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와 해외 후손을 찾아서] <백범일지>에 등장하는 할아버지 명예회복 나선 후손
|
▲ <코리아위클리> 사무실 앞 건물에서 포즈를 취한 미국 플로리다 잭슨빌 거주 정상호씨(82). 그의 할아버지 정달하 선생은 <백범일지>와 <한국독립운동사>에도 등장한다. ⓒ김명곤 |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 현재 해외에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살고 있다. 플로리다 지역만 하더라도 삼일절 또는 광복절 기념식 등에서 독립 운동가 후손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는 정부로부터 독립 유공자로 일찍 인정을 받은 분들이 있는가하면, 이런 저런 규정 때문에 방치되어 있는 유공자 후손들도 있다. 먼 나라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후손들은 독립운동가 선조들에 대한 것은 물론 자신들이 그 후손이라는 사실마저도 가물가물 잊고 살아간다.
“할아버지는 백범 선생도 인정하는 독립운동가”
최근 기자가 ‘독립운동가 후손 찾기’ 시리즈를 연재하기 시작하자, 여기 저기서 여러건의 제보가 들어왔다. 그 가운데는 까맣게 잊고 있던, 어쩌면 짐짓 모르는체 숨겨 두었던 선조들의 이야기를 이제는 말할 때가 되었다는 듯 매우 조심스레 운을 띤 동포들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해체로 시작부터 절망을 안겨준 한국의 현대사는 혈서로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한 친일파 대통령과 그 아류들의 몸보신용 반공주의가 독립운동을 폄하하더니, 이제는 아예 ‘독립운동가=좌빨’이라는 등식으로 ‘학대’하는 지경으로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나는 독립운동가 후손입네!’ 하고 어디다 대고 말하기가 마뜩치 않았을 터이다.
미국 플로리다 잭슨빌 거주 은퇴 의사 정상호(82)씨가 "우리 할아버지가 백범일지에 나오는데요, 이거 말해도 될까 모르겠습니다"라고 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가 말한대로 살만큼 살았고, 별 평지풍파 없이 말년을 보내고 있는데, 100년 된 할아버지 이야기로 이래저래 오해를 살 것 같은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1973년 미국으로 유학 온 이후 47년 동안 플로리다 잭슨빌에서 의사로 살아온 정상호씨의 집안 내력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정씨는 한인회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고, 흑인 빈민가에서 의료활동을 하며 자연스레 지역 주류 매체는 물론 한인 신문들과 몇 차례 인터뷰를 했으나, 그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로, 백범일지에도 등장한다는 사실을 밝힌 적이 없다.
▲ 정달하의 독립운동 사실이 기록된 백범일지, 왼편은 1989년판, 오른편은 1979년판(3판) ⓒ 김명곤 |
만나기 전, 전화로 먼저 확인하면서 그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105 사건’(일명 ‘안악 사건’)에 연루된 인물 가운데 하나라는 얘기를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105인 사건’이 뭔가. ‘105인 사건’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식민통치를 강화하고, 반일 민족 저항세력들의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수의 신민회(1907년 초에 무실역행務實力行을 방향으로 삼고 안창호, 이동녕, 이승훈 등이 비밀리에 조직한 항일단체) 회원들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고문한 사건이다.
1910년 12월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북지방을 순방할 때 그를 암살하려 했었다고 억지 주장한 총독부 신민회원들과 안악군을 중심으로 황해도 일대의 지식층과 재산가 600여 명을 검거했다.
105인 사건으로 체포된 인사들 중에는 김구(金九), 김홍량(金鴻亮), 최명식(崔明植), 이승길(李承吉), 도인권(都寅權), 김용제(金庸濟), 이유필(李裕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와 면학회(勉學會)를 중심으로 애국계몽과 구국운동에 헌신한 독립지사가 대부분이다. 이후 일본 경찰은 거짓 자백을 받기 위해 고문을 자행했다. 이를 통해 600명 중 123명을 혐의자로 기소했고, 20회의 재판이 진행된 상황에서 105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면서 ‘105인 사건’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정상호씨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있고, 이 같은 사실이 <백범일지>에도 나온다고 했다. <백범일지>는 한국의 청소년들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힌 책이다.
