니다. 개 중엔 1900년대 초반의 의상을 복원해 입은 노부부들도 간간히 눈에 띄어 곧 시작될 행사의 의미를 돋보이게 하기도 합니다.
한 낮의 따가운 햇살이 살짝 누그러진 시간.. 나뭇잎들은 식어가는 공기가 만들어내는 눅진한 바람속으로 게으르게 살랑이고 텁텁한 수증기를 뿜어 올리던 잔디는 이제 스치는 발목에 상쾌한 간지럼을 남깁니다.
사회자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된 행사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귀족스러워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샴페인을 권한다 해도 큰 무례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신뿐 아니라 그 자리에 선 모두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살짝 그을린 눈 밑 광대뼈에 알코올이 만들어낸 홍조가 더 해질 무렵 모여든 인파의 한쪽 구석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기다리던 메인 행사가 시작된 것이죠. 사람들은 웅성대고 하얀 대리석 건물 뒤편에선 그르릉대는 맹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지만 동물의 소리는 분명히 아닐 것이 맥박치는 표호에 박자를 맞추듯 푸르고 매캐한 연기가 여름 날 초저녁의 모기향처럼 퍼져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건물 모퉁이를 돌아 등장하는 기다림의 대상. 짧게는 70년, 길게는 100년전의 시절을 마법처럼 오늘로 끌어다 붙이는 회귀의 매개, 클래식 자동차입니다. 군중은 갈채를 보내고 환호를 지르며 방금전까지 우아함으로 눌러왔던 자신들의 열정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눈 앞에 등장한 ‘공학적 조각품’의 우아함에 비하면 자신들의 그것은 어차피 한낮 흉내에도 미치지 못할 싸구려 콧대에 불과하니까요.
그렇습니다.
이 곳에선 지금 세계 3대 클래식카 콩쿨중의 하나인 ‘패 블비치 델레강스’가 열리고 있습니다. 출품된 백여대 자동차의 가격을 다 합치면 수천억원을 호가하고 모인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15,000명에 이른다는 대형 자동차 콩쿨입니다. 이곳에서 ‘올해의 차’로 선정된 자동차는 그 해 각종 자동차 관련잡지의 표지를 장식하게 되며 경매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게 되고 소유주의 자존심 또한 하늘에 닿게 됩니다.
일견 재산 좀 있는 사람들의 호화스러운 사치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그건 거액을 주고 클래식카를 사고파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오래되고 낡아 당장 부스러질 듯한 자동차가 어마어마한 몸 값을 자랑하는 클래식카로 재 탄생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한 명의 쓸모있는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클래식카는 말 그대로 오래된 차입니다.
그냥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세월이 지나고 지나 세상에 남은 같은 종류의 차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한 차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 긴 시간을 차고에 앉아 있었든, 아니면 으슥한 숲 속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든 상태가 말이 아니게 험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요. 바로 주저앉을 듯 녹이 슬어버린 차체는 그나마 양반이구요.. 실내의 가죽이나 스펀지는 메마르고 삭아서 손만 대도 와사삭 가루가 되기 십상입니다. 타이어는 그 재료가 고무라는 사실이 민망할 정도로 쭈그러지고 딱딱해져서 돌덩이에 진배 없고 엔진은 그야말로 고철덩어리, 움직이는 것은 고사하고 제 모양을 유지하고 있기만 해도 감사할 지경입니다. 한마디로 자동차라는 이름으로 생산되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본래 만들어진 목적과는 무관한 시간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방치되어 있던 오래된 자동차가 복원전문가를 만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복원가는 뭉그러져가는 고철덩어리의 가치를 한 눈에 간파합니다. 그리고는 운동의 꿈을 꿀 수 조차 없는 엔진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무너져가는 뼈대에 견고하고 굳건한 바탕을 세우며, 검갈색 녹으로 뒤덮인 차체에 눈이 부시도록 선명한 광택을 입힐 계획을 세웁니다.
길고 긴 세월동안 또 하나의 피부처럼 늘러 붙은 온갖 더러운 먼지들을 털어내다 못해 벅벅 갈아내고, 차디 차게 식어 재활의 소망이라곤 손톱 끝 만큼도 남아있지 않은 엔진을 분해해 그 바탕부터 다시 새로이 지어갑니다.
