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목소리에 가녀린 체구지만 무쏘처럼 거침없이 나아가는 그녀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강한 엄마다. 희귀병을 가지고 태어난 아들로 인해 운명이 바뀌어 버린 그녀는 이제 약사로서 타인의 건강을 책임지는 위치에 서 있다.
프랑스 한인사회에서는 최초로 파리의 중심가, 개선문 인근에 약국을 개업한 김현정 약사를 만나, 그녀의 지난한 삶과 꺽이지 않는 꿈을 들어본다.
파리에는 언제 오셨나요?
1998년 4월에 남편이 주재원(LG전자)으로 발령 받아 먼저 왔고, 저는 한 달 뒤에 도착했습니다.
남편과는 사내 커플로 만났죠. 89년에 입사했는데, 남편이 대학 선배라며 나타났어요. 학교에서 본 적은 없었는데, 알고 보니 같은 학교 같은 과 선배(J대 전산과)여서 우연치 않게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같은 부서는 아니었지만 같이 근무하는 2년 동안 동문이라는 이유로 자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죠.
결혼할 당시가 IMF 때였는데, 남편이 프랑스로 발령을 받았고, 저는 자연스럽게 사직을 하고 남편을 따라 오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약대를 지원하게 된 동기는?
파리 생활 1년 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지체장애였습니다. 그것이 저희 인생의 모든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1~2개월이 지나면서 다른 아이들하고 발육이 달라 검사를 해보니 울프신드롬* 이라는 희귀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Wolf-Hirschhorn syndrome은 1965년 Wolf와 Hirschhorn에 처음 발표된 것으로, 4번 염색체 단완의 부분결실 때문에 발생하며, 안면 기형 및 심한 발달 지연, 그리고 정신지체를 일으킨다고 알려져 있다. 발생 빈도는 출생아 30,000명~50,000명 중 1명)
그때부터 스무살이 되는 지금까지도,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습니다. 저희 가족들은 그 아이를 중심으로 모든 계획들이 결정이 되고 움직여지는 상황입니다.
그로인해 병원을 자주 오가게 됐는데, 어느 날 남편이 제게 약학 공부를 해보는게 어떻겠느냐고 권하더군요. 나이도 들고 자신이 없어 처음엔 거절 했는데, 애가 병원도 자주 가고 약도 많이 쓰니까 답답하잖아요. 성분이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치료할 방법은 없는지...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약대에 지원을 했는데 운이 좋게도 1학년으로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지금은 약대 의대 치대 산파대 키네 등이 다 모여서 공부하는데, 당시에는 약대생들끼리만 경쟁을 해야 했어요. 언어도 부족하고 공부 양도 많고, 너무 힘들어 솔직히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입학할 당시 나이가 35세였는데, 20대 초반의 파릇파릇한 아이들과 경쟁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죠. 원래부터 도전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데다 쉽게 포기하고 안주하는 성격인데, 그때는 어떤 힘에 이끌렸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매일 수업 내용을 녹음해 집에 와서 반복해 들으며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남편에게 “하는데까지 해 보겠지만, 한번이라도 낙제를 하게 되면 더 이상 공부는 하지않겠노라”고 미리 엄포를 놨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 번도 유급없이 6년 과정을 무사히 마치게 되었습니다.
공부하면서 에피소드가 있다면...
2008년, 공부를 막 시작할 무렵, 남편이 LG 한국 본사로 복귀하면서 프랑스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가족들 부양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실이면서도 남편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아픈 애를 챙겨야 하고, 둘째 셋째 아이들 초등학교까지 데려다 주고는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아이들 돌아 올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와 아이들을 챙겨야하는 빈틈없이 꽉 짜여진 일상의 연속이었죠.
중간, 기말고사가 있을 때는 침대 위에 책상을 펴 놓고 공부하다가 잠든 기억도 떠오르네요. 재미있던 기억은 별로 없고 그렇게 힘든 기억 밖에 남아있지 않군요. 그나마 학교에서 젊은 학생들과 어울리니까 강의 듣다가 웃기도 하고, 그들과 경쟁을 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가족이 떨어져 지낸 시간은 얼마나?
남편은 프랑스로 출장을 1년에 4~5번 정도 왔고, 2010년에는 다시 네덜란드 지사로 발령을 받아 왔습니다. 그 때 남편은 1~2주에 한번 씩 금요일마다 차를 몰고 내려왔다가 일요일 점심을 먹고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5년 간 본의 아니게 떨어져 살아야 했는데, 사실 남편에게 미안하죠.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하고... 편안하게 안정적으로 올라 갈 수 있는 사람인데 이런 가정적인 상황 때문에 자꾸 직장을 옮겨야 했으니 너무 안스러웠습니다.
아들의 치료는 어느 정도의 상황인가요?
치료는 안되는 병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그냥 그렇게 평생 살아야 합니다. 전적으로 누군가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죠. 혼자 일어설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용무도 볼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 24시간 지켜 줘야하는 상황입니다.
