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에서 농업기반을 조성하고
한민족 시대를 꽃피우던 고려인들,
한민족의 문화와 언어를 말살 당한 채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니……
같은 한민족의 후손이면서‘고려인’으로 불리고 있는 그들은 누구인가? 흔히 ‘카레이스키’로 알려진 고려인은 구 소련 지역에 거주하던 한민족들이 스스로를 ‘꼬레사람’ 이라고 부르는 데서 기인하며 중국의 조선족과 비교해서 ‘고려인’이라고 호칭하는 과정에서 명칭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고구려, 발해시대 이후 두만강 건너 연해주 지방으로 1860년대부터 북방개척 이민이 시작되었다.
1869년 한반도에 큰 기근이 들자 급속히 이민 증가 현상이 나타났으나 추위와 굶주림에 아무 대책 없이 시달린 한인들의 참상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근면과 끈질긴 개척 정신으로 농사 기반을 조성하여 한인 사회를 안정화시켜나갔다. 그 후 1910년에 조국은 일본의 식민지화가 되고 러시아로의 한인 이민은 더욱 증가하였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파란은 커져 갔다. 그럼에도 한인사회는 일제에 항거한 항일 독립운동을 위한 무대로 자리매김 되면서 한때 20만 명을 넘어서며 연해주에서 한민족 시대를 다시 꽃피우는 듯 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다. 소비에트 연방 정권은 한인들의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으며 한인들을 자기들의 안보에 걸림돌이 되는 존재로 인식하고 이주 계획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한인들을 두만강 건너 국경지대에 밀집시킬 경우 일본과의 전쟁에서 불리해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소련 정부는 한인들을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으로부터 추방하려는 계획에는 적극적이었지만 새로이 이주할 구역에 한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하는 준비에는 소홀하였다. 그러면서도 소규모의 이주는 계속되는 듯 이어졌다.
1937년에는 한인 이민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고야 만다. 한인들은 가난한 상태에서 러시아로 넘어와 갖은 고생을 하면서 생업을 일구었고 근면하게 일했으나 일본의 스파이로 의심을 받게 되고 강제이주의 명령을 받고 떠나야만 하는 상황으로 몰리었다.
스탈린 정부는 1937년 10월과 11월 사이에 한인들을 전원 강제 이주시켰다. 눈에 덮인 시베리아 벌판을 한 달 이상 가축을 싣는 열차에 실려 가는 도중에 엄청난 고초를 겪었으며 어린이들이나 노약자들 대부분은 열차 내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화장실과 문이 없어 용변을 보려다 떨어져 죽은 사람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60% 이상의 고려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이들이 버려진 곳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반사막 지대로 겨울에 바람막이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헛간에서 여러 가족이 함께 첫 겨울을 보냈는데, 콩가루와 밀가루를 섞어 만든 된장과 초원의 이름 모를 나물로 끼니를 이어갔다. 부실한 음식과 혹한 때문에 나이든 노인이나 아이들이 설사병 등에 걸려 죽어나가는 참상이 이어졌다.
움막 생활을 하며 포로 수용소 같은 조건에서 일하였지만, 맨손으로 수로를 파고 한인 특유의 근면성과 개척정신을 발휘함과 동시에 특출한 영농 방법을 개발하여 중앙아시아에 모범적인 집단 농장을 일구어나갔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강제 이주와 더불어 민족 학교를 패쇄하여 버리고 민족을 상기시키는 모든 전통들을 체계적으로 파괴하여 갔다. 소련 정부에서는 소수 민족들을 제국주의적인 원리에 따라서 통합하려 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민족 의식의 해체 위에 새로운 소비에트의 민족의식을 가용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는 사이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으나 남북으로 분단되고 이어서 6.25의 비극을 당하게 되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독립국가연합이 탄생하자 중앙아시아 소수 민족 그룹들이 독립을 하여 민족 국가를 출범하게 되고 고려인들은 다시 이방인 신세로 전락하여 연해주 지방으로 돌아가거나 러시아나 다른 소수 민족국가로 유랑생활을 떠나는 처지가 되기도 하였다.
현재 구소련 지역, 독립국가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에 사는 고려인들은 우즈베키스탄에 18 만, 러시아에 17만, 카자흐스탄에 11만, 기타 지역에 4만 등 50여 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국 내에도 4만 명 정도의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법적인 보호도 미흡한 실정이다. 가난과 학정 그리고 망국의 한을 품고 조국을 떠나야만 했던 고려인들은 고려인 후손이라는 운명을 저주하며 끝나지 않은 유랑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조국이 처한 어려운 현실 속에서 중국 간도 지방과 러시아 연해주 지방으로 유랑이민을 떠난 동포들이지만 그들은 애족 정신이 강했고 사실은 고조선, 고구려의 잃었던 강역을 다시 개척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연변 조선족은 중국정부로부터 한민족 자치주로 지정받아 우리말 교육과 행정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소련 정부가 한국말과 한글을 인정하지 않고 러시아어와 러시아문화만 강요한 탓에 대부분의 고려인이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를 잊어버린 채 같은 민족이면서도 소통할 수 없는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있다.
남북교류가 활성화되어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한반도 종단 철도가 연결된다면 현재 해상으로 수송하고 있는 화물을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여 날짜가 단축되고 저렴하게 화물 수송을 할 수 있어 남한은 물류기지가 될 수 있다. 또한 열차 여행이 일반화되면 조상의 정기가 서린 만주벌판과 우리 민족의 시원인 바이칼호를 돌아보면서 기상을 펼칠 기회도 될 것이다. 또한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 당한 경로를 체험하며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이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반추하면서 우리들의 처지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