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와 후손들3] 홍재설과 두 아들 홍종욱-홍종엽, 그리고 후손들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112년 만에 인정 받은 '거사'
일제의 야욕이 노골화 되던 대한제국 시대에 한 초급 장군이 있었다. 현재 군제의 준장에 해당하는 대한제국군 참장 홍재설이다.
1894년 7월 27일 시작된 갑오개혁으로 조선군이 '대한제국군'으로 명칭과 편제가 바뀌어 있었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였던 대한제국은 자국 군대 조차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신세였다. 여기 저기서 민란이 일어나고 의병이 속속 출현하던 시기였다.
그나마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대한제국군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존재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고, 1907년에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군대가 해산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 와중에 홍재설은 장군 직을 스스로 내던졌고 두 건의 '사고'를 친다.
후손들의 전언에 따르면, 의분을 이기지 못한 채 '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에 나선 홍재설은 영친왕이 이토 통감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자 열차가 지나는 철로에 드러 누워 시위 농성을 벌였다. 이 일로 그는 일제와 친일파에 의해 불순분자로 찍혀 버렸다.
특히 그는 1907년 을사오적 이완용의 저택에 불을 지르는 대형 사고를 쳤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총리 관저에 방화한 '테러범'인 셈이다. 그는 일경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이후 10년으로 감형된 후 3년 간 전라남도 지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광복 74주년을 맞은 올해 8월 13일 홍재설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운동 사고'를 친 지 112년 만에 유공자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나마 후손들의 증언과 경기 지역 향토 사학자 이상일 등의 끈질긴 노력의 산물이었다.
▲ 대한제국시절 초급장군(참장) 홍재설이 올해 8월 13일 정부로부터 받은 애족장 훈장증. ⓒ 홍민표 제공 |
퇴역 장군 독립운동가 홍재설에 얽힌 '전설'은 당대에서 끝나지 않았다. 미국의 작고한 재야 사학자이자 민권운동가 하워드 진이 말했듯 '끓어오르는 조용한 분노나 최초로 들려오는 희미한 항의의 소리는 어느날 불씨가 되어 되살아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그리고 민중은 이 역사의 추동세력이자 주체이며 '숨겨진 영웅들'이다.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이 일제의 사주로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나돈 지 얼마 되지 않은 1919년 3월, 조선 민중의 분노는 임계점에 이르러 폭발하고 말았다.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일제 경찰의 통계에 따르더라도 연인원 200만 명이 넘고, 1000만 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1700만 명 안팎으로 추산되던 전체 인구를 감안하면 가히 '민중혁명'이라고 할 만하다.
아버지 홍재설의 영향을 받은 두 아들 홍종욱과 홍종엽도 이 민중혁명에 가담했고, 이들의 활약상은 경기도 용인 지역에 또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국가기록원의 용인군 독립운동 기록을 살펴보면 만세운동이 여러갈래로 벌어졌는데, 포곡면의 홍종욱과 홍종엽 형제의 활동도 주요하게 다루어 지고 있다.
아버지 거사 뒤이은 포곡면의 두 형제
우선 용인군 지역에서는 3월 20일 처음으로 기흥 읍삼의 김구식이 하갈리 강가에서 수십명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21일 원삼에서 황경준 등이 이끈 주민 수 백 명이 좌전고개에서 만세운동을 외치기 시작하여 면사무소 앞에서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했다. 이후로 '좌전 만세운동'은 용인군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포곡면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포곡면의 홍종욱(27)과 6살 터울의 차남 홍종엽(21)은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가슴 속 깊이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민족혼을 간직한 채 잠잠히 때를 기다리며 암중모색을 하고 있었다. 3월 말 어느날 알고 지내던 초지리 사람 권종목으로부터 3월 28일을 '거사일'로 정했다는 연통을 받았다.
거사 당일 홍종욱-홍종엽 형제는 주민 200여 명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포곡면 금어리에서 양지면 대대리까지 돌며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했다. 오전 7시 삼계리 주민들을 이끈 권종목이 홍씨 형제가 사는 금어리를 거쳐 둔전리로 진출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둔전리 유지 정규복 등이 이끈 시위대가 일어나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며 포곡면을 벗어나서 군청소재지가 있는 수여면 김장량리로 향했다.
