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출근하기 전 뒷문을 살짝 열어놓고 출근을 한다. 렌트한 새집 에는 고양이 문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도 나의 대충 챙겨 먹은 아 침보다도 고양이들의 밥을 더 정성스레 챙긴다.
타고난 충성심의 고양이 집사가 아닐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원해서 하는 일들이다. 그리고 오후에 퇴근해 집에 오면 대부분은 고양이 접시가 비어있다. 고양이들은 나를 반기듯 뛰어오지만 사실은 밥 달라는 소리인 걸 나는 너무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아이들을 아주 아낀다.
오늘은 퇴근해 집에 와서 고양이들 밥을 챙겨 주고, 나도 저녁을 챙겨 먹 었다. 평소 좀 별난 새끼 고양이가 오늘 따라 ‘후다다닥 후다다닥’요란 하게 온 집안을 뛰어 다녔지만, 요녀석은 워낙 그런 아이라 오늘은 또 뭘 가지고 저렇게 뛰어노나 한순간 생각하고는 그러려니 했다.
저녁을 다 먹고, 씻으려고 욕실로 들어섰다가 나는 정말 혼비백산하고야 말았다. 뭔가 조용해야 할 집안에서 ‘푸더덕’거리며 날아다니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뛰쳐 나왔다. 너무 놀라서 다른 방으로 뛰어나왔다. 하필,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소라면 주인 아저씨께 도움을 청할텐데 주인 부부는 여행 중이시다. 늘 이런 식이다. 주인 부부가 집만 비우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만다. 그리고 나를 따라 욕실로 들어온 새끼고양이는 뭔지도 모르는 날아다니는 생명체를 잡겠다며 온 집안을 달리고 있었다. 저 아이가 잡으려고 뛰어다니던게 저거였구나 싶었다. 뛰어다니는 새끼 고양이의 모습에서 사냥 본능이 이글거리는게 보였다.
우선 나는 새끼 고양이를 접근하지 못하게 격리를 시키고 날아다니는 생명체가 무엇인지부터 확인하자 싶었다. 욕실 구석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듯한 참새 한마리가 보였다. 크기로 봐서 새끼인 모양이었다. 아주 작고 가녀린 녀석이 지친듯 꼼짝 못하고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푸더덕거리며 주위서 날아다니는 것만으로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작은 새는 어떻게 만져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작아서 건드리면 부러뜨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싶었다. 새끼 고양이가 뛰어다니던게 저 새를 쫓은 거였다면 이 새는 족히 몇 시간은 쫓기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지친 새를 구해줘야 하는데, 나 말곤 사람도 없는 집에서 다른 방도가 없어 보였다.
나는 용기를 내서 주위에 있던 천을 들고 무서워서 구석에 움츠리고 있던 새끼 새를 감싸 안았다. 달아나보겠다고 퍼덕거리면 내가 더 놀랠 거 같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새는 많이 지친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새끼 새를 데리고 고양이가 보지 않게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바깥 공기를 맡으니 조금 살아나는 듯 고개를 두리번 거리는게 보였다. 그리고 살았다 싶었던지 내가 손을 벌리자 조금 머뭇거리더니 숲으로 날아갔다.
새를 날려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오니 새끼 고양이는 그때까지도 새를 찾느라 분주했다. 갑자기 새가 보이지 않자 세상 잃은 듯 마구 찾아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고양이를 보고 있자니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새를 못 잡게 교육 중이지만, 더 똑똑히 가르쳐야겠다고 생각 하면서.. 그렇게 작은 새를 날려 보내고 나는 혼자 생각했다. 오늘 내가 집안으로 들어온 작은 생명 하나를 구했다.
그리고 그 생명을 구했다는 생각이 들자, 일을 마치고 피곤했던 몸이 살짝 풀리는듯 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세상에 작은 생명하나 구하고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거였다. ‘더 많은 생명들을 구하진 못하더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미 알고 있어야 하는 거였는데, 아니 이미 아는 것이었는데 실감한 적이 없었다.
이제야 그런 생각들을 하는 것에 살짝 반성도 든다. 이 작은 사건으로 참 큰 걸 깨닫는다. 생명을 구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다른 생명들에 도움이라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에 생각이 닿았고, 나는 그 작은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칼럼니스트 강명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