쥐들이 쏠 먹고 새들이 깃들이던 온갖 실내용품들을 뜯어내 폐기처분한 뒤, 가장 값지고 순수한 재료를 사용해 본디 제작되던 때의 모습으로 되살려 냅니다. 찌그러져서 아프고 녹슬어서 서러운 안타까운 차체를 부분부분 잘라내고 용접해 어떤 일이 생겨도 버텨나갈 수 있도록 든든하게 세워갑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철덩이는 차가되고, 쓰레기는 보물이 되고, 눈물 떨구던 뼈 아픈 시간들은 회복의 환희로 맞바꾸어 집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서 단 한 순간도 고철덩어리에 품은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복원전문가는 자신의 손 끝으로 피워 올린 회생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잔잔한 미소를 짓게 되지요.
U는 밀리고 밀려 이 곳에 왔습니다.
집단 따돌림의 가해자라는 죄명은 친구들끼리 어울리다 보니 잠시 불량한 생각을 했었다는 정도의 변명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리둥절하고도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쫓기듯 이 땅으로 피신해 들어온 U는 처음의 1년을 무언가 다시 시작해보려는 발버둥으로 보냈고 다음 1년은 공기를 저으며 허우적대는 발버둥이 지극히 무효하다는 사실을 직시하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즈음 그는 학생이라 불리우는 방관자가 되기로 맘 먹었습니다.
이년 뒤, 고등학교 과정의 마지막 시험을 세 달여 남겨놓은 어느 날, U는 어떠한 계기를 통해 그 동안 지리멸렬했던 공부에 열정을 품고 덤비기로 맘 먹습니다.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시간을 남겨놓고 무엇이라도 이루어야 한다는 절박한 희망을 품게 된 그는 무섭게 공부했습니다. 눈 밑의 다크서클이 진해져 가면서 그의 타고 난 총기는 예리함을 더해 갔고 그나마 깔끔하던 옷차림이 허름해져 가면서 그의 두뇌는 질서를 잡아갔습니다. 공부하다 기진해지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제게 전화를 했고 그럴 때마다 아직은 덜 익은 중년의 경험담을 찢어진 제 의지력에 치덕치덕 반창고처럼 붙이곤 했습니다.
U는 그렇게 하루를 48시간으로 살아냈고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선택을 한 후 이곳을 떠났습니다. 찰진 밥 한그릇 먹여 보내고 싶었지만 아귀가 뒤틀린 두 톱니바퀴처럼 엇갈린 서로의 시간은 도무지 맞춰지지 않았습니다. 떠나기 전 날, 마지막 통화를 했습니다. 낭비해버린 시간이 아깝다며 서운해 했습니다. 지금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절대로 망하지 않을거라며 격려했습니다.
저를 만나 감사하다 했습니다.
너는 나의 보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고드름 끝으로 바람이 시리던 어린시절의 겨울날. 정월 대보름이면 논 가장자리 둔덕에서 연을 날렸습니다. 그 해의 마지막 연을 날려 올리며 아쉬워하곤 했습니다. 파란기가 다 빠진 잿빛 하늘위로 점처럼 박힌 연이 건들거릴때 한 해 겨울을 같이 살아낸 연 줄을 끊어 날려보냈습니다.
너풀대며 뒤채는 모양이 안스럽기만 하던 그 몇 개의 방패연들은 지금 어느 만큼 높은 하늘에서 아직도 펄럭대고 있을까요.
U는 이제 이곳에 없습니다.
우리는 연줄을 끊어 서로를 날려 보냈고 제겐 아직 먹여 보내지 못한 찰진 밥 한 그릇이 남아있습니다. 오랜세월 방치되어 있던 U를 찾아내고, 가다듬고, 그 속에서 명맥만 유지하던 깜부기불에 바람을 불어넣었던 복원 전문가가 과연 누구일까 생각해 봅니다.
한 청년의 삶을 뒤집을 만한 용력은 없으니 당연히 저일 수는 없고.. 아마도 가족의 힘이거나 종교의 힘, 아니면 절친한 누군가의 권고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외부적 요인에 의해 그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든지 그는 회생되었고 혹독한 복원의 과정을 거치며 흘렸던 눈물만큼 성장했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속에 불을 피워낸 복원 전문가의 섬세한 손길을 거쳤으니 그는 아마도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제 값을 다하는 훌륭한 성인으로 자라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세상에 또 한 대의 클래식카가 더 해졌습니다.
칼럼니스트 김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