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 디자이너 유지인
Newsroh=앤드류 임 칼럼니스트
뉴욕에서 한국인으로 살다보면 대중문화에서의 이른바 한류를 실감할 때가 자주 있다. 한국 드라마를 보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늘고 한국의 대중가요가 미국의 업소내 매장에서 들리기도 한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뉴욕의 라디오 방송에서 나올 때 신기하고 놀랍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뉴욕의 레스토랑이나 소매점에서 한국 가요를 듣게 되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말 가사가 들려서 한국 노래인 줄 알지, 가수가 누구인지 노래 제목이 뭔지 모르는 경우마저 허다하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미국이라는 국제적이고 큰 시장에 팔리고 있는 현상은 공연자, 즉 배우나 가수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드라마를 쓰는 작가나 그것을 영상에 담는 연출가의 능력이 매력적인 배우를 만날 때 한류 스타가 탄생하고, 가수라면 좋은 곡을 쓰는 작곡가를 만나야 하는 법이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국제적인 스타들을 탄생시키는 현상은 인지도(認知度) 면에서 유리한 대중문화의 특성상 더 두드러지고 대단해 보이지만, 클래식 음악계나 무용 등에서 한국인 공연예술가들의 활약 또한 예전과 달리 활발하다. 대중문화계의 스타들처럼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을 뿐, 클래식 팬들에게 있어 그들의 활약은 사실 한류를 넘어설 정도의 놀라움이요 자랑거리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주요 배역을 맡아 노래하고 연기하는 한국인 성악가를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 피겨의 김연아나 성악의 조수미 같은, 수백년을 기다려도 나온다는 보장 없는 돌연변이 천재들이, 한국내의 수준과 상관없이 세계 무대를 누비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나고 자라고 훈련 받아 배출된 공연예술가들이 세계 공연예술의 중심 뉴욕에 와서 역시 세계적인 수준의 공연예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이다.
클래식계 공연예술가들의 세계 무대 진출과 대중문화의 한류현상 간에는 그러나 한가지 큰 차이가 있다.
대중문화계의 한류 스타들은 본토인 한국에서부터 인기를 얻고 상당한 수준의 공연과 방송되는 쇼 등을 통해 검증 받아 해외로 수출된다고 봐야 한다. 즉 그들의 한국 내 콘서트나 쇼 등은 팬들을 매료(魅了)시키기에 충분한 수준에 이미 도달해 있고, 인터넷을 통해 이를 접하는 외국인들을 그들의 팬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과되지 않은 표현에 양해를 구하며 공연예술인들의 세계 무대 진출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공연예술계, 특히 클래식계의 인재들은 그냥 ‘그들이 잘났을 뿐’이다. 즉 한국 공연예술계의 수준과 무관하다는 말이다. 물론 한국의 공연예술계의 수준을 일괄적으로 폄하(貶下)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러나 뉴욕의 브로드웨이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대등한 수준의 공연이 한국에서도 올려지고 있다는 억지스런 포장도 하고 싶지 않다. 사실이 아니니까.
대중예술계의 스타들이 국내에서의 수준 높은 공연과 쇼를 통해 외국으로 진출하는 것과 달리 공연예술계의 창작물이 공연자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조명이나 무대효과 같은 분야의 전문 예술가들이 부족해서 아닐까 조심스럽게 진단해 본다.
하나의 공연이 무대에 올려지려면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작가, 연출가는 물론이고 무대감독, 무대미술가, 조명디자이너, 무대효과 디자이너, 음향전문가 등 공연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을 창의적으로 만들어가는 이른바 스탭(staff)으로 총칭되는 인력 말이다. 기술적인 전문지식과 예술적인 감각을 동시에 갖추어야 하는 분야의 특성상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이 필요한데, 한국의 공연예술 시장 규모 탓인지 배출되는 인력은 턱 없이 부족해 보인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유학해 공부하는 사람들은 종종 눈에 띄지만, 한국으로 돌아가 일할 곳이 마땅치 않은 현실이다. 대학강단에 서거나 대중문화계 행사를 기획하는 회사 등에 취직하는 경우가 많고 공연예술계에서 전문 스탭으로 자리를 잡기란 거의 복권에 당첨되는 확률처럼 여겨질 정도다. 아니 어쩌면 한국의 공연예술계가 전문 스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더 솔직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조명이나 무대효과 등의 분야는 ‘기사’ 정도의 인력으로 전문가들을 취급하고 있다해도 한국의 공연예술계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필자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점이 브로드웨이와 대학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한국 오페라 공연의 수준 차이를 만드는 치명적인 요인들 중 하나라고 감히 진단한다.
