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해당국가가 없는 경우, 기타에 올려주세요. (5회이상 등록시 카테고리별도 부여)




겸손과 성실로 걸어온 고독한 길

- 박현 선생을 추억하며 -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운명을 안고 태어나 제각기 자기만의 길을 간다. 그 길이 험난하든 평탄하든, 높은 낮든, 혹은 밝든 어둡든 어느 누구도 대신해서 걸어주지 못한다. 감히 이 세상에 어느 누가 남의 운명 길을 대신 걸어줄 수 있으랴! 그래서 세상에는 살아가는 사람 수만큼 다양한 길이 있고 각각의 길마다 그들만의 독특한 사연과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마치 화사한 봄날에 피어난 크고 작은 꽃들이 온 세상을 갖가지 색깔로 가득히 물들이듯이…

피어난 꽃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모양과 색깔이 화려하여 멀리서도 환히 잘 보인다. 하지만 드문드문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다소곳이 피었다가 이내 져버리는 꽃들도 있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잠깐 무대에 올라와 주연배우를 돋보이게 해주고는 곧바로 퇴장해버리는 조연배우를 보는 것처럼 쓸쓸하다. 그러나 조연은 조연 나름대로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이 있는 만큼 그를 주연배우와 결코 비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인간적인 눈으로 본다면 오히려 조연이 주연보다 훨씬 더 고귀한 가치를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조연배우가 자기가 절실히 받고 싶어 하는 관객들의 관심과 사랑을 주연배우에게 되돌려줌으로써 이기심 없는 사랑과 헌신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더 깊은 눈으로 들여다보면 인생이라는 연극무대에서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하나의 연극을 완성하기 위해 같이 협력하고 같이 고민하고 함께 울고 웃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이자 작가, 기자이자 방송인이었던 박현 선생이 바로 이와 같은 조연배우의 삶을 사신 분이다. 그분은 평생을 화려한 인생무대의 뒤편에서 묵묵히 자기 길을 걸었으며 그 길을 늘 겸손과 성실로 채웠다. 그러다보니 그분의 역할이 그리 돋보이지 않아 생전에는 당신의 가치를 온전히 평가받지 못했고, 비록 지인들 사이에서는 늘 생생히 기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에는 세인들의 뇌리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하지만 누군가의 이름은 사라질지라도 그가 남긴 자취는 변함없이 남아 세인들에게 궁금증을 안겨주는 법이다. 이제라도 그분의 행적을 밝은 빛 아래 드러내 정당하게 평가해드려야 한다. 너무 늦지 않도록!

본명이 박영준인 박현 선생은 1936년 평양에서 남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느 아이들처럼 꿈을 키우며 유년기를 보냈고 누구보다도 착실하게 학교에 다녔다. 소년 박현은 유독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일반학교를 졸업한 뒤 꿈을 찾아 자연스럽게 평양문과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생으로서 문학의 이론과 실재를 배우며 작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갔고 1963년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청년 박현의 가슴은 작가가 될 사명으로 불타올랐다.