그나마 장애아들을 위한 특수학교를 다니는데, 그 시간이 제가 유일하게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다행히 두 딸은 잘 커주었습니다. 둘째는 에꼴드 꼬멕스 1학년, 막내는 고등학교 2학년을 마쳤습니다.
프랑스 약대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나요?
약대는 6년 과정이긴 하지만, 유급을 하게 되면 많게는 8~9년 만에 끝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3학년 때부터는 약사의 책임 하에 보조 약사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습니다. 대부분 방학을 이용 해 약사로서의 경험을 쌓게 됩니다.
5학년 때는 약국, 병원, 기업 등 어느 쪽에서 일할지 진로를 선택해야 합니다.
6학년 때는 인턴을 하고 6년 과정을 마치면, 마지막으로 논문을 써야 정식 디플롬을 받고 약사로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논문을 쓰지 않더라도 약사로 인정을 받긴 하지만 단기 등록증을 2년마다 갱신해야 합니다.
저는 6년 과정과 논문을 마친 후, 정식 디플롬을 받고 약국에서 5년간 약사로 일을 해오다가 지난 해에 제 약국을 개업하게 되었습니다.
약국을 개업하기까지의 과정은...
약국을 인수하는데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기존 약국을 많이 보러 다녔는데 15구에서 작은 약국을 살 기회도 있었습니다. 확실히 계약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막판에 다른 사람에게 넘어 가 심하게 좌절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개선문 근처 Friedland 거리의 이 약국을 보게 됐는데, 위치가 너무 좋아서 바로 결정했습니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죠.
인수한 후 벽에 붙어 있는 사진을 보고 이 약국이 1800년대 후반에 개업한, 100년이 훨씬 넘은 전통있는 약국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한인들이 이용한다면 어떤 장점이 있을까요?
프랑스에서 약대를 다니는 한인 학생들은 몇몇 있는데, 졸업하고 약국을 개업한 경우는 제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파리의 김약사’라는 블로그를 운영 중인데, 이를 보고 찾아오는 분도 있습니다. 파리에 사는 분 또는 여행자의 경우, 급히 약을 구입해야 하는데 언어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전화를 주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처방전이 간단하면 좋은 데 지병이 깊거나 약사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잘 안될 때 한국 약국에 온 것처럼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약사가 복약 지도를 해야 합니다. 약을 판매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정확한 복용법과 부작용 등 우리말로 세부적으로 안내를 해드리기에 아무래도 그런 면에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힘든 산을 넘으셨는데,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요?
약국을 개업하면 큰 산을 넘은 줄 알았는데, 산 넘어 또 산이네요. 약국 운영이 생각했던 것보다 쉽지는 않습니다. 다른 업종에 비해 사회적인 책임감도 크고요.
제 성격이 악착같은 사람이 아니고 힘든 일도 싫어했던 사람인데, 결과적으로 저의 환경이 그 속에 빠져들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걸어 온 것처럼 그저 묵묵히 가다보면 또 다른 산을 넘고 있겠지요?
다행히 남편이 지난 4월부로 퇴사를 하고 5월부터 약국 일을 돕고 있어 큰 힘이 됩니다.
사실 작년에 인수할 때만 해도 약국이 너무 좁고 낡았습니다. 때문에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물건을 들여 놓는데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습니다.
이 약국은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단골들이 많습니다. 제가 인수하고 나서 관심을 갖고 지켜보시는데,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들 좋아하세요. 사실 프랑스에서 약국이라는게 동네의 중요한 구성원이며 필요조건이라는, 약국은 우리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중엔 변화를 바라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나만의 약국으로 남았으면 싶은 거죠.
어쨌든 지금은 어느 정도 정비가 된 만큼 이제는 서비스의 질을 높여야 하는 단계입니다. 정부에서 요구하는 예방접종에도 참여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방접종을 하기 위해 병원에 가서 의사의 처방을 받고, 약국에서 약을 사와 다시 의사에게 가서 주사를 맞아야 하는, 몇 단계를 거치는 번거로움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약국은 환자들을 위해 제공하는 서비스업인 만큼 환자들과 신뢰를 쌓는게 중요합니다. 신뢰감을 주는 약국을 만들어가는게 다음 목표입니다.
한인사회를 위한 활동 계획은?
프랑스 한인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늘 관심은 갖고 있으면서도 도움을 드리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약국이 조금 안정을 찾게 되면 한인사회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도 하고, 제 역할로 봉사도 하고 싶습니다.
대사관이나 한인회와 연결되어 SOS 응급 상담 서비스나 적합한 병원도 연결해 주면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힘든 여건과 상황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한 김현정 약사의 모습이 아름답다.
김 약사는 앞으로 프랑스존 한위클리 지면을 통해 프랑스의 의료 정보나 상식, 건강 칼럼 등을 전해 줄 예정이다. (비정기적)
프랑스 한인사회의 건강 지킴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프랑스(파리)=한위클리】 이석수 편집위원
PHARMACIE FRIEDLAND
(약사: 김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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