포곡면을 들썩였던 만세운동은 다음날 옆 동네로 번졌다. 29일 오전 8시 수지면 이덕균이 고기리 주민 100여명을 이끌어 동천리로 향하였고, 동천리에서 300명이 합류하여 면내를 돌다 면사무소까지 진출하여 만세합창을 하고 읍삼 마북리에서 운동을 마쳤다. 내사면에서도 같은날 한영규와 김운식이 남곡리 주민 100여 명과 양지리까지 진출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처럼 용인 지역 주민들은 3월 중순 이후 좌우 위아래 면동네를 오가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발로 찾아가는 독립운동 유적지>(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용인 지역에서 5월까지 총 13회에 걸쳐 1만3200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35명이 사망하고 139명이 부상을 당했다. 체포된 500여 명은 모진 고문에 이은 옥살이를 했다.
홍재설의 두 아들 홍종욱과 홍종엽은 권종목과 더불어 포곡면 만세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홍종욱은 용인 헌병대에 체포되어 '옷이 피걸레가 될 정도'로 모진 고문을 당했고, 10개월 형 만기 출소후 '만세주동자'라는 낙인이 찍혀 일경과 친일파의 괴롭힘에 시달려 사실상 경제활동에 나설 수 없을 정도였다.
형과 함께 체포된 홍종엽도 일제의 고문을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그들의 심문에 응하였다. 홍종엽은 일본 헌병대의 심문에 "삼계리 방면에서 권종목이 선두에 서서 구한국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부르짖었고, 자신에게도 만세를 부를 것을 요청해 이에 동조했노라"고 당당하게 증언했다.
두 형제는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각각 징역 10개월을 언도받았다. 이들은 권종목과 더불어 항소했으나 일제는 7월 8일 기각했고, 1920년 4월 28일 출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독립운동가 홍종욱의 수형 사진. 홍종욱은 그의 동생 홍종엽과 더불어 1910년 3월 28일 용인 포곡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 홍민표 제공 |
베갯닛 뜯어 끼니 때운 독립운동가 후손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이 그렇듯 출옥후 홍종욱-홍종엽 형제와 그 후손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한편으로는 가난과 싸워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요주의' 가문으로 낙인이 찍혀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다. 일제시대에는 일제시대 대로, 해방 후에는 해방 후대로.
가족들의 증언, 국가 기록원 기록, 두산백과, 향토사학자들의 증언, 그리고 경기지역 미디어에는 애국지사 두 형제와 그 후손들의 삶이 단편적이나마 영욕의 세월로 엮여져 드러나 있다.
선비였던 홍종욱은 독립운동 후유증으로 더욱 가난을 면치 못했고, 그의 가난은 상당기간 대물림을 이루었다. 현재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는 그의 손자 홍원표(69)의 고백은 우리 땅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지를 보여주고 있다.
홍종욱이 워낙 가난했던 데다 생계를 책임져야 할 큰아들 홍순갑까지 일찍 사망한 터여서 그의 가족들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홍순갑은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낙오한 후 고향에 돌아와 1주일 만에 숨졌는데, 그의 부인은 21살에 홀몸이 되었고, 겨우 2살배기 아들을 남겼다.
홍원표는 1970년대초 10대 후반 전후 시절 너무 가난해서 산 속에서 살았는데, 베갯잇을 뜯어 그 안을 채웠던 메밀 껍질을 먹기도 했고, 냉장고가 없으니 땅을 파서 음식을 넣어두고 잘게 자른 감자, 고구마, 배추 등을 조금씩 꺼내 국으로 끓여 가족 모두 나눠 먹었다고 지난 8월 <토론토한국일보>에 털어놓았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홍종욱)와 큰아버지 가족을 포함해 고모까지 함께 살았는데, 다리 뻗을 곳조차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독립유공자 홍종욱의 가계는 유공자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소액의 재정지원(제사 비용 15만원), 취업, 특례 대학입학 등 정부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홍종욱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때는 1990년 노태우 정부 때였는데, 이미 홍원표가 어려운 시절을 모두 겪고 40세를 넘긴 뒤였다. 온 가족에게 가난을 물려준 할아버지 홍종욱은 1963년에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도 홍원표는 한국전쟁 끝무렵 미군부대에서 반출된 하모니카를 얻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음악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서라벌 예대에 입학하여 피아노와 클라리넷 등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아르바이트 등으로 음악인생을 전전하다 MBC 관현악단에 입단, 지휘자로 이름을 날렸고, 지난 2001년 3월 캐나다로 이주해 살고 있다.