헌데 운명의 여신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무슨 변덕을 부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여신이 우리 앞에 나타나는 순간, 기존의 우리의 삶은 송두리째 부정되거나 사정없이 내팽개쳐지며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만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학교 졸업 이듬해 박현에게도 일생일대의 감당할 수 없는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졸지에 가족과 함께 함경북도 아오지 탄광으로 강제추방 되었던 것이다. 박현은 꼭두벼랑으로 내몰렸고 작가로서의 꿈은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버렸다. 당장 육체적 생존도 언제 끝장날지 모를 판이었다. 청년 박현은 두만강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하여 그곳으로 추방되어 들어온 같은 처지에 처한 사람들 중 한 젊은이와 의기투합하여 1차 도강을 시도했다. 그러나 준비부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박현은 다시 강물의 흐름과 강의 폭과 깊이, 날씨 등을 세심히 살피고 비가 내리던 1965년 캄캄한 어느 늦은 봄날 감시를 따돌리고 2차 도강을 시도해 성공했다. 이로써 그는 완전히 다른 인생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 소련에서 정치적 망명을 허가받았다. 이듬해에는 사할린으로 파견 받아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서 두 번째로 운명의 여신을 만났다. 이번에는 여신이 웃음을 지었고 그에게 커다란 복을 안겨주었다. 사할린에서 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 직장에서 일하던 우경란의 삼촌 되는 분이 그의 성실성과 사람 됨됨이에 반하여 조카와 짝을 맺어준 것이다. 그렇게 우경란(나중에 남편 성을 따라 박경란이 됨)과 백년가약을 맺은 박현은 남들이 두고두고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되어 아내를 평생 살뜰히 사랑하며 살았다. 박현과 박경란의 금슬이 얼마나 살갑고 애틋했는지는 지금도 지인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몇 해 후 박현은 새로운 직장을 찾아 흑해연안 크라스노다르로 이주했다. 그곳은 기후가 좋고 경치가 아름다워 박현부부에게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세상시름 다 잊고 좋은 이웃들과 어울리며 일생을 편안히 살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런 바람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인데 평생을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헌데 그런 삶이 과연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년전부터 소련 고려인 한글신문 <레닌기치>사에 들어가 일하던 사할린 출신 지인들에게서 같이 일해보자는 연락이 계속 오곤 했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곳을 떠나기 싫어 많이 망설였지만 꿈을 펼치고 뜻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제안에 박현은 결국 마음을 돌렸다. 그리하여 그는 1974년에 카자흐스탄 서부도시 크즐오르다에 있는 레닌기치 신문사 문예부 기자로 입사하였다. 크즐오르다는 크라스노다르에 비해 자연환경이 척박하고 기후가 몸에 맞지 않아 적응하는데 한동안 애를 먹었지만 그는 신문사에 들어감으로써 바라고 바라던 문학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다행히 4년 후 신문사가 수도 알마아따로 이전한 덕분에 그는 좀 더 마음에 드는 환경에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박현의 창작활동은 그러나 바로 시작되지는 않았다. 신문사에 투고된 선배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연구하며 소비에트 고려인 문학의 흐름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우선 그가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박현은 오랫동안 레닌기치 문예페이지 란에 실린 글들을 교정, 교열, 편집하는 일을 도맡았다. 그건 평양에서 전문문학교육을 받아 뛰어한 모국어 실력을 갖춘 인재를 알아본 선배기자들이 계속 그곳에서 일하도록 그를 붙들어둔 탓도 있다. 그래서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1970년대 후반부부터 1980년대 중반부까지 <레닌기치> 문예페이지 란에 실린 작품들의 상당수는 박현의 꼼꼼한 교정에 힘입어 세련된 문학적 표현이 살아난 글로 탈바꿈되었던 것이다. 긴 시간에 걸친 그의 세심하고도 숙련된 손길이 없었더라면 그 시기에 문예페이지 란에 실린 작품들 중 적지 않은 것들은 수준 이하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박현의 손길을 거쳐 레닌기치 문예페이지의 주연배우 중 하나로 떠오른 고려인작가가 있는가 하면 모국어 표현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은 작가도 있었다. 박현은 다수의 러시아어 작품이나 노래가사도 번역하여 실었다.

이렇듯 박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특유의 성실함과 겸손으로 양지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한 어떠한 보상이나 인정도 요구하지 않았다. 조국에 있었으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를 목숨을 소련에서 건져 제2의 인생을 사는 만큼 소련 땅에서 사는 삶을 덤으로 생각하고 늘 감사하며 살았기에 그랬을 것이다. 친척이나 피붙이 하나 없는 땅에서 걸어간 길은 늘 고독했지만 그는 그걸 변함없는 성실과 겸손으로 채워 빛나는 길로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점차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창작활동을 개시했다. 대학에서 시문학을 공부했던 만큼 그는 꾸준히 시를 써서 신문에 투고함으로써 작가의 탄생을 조용히 알렸다. 그는 넘치는 열정으로 다작을 하는 시인은 아니었지만 중단 없이, 굴곡 없이, 소박하게, 꾸준히 시를 써나가는 작가였다. 그렇게 쓴 시들이 하나둘 모이고 모여 어느덧 고려인 공동 시작품집 『해바라기』(알마아따, 사수싀, 1982)와 『꽃피는 땅』(알마아따, 사수싀, 1988)에 다수가 선정되어 실렸다. 또 한국인 최초로 김연수 교수가 펴낸 고려인 공동시집 『치르치크의 아리랑』(서울, 인문당, 1988)에도 십여 편이 수록되어 실렸다. 말년에는 평생 소원이던 개인시집을 고국에서 간행하는 기쁨도 맛보았다. 1997년 여름 한국에서 『꼴호즈의 들길에서』(의성출판사)란 박현 개인시집이 나온 것이다. 박현은 다른 욕심은 없었으나 평소 본인이 쓴 시집 한 권을 손에 쥐고 묘지에 누울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노라는 소박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안 한국의 지인 몇 분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그는 결국 소원을 이루었다.

