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슨가족과의 작별
Newsroh=황길재 칼럼니스트
연휴의 마지막날인 메모리얼 데이. 아침 식사를 하고 짐을 쌌다. 오래 기억에 남을 좋은 시간을 보냈다. 다시 올 기회가 있을까? 택시 운전을 하며 미국인들의 삶을 관찰자로서 바라봤다면 이번에는 그들의 삶 속에서 함께 했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휴일인데도 도로를 달리는 트럭이 적잖게 보였다. 그들의 수고 덕분에 누군가에게 필요한 물자가 조달(調達)된다.
스파이로에 도착해 네이슨의 부모님과 작별했다. 네이슨 엄마는 내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냈다며 꼭 다시 오라고 했다. 주변에서 아시안 마켓을 찾지 못하면 스프링필드에서 한국 식품을 사서 오는 길에 갖다 달라는 말도 했다. 나도 진정 그러고 싶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살아 오며 이웃들과 정이 들어 이사를 가더라도 꼭 다시 찾아 오겠다는 약속이 지켜진 적이 있던가? 한국에서 살았고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의 특별한 인연이라 오래도록 이어갔으면 싶다.
페북에 올린 아기 신발 사진을 보고 지인이 선물하고 싶다며 구입 방법을 물어왔다. 네이슨 엄마는 수제품이라 어떤 천으로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만들어진 것 중에서 예쁜 것으로 골라 아기 이름을 바닥에 새겨 달라고 했다.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특별한 물건이다. 가격을 지불하려니 내게 주는 선물이라며 기어코 돈을 사양하셨다.
포토로 돌아오는 길에 네이슨과 형제처럼 지낸다는 오랜 지기의 농장에 들렀다. 친구는 없고 부인이 마중 나와 멕시코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염소떼가 사람을 보고 몰려왔다. 양과 달리 염소는 깨끗하고 냄새도 나지 않았다. 얘들이 쿠기 같은 단 과자를 엄청 좋아한다고 했다. 마치 강아지처럼 서슴 없이 머리를 내밀며 과자를 달라고 했다. 어떤 녀석은 앞다리를 번쩍 들어 안겨 왔다. 말과 당나귀도 있었다.
집에 와서 피곤해서 한숨 자고 있자니 네이슨 부모님이 다시 오셨다. 네이슨과 함께 집 거실에 쌓인 물건들을 차고로 옮겼다. 역시 엄마는 위대하다. 짧은 시간에 집을 제 모습을 갖췄다. 여자 없이는 남자는 아무 것도 못 한다.
집 정리 하는 사이에 나는 남은 재료로 떡볶이를 만들었다. 이번에도 양 조절에 실패했다. 너무 많이 만들었다. 어차피 재료를 남겨봐야 쓸 사람도 없다. 네이슨 부모님은 저녁 약속이 있으신지 바로 가셨다. 아이들은 떡이 쫄깃하다며 맛있어 했다. 제이제이는 맛 있었는지 한 그릇 더 퍼다 먹었다. 미첼은 배고프지 않다며 먹지 않았다. 부침개는 만들 기회가 없을 듯 하다. 부추와 파 등 재료는 아깝지만 버려야겠지. 부침가루는 언젠가 쓸 기회가 있을지도.
저녁 먹고 미드 ‘13가지 이유’ 시즌 2를 봤다. 아니 무슨 고등학생들의 섹스 장면이 이렇게 많이 나오나? 우리 애들이랑 봤으면 좀 민망했을 것 같은데 네이슨과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성에 대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고등학생이 성관계를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닌 모양이다.
네이슨 아이들 중에 누가 친자식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족을 구성하는데 그런 것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 모습이다. 혈육을 중요시하는 한국사람들과는 달리 인연(因緣)을 중시하는 것 같다.
네이슨 엄마가 네이슨을 낳고 한국에 왔을 때 19살이라고 했다. 네이슨을 임신했을 때 리듬을 타며 발길질을 했다고 했다. 네이슨은 지금도 운전 중 마음에 드는 음악이 나오면 박자를 두드린다. 천성인가 보다. 네이슨을 낳을 때도 쉽게 순산했단다.
오늘 아침 네이슨은 TNT 들어서 우리가 운행한 거리가 1만8천 마일이라고 했다. 1만2천 마일을 더 운행하면 수련이 끝난다. 많이 뛸 때는 일주일에 5천 마일도 더 뛴다. 3주 정도 걸린다는 얘기다. 이후에는 나 혼자 다녀야 한다. 나는 아직 멀었는데.
추억의 고향길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 먹을 것을 준비하려니 마땅한 것이 없다. 제이제이는 오늘 모슨 연습인지 행사인지 있다고 네이슨이 차로 데려다 줬다. 어제 만든 떡볶이는 굳어서 먹음직스럽지 않았다. 아쉬운대로 라면을 끓여 줬다. 떡볶이도 데워서 먹을 사람은 먹으라 했다. 콜튼은 떡이 맛있는지 떡만 골라서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었다. 파전이나 부추전을 만들어 주려니 집에 식용유가 없었다. 어제 레이크 하우스에서 하나 챙겨왔으면 좋았을 것을. 여동생이 이사 나간 후라 도마도 없고 식기도 변변찮았다. 주방 용품 정리를 한 다음 없는 것은 새로 장만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과 볼링장에 갔다. 영화관은 오후에 문을 연다고 해서 볼링만 두 게임씩 하고 왔다. 짐 싸서 나온 후 네이슨 부모님 집에 들러 작별 인사하고 아이들을 네이슨 전처 집에 데려다줬다. 티나는 이제 다시 볼 기회가 없다. 네이슨과 헤어지며 마침내 티나는 눈물을 떨궜다. 네이슨은 아이들과도 포옹(抱擁)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스프링필드로 돌아오는 길은 왔던 길과는 다른 코스를 택했다. 아칸소 중북부와 남서부를 연결하는 도로다. 예전에는 트럭이 다닐 정도로 주요 도로였지만 다른 도로가 만들어진 후에는 잊혀진 시골길처럼 됐다. 그도 그럴 것이 구불구불 가파른 고개를 넘는 길이다. 이 길은 네이슨이 어릴 적에 살았던 고향길이었다. 네이슨은 추억에 잠긴 듯 옛날에 저기는 어땠고, 저 집에는 누가 살았고, 여기서는 무엇을 했고, 저 우물은 자기가 팠다는 등 내력을 읊었다. 아름다운 시골 풍경이었다. 고개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계곡의 규모가 컸다. 여름 휴양지로도 좋겠다. 오다가 메디슨 카운티가 있길래 바로 여기가 소설과 영화에 나온 장소인가 싶어 확인해보니 다른 곳이다. 미국에는 이름이 같은 곳이 너무 많다. 하지만 여기서 그 영화를 찍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네이슨이 아니었다면 이런 길을 언제 와봤겠는가? 트럭 운전하며 일부러 찾아 다닐 길은 아니다. 미국에 이런 길이 얼마나 많을까.
저녁 8시가 넘어 프라임 본사에 도착했다. 홈 스윗 홈이 아닌 트럭 스윗 트럭이다. 오늘은 쉬고 내일 화물을 받을 것이다. 며칠 동안 좋은 시간을 보냈다. 아내 옆에서 거들며 어설프게 배운 요리와 설거지 등 부엌 기술이 이번에 제 몫을 톡톡히 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황길재의 길에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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