기자의 서고에 꽃혀 누렇게 변한 1983년 발행된 7판 <백범일지>(1979년 초판 발행)를 뒤져보니 162쪽에 정달하(鄭達河)라는 이름이 들어있었다.
“이번 통에 잡혀온 사람들은 황해도에서 안명근을 비롯하여…, 재령에서 정달하, 민영룡, 신효범, 안악에서 김홍량, 김용제, 양성진, 김구…, 경성에서 양기탁, 김도희, 강원도에서 주진수, 함경도에서 이동휘가 잡혀와서 다들 유치되어 있었다.”
이름도 쟁쟁한 60여명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11번째로 거명된 ‘정달하’는 177쪽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에서 1년을 선고받은 6명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었다. 김구 선생은 양기탁(주범), 김홍량 등과 함께 같은 보안법으로 2년을 선고 받았고, 앞서 강도범으로 15년을 선고 받은 터였다.
정달하에 대한 기록은 1989년에 발행된 <원본 백범일지> 190쪽과 208쪽에도 같은 내용으로 각각 나와있었다. 정상호씨는 출판 연도를 알 수 없는 다른 <백범일지> 200쪽에도 할아버지 ‘정달하’에 대한 기록이 나와있다며 기자에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복사본으로 이를 확인해 주었다.
독립운동가 정달하에 대한 기록은 구글, 네이버, 다음 등의 검색에서 <백범일지>의 기록이 중복되어 나타난 것 외에는 발견할 수 없었으나, 역사학자이자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정운현(이낙연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씨의 글에서 기적 처럼 발견하였다. 기자가 오래전 오려 두었던 그의 ‘역사에세이’에서 였다.
“국권회복 운동에 거금 3천원 기탁한 정달하”
정운현은 지난 2011년 백범의 친구이자 변절 친일파 김홍량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독립기념관에서 구축한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의 기록을 인용했는데, 그 가운데 정달하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정달하(鄭達河)와 함께 안동현(安東縣)에 이주하여 이곳에서 농업과 무역회사를 공동 경영하면서 이곳에 독립군 기지와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한국 청년들을 훈련시켜서 독립 전쟁을 일으켜 국권 회복을 이룩할 준비로서 1910년 12월 김홍량이 8500원, 정달하가 3000원을 내고 본격적 준비를 진행하였다.”
위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에 토대하여 좀더 풀이하면,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안악읍에 양산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한 김홍량이 양기탁, 안창호 등이 주동이 되어 결성한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를 만들 때 만석꾼 정달하로부터 3000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민속문화대백과사전 등에 따르면, 당시 경인선 여객 운임이 1등석 1원 50전, 보통학교 수업료 1원(1919년), 보통 사람 하루 생활비 5∼20전(1925년)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재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정달하가 기부한 금액은 최소 수억에서 수십억원에 해당한다.
독립운동가 정달하에 대한 족보 기록은 정상호씨가 보관하고 있는 호적 등본에 잘 나와있다. 호적 등본에는 출생연도가 나와 있지 않으나, 1800년대 중 후반(1850~1870년) 출생으로 짐작되는(정상호씨 추정) ‘재령 사람’ 정달호는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고, 그의 둘째 아들 정선규의 2남 5녀 가운데 차남이 정상호씨이다.
▲ 용산구청이 발급한 정달하(鄭達河) 선생 호적 등본. ⓒ정상호 |
할아버지와 1년을 함께 산 정씨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정달하는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늘 성경을 끼고 사는 분이었다. 정달하는 초시에 합격하여 보통의 양반 가문 자제들이 꿈 꾸는 출세의 가도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으나, 막 외세가 밀고 들어오던 조선 말엽은 청년들의 꿈을 뒤틀어 놓았다.
특히 정달하의 삶의 본거지인 황해도 재령과 안악 지역은 구한말과 일제 초기에 양산학교를 중심으로한 교육구국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고, 정달하로 하여금 자연스레 독립운동 그룹에 합세하게 만들었다. 일찍이 받아들인 기독교와 신학문의 영향이기도 했다.