박현은 1984년 카자흐스탄공화국 국영방송사 고려말 라디오 방송국 해설위원으로 입사하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고려인들에게 우리말 방송을 내보내는 일을 하였다. 그는 틈만 나면 구소련 고려인 작가나 운동선수나 사회일꾼들을 찾아다니며 방송취재를 했고, 한국인이 소련에 들어오기 시작한 1989년부터는 여러 한국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인터뷰를 받아 카자흐스탄 전역에 퍼져 사는 고려인들에게 육성으로 널리 소개했다. 그는 진정 소련 ‘기자의 노래’에 나오는 바대로 “우리는 한 줄의 진실을 찾아 사흘을 걷고 사흘 밤을 새웠다.”라는 경구를 몸으로 실천한 기자였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을까!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운명의 여신이 그 앞에 세 번째로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이후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이어가던 그에게 여신은 어떤 깨우침을 주려고 그랬을까? 두 번째와 달리 이번에는 그 얼굴에 미소가 보이지 않았다. 박현은 1991년 늦가을 한 학술기관에 초대받아 아내와 함께 한국에 들어갔다가 불시에 병을 얻고 말았다. 서울에 있는 한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양쪽 신장의 기능이 거의 멈춰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신체조직과 맞는 신장을 기증받아 이식받기 전까지는 정기적인 혈액투석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한국 지인들의 도움으로 몇 달간 치료를 받다가 나중에 알마아따로 돌아와 오랜 투병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다행히 1994년에 하늘의 도움으로 신장이식수술을 받았고 수술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가 수술을 받은 후 4년 반의 시간만을 지상에 더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고 이 비밀은 그의 사랑하는 아내만이 속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방송 일과 나중에 다시 시작한 신문사 일에 땀방울을 흘렸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후에는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방송국 고려말 라디오 해설위원으로서 방송을 내보내는 일과 고려일보 문예부 기자로서 고려인들의 문예작품을 심사, 선정, 편집하는 일에 열정과 정성을 쏟았다. 이는 그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마지막 몸짓이었다.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60주년을 맞이한 1997년! 박현은 기자로서 그 해를 뜻 깊게 마무리하고 마감 달에 심한 감기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듬해 1월 7일 운명의 여신이 그의 수고로운 영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거두어들인 것이다. 더없이 성실한 인생무대의 조연배우 박현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우리들에게 가득 남겨주신 채.(김병학)
  • |
  1. 박현1.jpg (File Size:601.2KB/Download:102)
  2. (File Size:439.5KB/Download:439)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pinterest kakao story band

  • 김성곤 · 새정치민주연합 재외동포위원장 file

    특별 인터뷰 | 김성곤 · 새정치민주연합 재외동포위원장 “달라스 총영사관 승격 위해 노력하겠다” 재외선거 참여방법이 간소화됐다. 무엇보다 ‘유권자 등록’과 ‘투표’를 위해 두 번에 걸쳐 공관을 방문해야 했던 번거로움이 해소돼, 해외동포들의 선거율 제고에 지렛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8일(금) 달라스를 ...

    김성곤 · 새정치민주연합 재외동포위원장
  • "복수국적 확대 기대" 조규형 재외동포재단이사장 file

    <사진 설명: 조규형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이민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 “재외동포 인재들의 국내 유치를 위해 복수국적 확대를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나올 것입니다.” 세계한인언론의 구심체인 재외동포언론인협회(재언협)가 2015 재외동포언론인대회(4월22일-28일) 개최를 기해 재외동포재단의 조규형 ...

    "복수국적 확대 기대" 조규형 재외동포재단이사장
  • 달라스 경찰국 김은섭 민원홍보관 file

    달라스 경찰과 동포사회의 징검다리 역할 마다하지 않아 지난 10년간 달라스가 전국 범죄율이 1위여서 이를 줄이려고 달라스 경찰국은 10-70-20 운동이 펼쳐졌다. 10-70-20의 10은 모든 일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시민이고 70은 방관하는 시민, 20은 범죄 가능성이 농후한 시민을 일컫는 말로, 10%를 동원해서 70%를 끌어들여...