홍종욱의 또다른 손자 홍민표는 "중학교 1학년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렷을 적엔 할아버지가 왜 폐인으로 사나, 경제활동은 안 하시나 싶었다. 독립운동을 한 지도 몰랐다"면서 "나라에서는 친일파가 득세했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을 견제하는 마당에 어렵게 살 수 밖에 없었다"고 지난 3월 1일 <뉴시스>에 털어놓았다.
▲ 포곡면에서 동생 홍종엽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동한 홍종욱의 훈장증(1990년 8월 15일 수여) ⓒ홍민표 제공 |
홍종욱보다 6살이나 어린 홍종엽은 그나마 출옥 후에 건강을 되찾고 생업에도 열중하며 조용히 살았다.
부지런하고 근면 성실한 홍종엽은 악착같이 일하여 토지를 늘렸고, 얼마 되지 않아 사랑채 안채 등을 갖춘 제법 규모를 갖춘 집과 수 천 평의 농토를 소유하며 넉넉하게 살았다. 그의 아들 홍순창도 일찍 군청 공무원이 되었고, 나중에는 수의사가 되어 가축병원을 운영했다.
홍종엽은 늘 생활이 어려워 자신의 집에 드나든 형 홍종욱을 따뜻하게 대했다. 홍종엽의 손자이자 현재 미국 플로리다올랜도중앙안식일교회 홍두표 목사는 "자주 우리 집에 들른 큰 할아버지는 집에 오시면 밥을 꾹꾹 많이 담아 달라고 하셨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훙두표 목사는 "기독교인이기도 한 할아버지는 조용하신 분이었는데, 말 보다는 행실로 교훈은 주신 분"이라면서 "삼일절이나 광복절이 되면 상기된 표정으로 서두르시면서 내 손을 잡고 행사에 참석하시곤 했다"고 회고했다.
독립운동가 홍종엽은 1983년에 작고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의 훈훈한 이야기
홍종엽의 가계는 독립운동가 가족 답게 가슴 뭉클하게 하는 미담이 있다.
당초 독립유공자 직계 가족 남자 형제 가족들이 타도록 되어 있는 정부 보상법에 따라 보상금을 수령했으나, 올해부터 법이 바뀌어 남자형제들이 모두 사망할 경우 딸에게 수령 권한이 주어지게 되었다고한다. 이에 따라 홍 목사 부친의 여동생인 홍순영 고모에게 보상금이 돌아가게 되어 있었는데, 자신도 변변치 못한 처지인 고모는 이 보상금을 홍 목사의 가족들이 모두 받도록 되돌려 놓았다.
더구나 고모는 올해 증조부 홍재설이 독립운동가로 인정 받아 타게 된 보상금조차도 불구인 손주에게 돌려진 것에 감사해 했다고 한다. 홍순영이 홍두표 목사에게 쓴 서신 한토막을 소개한다.
"증조부님 보상금을 타 쓰려고 몇 년을 공들이고 신청하여 다 해놓았더니 나보다 더 필요한 불쌍한 손주 00이가 우선이라고 한다. 00이가 타게 되었다니 하나님께서 나를 시켜 불쌍한 00이를 돕도록 예비하신 듯하여 감사한다”
홍 목사는 "쉽지 않은 일인데, 고모께서 가족들에게 크나큰 양보와 나눔의 미덕과 교훈을 보여주셨다"면서 "머리가 숙여진다"고 말했다.
▲ 애국지사 홍종엽의 손자 홍두표 목사(올랜도중앙안식일교회) |
친일파와 변절자가 아직도 득세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경기도 용인 포곡면 홍씨 가문은 자랑스런 가문임에 틀림이 없다. 영친왕의 일본행을 반대해 철로 농성을 벌이고 민족 반역자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지른 증조 할아버지, 그리고 고문과 옥살이를 두려워 하지 않고 만세운동을 주도한 두 형제 할아버지를 조상으로 둔 가문은 흔치 않다.
이런 조상들을 두고 있는 홍두표 목사는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일운동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종교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한 그의 관점은 100여년 전 조상들의 삶의 여정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치열했던 조상들의 삶이 후손들 대에 와서 영글고 익어서일까. 그는 사해동포적 '이웃사랑'을 강조했다.
"몸을 던져 희생하신 조상들을 둔 것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압제와 핍박에 따른 아픔도 있고, 분명 가해자와 피해자도 있지만 민족적 국가적 차별성을 앞세워 선뜻 격한 행동에 나서는 건 좋지 않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