공연예술의 기술적인 발전은 놀라울 정도다. 공연예술계의 기술적인 부분은 창작 범위를 넓히고 창의성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기여한다. 예술적인 기여다. 기술의 발전이 창작을 돕고 예술성의 발전은 기술의 발전을 유도하는 유익한 상호작용이 공연예술의 발전을 가속(加速)시킨다.
한국의 공연예술계에 전문 스탭의 양성과 영입이 필요한 이유는 어쩌면 필연에 가까운 과제다. 문제는 해외에서 공부하거나 훈련 받은 전문가들을 한국 공연예술계에서 찾는 일이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이는 스탭이 ‘전문 예술가’로 또는 창작의 한 주체로 대우 받지 못하는 한국의 풍토와 전문 스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공연계의 현실, 그리고 그에 따른 수요의 부족을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드물게 등장한 한국인 조명 디자이너이자 무대효과 디자이너 한 사람이 눈에 띈다.
유지인이 그 주인공이다. 조명 및 뮤대효과 관련 명문대학으로 알려진 오하이오 소재 우스터 컬리지 연극무용 학과에서 무대기술을 전공하고 뉴욕 예술 프로그램에서 수학(修學)한 보기 드문 한국인 조명디자이너, 유지인은 재학시절부터 이미 Catching Fireflies, Form, Countdown to Never Bridge 등 연극과 무용 공연에서 조명디자인을 맡았고, A Journey와 The Crucible(시련)에는 프로젝션 디자이너로 참여했다. 이 중 아서 밀러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현대의 고전, The Crucible은 셜리 휴스톤-핀리의 실험적인 연출로 화제를 모았다. 이 공연에서는 영상을 통한 이미지의 표현이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기에 유지인의 역할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유지인은 이외에도 샹그리아, 침묵의 경외, 인생은 한갖 꿈, 가을 댄스 음악제, 스카핀, 한 스푼의 물 등에서도 조명 및 무대효과 디자인을 맡아 착실히 경력을 쌓아나갔다. 우스터 컬리지가 졸업전부터 유지인을 학교극장의 조명 및 효과담당자로 위촉(委囑)한 것만으로도 그의 실력은 익히 증명되고 있다.
유지인은 조명과 무대효과에서 뿐 아니라 무대미술가로서도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같은 다재다능함에도 “조명 디자인에 가장 애착이 간다”고 말한다. “빛으로 공연을 이끌어가고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에 한 없는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유지인은 현재 미국 내 한국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자선 공연을 펼치고 있는 한국계 공연단체들에서 봉사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미 동부 유일의 한국어 창작 뮤지컬 극단인 MAT에서 무대감독 및 조명디자이너로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한인 커뮤니티에서 공연활동을 하고 있는 연극인들은 한결같이 전문 스탭의 부재가 제작 상의 가장 큰 어려움이라며 입을 모으고 있는 상황에서 유지인의 등장과 봉사는 마른 가뭄에 단비같은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유지인은 현재 한국의 공연예술계로의 진출과 뉴욕에서의 작품활동을 놓고 고민 중이다. 마음은 조국의 공연예술계에 기여하고 싶지만 정작 유지인의 가치를 이미 높이 평가하고 있는 곳은 미국이고 특히 뉴욕이기 때문이다.
드물게 등장한 한국인 조명 디자이너 유지인이 미국에서 그 가치를 크게 인정 받고 있는 동안 한국의 공연예술계도 조명디자이너와 무대효과 전문 예술가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발전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상 사진 유지인 씨 제공>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앤드류 임의 뒷골목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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