정상호씨는 양조장을 운영하며 지방 토호였던 할아버지가 <백범일지>와 독립운동사에 족적을 남길 만큼 삶을 바쳤으나, ‘재판 기록이 없다’며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크게 아쉬워 하고 있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 이기붕 단죄한 독립운동가 후손
정씨는 플로리다 북동부 잭슨빌에서만 무려 47년 간 의사로 지냈다. 그 가운데 36년 동안 누구도 들락거리기를 꺼려 하는 45번가 ‘잭슨빌 할렘’에서 의술을 펼쳤고, 그 지역에서는 ‘살아있는 슈바이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흑인들은 먼 발치에서도 금방 그를 알아보고 “하이, 닥터 정!” 하며 인사를 한다. 그 지역 주민들 가운데 닥터 정의 손을 거쳐가지 않은 흑인 가정은 드물다. 4대째 그의 치료의 손길을 거쳐간 흑은 가정도 한 둘이 아니다. 이 경력으로 LA한인폭동 당시 들썩이던 지역 흑인 민심을 달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사실도 널리 잘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 할아버지를 둔 정씨의 이력 속에는 의사로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 외에도 젊은 시절 한 때 ‘사회를 구하는 일’에도 나선 것도 눈에 띈다. 그는 부패한 사회가 신음하고 있던 시절, 역사적 부름에 팔을 걷고 나선 열혈 학생이었다.
때는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로 온 대한민국이 들끓고 있던 시기였다. 3월 26일 담화 발표가 있고 나서 4월 21일 발포로 시위 주춤했고, 27일쯤 운동권 학생들이 부정선거 원흉 이기붕 체포 작전에 들어갔다. 학생들이 이기붕의 사저를 밤새 돌다가 관저 담을 넘어 들어갔는데, 당시 전위에 선 학생들 가운데 하나가 의대생 정상호였다.
그날밤, 정씨는 뜻밖에 역사적 ‘문건’ 하나를 건져낸다. 이기붕의 부인 박 마리아의 쫄쫄이 신발이 나딩굴던 집안 한켠에 비단 필 등 축재한 물품들이 쌓여있었다. 데모대들이 그걸 펼치며 불을 붙였는데, 그 불이 서소문밖 농협건물까지 이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도망치던 이강석의 파커를 발견했는데, 뭔가 떨어져 주어보니 글귀가 적힌 두루마리였다. 놀랍게도 경자년 새해에 이기붕에게 세배차 방문한 412명의 명단과 물품 목록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정씨가 수확한 이 ‘문건’은 다음날 눈치빠른 기자에 낚여 1면 기사로 대문짝만하게 올려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정씨는 당시에 주은 자료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정씨는 데모가 끝난 후, 세배자 명단에 들어있던 여운홍(몽양 여운형의 동생으로 당시 자유당 선전부장)이 참의원에 출마하려고 한 사실을 알게된다. 격분한 정씨가 연락을 취해 “당신은 독재세력의 주구 가운데 하나로 학생들의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한 장본인인데, 어찌하여 그 피를 이용하여 출세하려 드는가”라며 질타했고, 놀란 여운홍의 측근들이 그를 만나 회유를 시도했다고 한다.
정씨는 그 당시를 회고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평소 왠만한 일에 별 말씀이 없고 칭찬도 없으시던 아버지가 아들의 의거에 손을 부르르 떨며 “잘했다! 잘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한다.
▲ 정씨는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 할아버지의 성정을 물려받은 탓인 것 같다”며 1960년 3.15부정선거 시위 당시 이기붕씨 관저 담을 넘었던 사실을 털어놨다. ⓒ 김명곤 |
그의 ‘운동’ 경력을 듣다보니 ‘독립운동가 정달하’의 얼굴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민족의 정기’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불의, 불합리에 대한 항거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그와 그의 할아버지는 ‘통’한다.
정씨는 최근까지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친일파의 국립묘지 안장에 대해 서릿발 같은 비판을 쏟아내며 인터뷰 말미를 무겁게 장식했다.
“친일파들이 국립 현충원에 묻힌 것은 도둑놈 심보입니다. (후손들이) 얼마나 양심에 찔리며 불안하겠습니까. 양심이 살아있다면 거기서 나가야 합니다. 본국 가서 보니 자격 없는 사람들이 이 사람 저사람 찾아다니며 서명 받아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인정받는단 얘기 듣고 정말 충격 받았어요.이래저래 구차해서 단념하고 돌아왔습니다. 할아버님에게는 참 죄송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