    달라스 경찰국 김은섭 민원홍보관
  • 달라스에서 한국 전통 문화예술 전파 앞장서는 무용가 박성신씨 file

    (달라스=뉴스넷) 김선영 기자 = 문화의 불모지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달라스 한인타운에서 요즘 한국 전통문화의 열기가 일고 있다. (사)한국국악협회 미 중남부지부 창단 축하를 위해 27일(금) 열리는 국악축제가 그 열기의 중심에 있고, 바로 이 열기를 주도하는 인물이 박성신씨다. 이번 행사는 중요문화재로 지칭될 정...

    달라스에서 한국 전통 문화예술 전파 앞장서는 무용가 박성신씨
  • [인터뷰 : 정외영 KOTRA 알마티무역관장] file

    “위기는 기회의 다른 이름…., 현지진출기업들을 위한 활동 늘릴 터” 루블화 폭락과 국제유가의 하락으로 인해 현지 진출 기업이나 교민들은 그 어느 해보다도 불안한 마음으로 연말 연시를 보냈다. 어느듯 1월이 지나가고 2월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러한 위험 요인들은 해소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

    [인터뷰 : 정외영 KOTRA 알마티무역관장]
  • “총영사관 승격을 기념하고 교민화합을 위한 중앙아시아 클래식 ... file

    [신년 특별 시리즈 '한인단체장들과 오피니언 리더들의 새해 설계' - 1 : 조성관 한인회장 ] “총영사관 승격을 기념하고 교민화합을 위한 중앙아시아 클래식 음악회 개최할 터” 한인신문문제, 소위원회 구성과 공청회 통해 교민의견 수렴해서 결정 을미년 새해를 맞아 본지에서는 카자흐스탄 한인단체장들과 오피니언 리더...

    “총영사관 승격을 기념하고 교민화합을 위한 중앙아시아 클래식 음악회 개최할 터”
  • 한.뉴 무역동반자로 중요한 파트너쉽 유지하게 될 것 file

    김해용 신임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가 지난 12월 3일 뉴질랜드 정부에 신임장을 제출하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특명전권 대사로서 본격적인 외교활동에 들어갔다. 김 신임 대사는 본보 굿데이 신문과 가진 대사관 청사 인터뷰를 통해, "한.뉴 양국은 이제 FTA 체결국가로 외교적, 무역적 동반자로 국제무대에서 서로에게 중대...

    한.뉴 무역동반자로 중요한 파트너쉽 유지하게 될 것
  • 황무지에 자연재배 꾸지뽕 농원을 일구다

    황무지에 자연재배 꾸지뽕 농원을 일구다 전라남도 보성군은 천혜의 관광자원을 지닌 낙원으로 예로부터 산, 바다, 호수가 잘 어우러진 '3경 3향(의향, 예향, 다향)'의 고장이다. 최근 보성 녹차 밭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서편제로 유명해 진 곳이기도 하다. 율포에서 득량만 해안 도로를 따라 4분 정도 달리면 바다 맞은 ...

    황무지에 자연재배 꾸지뽕 농원을 일구다
  • 전남 보성군수 인터뷰

    군민 행복 시대를 기약하는 전남 보성 이용부 군수와 함께 보성의 녹차 향을 느껴본다 예로부터 의향 (義鄕)·예향 (禮鄕)·다향 (茶鄕) 등 3보향 (三寶鄕)으로 불려온 전라남도 보성은 전국 차 생산량의 34%를 차지하고 있어 녹차 최대 생산지로 우리 국민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인구는 갈수록 감소해 벌교읍까지 모두 ...

    전남 보성군수 인터뷰
  • “천상의 악기 '생황’ 연주자” 김효영 file

    국악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시점에 김효영씨는 한국인에게 조차 생소한 생황이란 악기로 한국의 전통음악을 알리고 있다. 얼마 전 서울정원에서 열렸던 한가위축제 전야제 행사 때 독특한 모양과 신비로운 음색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생황’은 피아노 바이올린 등 서양의 클래식 악기와도 멋진 하모니를 이루어 낸다...

    “천상의 악기 '생황’ 연주자” 김효영
  • 재미화가 유수자 씨, "예술은 흐르는 물과 같이" file

    청명한 색감과 살아있는 듯 생동감 넘치는 붓 터치, 움직이는 입체화 같은 느낌들이 마치 현대적 인상파라는 수식어가 떠오르게 한다. 워싱턴에 거주하는 재미작가 유수자(바르바라 한) 화백이 개인전을 위해 파리를 찾았다. 유 작가는 과거 언론사 사진기자 출신답게 주변의 사물을 재빠르게 캐치하는 능력이 있다. 젊은 ...

    재미화가 유수자 씨, "예술은 흐르는 물과 같이"
  • [인터뷰 : 김종일 신임 알마티한국교육원장] file

    “한국어교육의 내실화에 중점 두겠다” 92년, 카자흐스탄 교육부차관 초청으로 첫 방문 카자흐스탄은 제2의 고향과 같은 곳, 마지막 인생의 의미를 이곳에서 찾고 싶어 이 땅에 한국교육원이 진출한 지 24년이 된 올해, 새로 부임한 김종일 알마티한국교육원장은 지금이야 말로 한국어 교육의 양적 성장보다 질적인 발전을 ...

    [인터뷰 : 김종일 신임 알마티한국교육원장]
  • [인터뷰] 재외동포언론인 협회 김훈 신임 회장 file

    재외동포언론인 협회 김훈 신임 회장 [인터뷰] 재외동포언론인 협회 김훈 신임 회장 재외동포언론인협회(이하재언협)가 지난 달 22일 대구수성관광호텔에서 정기총회를 열어 5대회장을 선출했다. 재언협은 재외동포언론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는 단체로 지난 4월 20일부터 25일까지 서울과 대구에서 13회 재외동포언론인대회...

    [인터뷰] 재외동포언론인 협회 김훈 신임 회장
  • 21세기 세계초일류 융복합 연구중심대학 DGIST 신성철 총장으로부...

    21세기 세계초일류 융복합 연구중심대학 DGIST 신성철 총장으로부터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새로운 교육 철학을 듣는다 신성철 총장님에 대한 인터뷰 내용의 용량이 너무 커서 기사를 올리기가 어렵습니다. 내용중에 유로저널이라는 말이 있는 데 그 부분만 수정해 회원사들이 알아서 회원사 인터뷰로 게재해 주었으면 합니다...

  • [사람, 사람들] 태권도 68년 외길인생, 이준구 그랜드 마스터 file

    이준구 선생 “태권도 철학은 현실을 살아가는 데 나침반과 같아…” -7번째로 방문한 카자흐스탄,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에 감탄 - 지난 11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시 ‘인테르팍스’ 통신사 기자회견장. 우리에게는 전 헤비급 세계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에게 일명 '액큐 펀치'라고 불리는 주먹 쓰는 법을, 무술인이자 영화배우인 이...

    [사람, 사람들] 태권도 68년 외길인생, 이준구 그랜드 마스터
  • 이종국 회장 조선일보 인터뷰 file

    2014 재외동포언론인대회 이종국회장 조선일보 인터뷰 입니다

  • 박현 선생 회고 글 file

    겸손과 성실로 걸어온 고독한 길 - 박현 선생을 추억하며 -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운명을 안고 태어나 제각기 자기만의 길을 간다. 그 길이 험난하든 평탄하든, 높은 낮든, 혹은 밝든 어둡든 어느 누구도 대신해서 걸어주지 못한다. 감히 이 세상에 어느 누가 남의 운명 길을 대신 걸어줄 수 있으랴! 그래서 세상에는 살...

    박현 선생 회고 글
  • 우리의 영원한 친구, 윤항기 가수와 함께

    우리의 영원한 친구, 윤항기 가수와 함께 흰눈이 내리는 남산자락에서 행복한 취재 시간을 가지다 70년대 통기타 시절부터 우리 한국 가요사에 주축이 되어온 윤항기,송창식,서유석,이장희,어니온스,김정호 등등 셀 수 없는 많은 가수들은 지금도 그 시절을 살아온 이들은 물론이고 현재의 젊은 세대들까지 그들을 기억하게 ...

    우리의 영원한 친구, 윤항기 가수와 함께
  • 손차룡 화백, 옹플뢰르의 백조가 되어 날아 오르다 file

    파리에서 서쪽으로 190Km 떨어진 칼바도스 주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옹플뢰르. 지금은 작고 조용한 항구지만 한 때는 프랑스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시다. 15세기 백년전쟁 때는 요새화된 전쟁의 전초기지로, 그 후엔 신대륙을 찾아나서는 탐험가들의 전진기지였다. 지금은 그 모든 영화를 뒤로 한 채 한가로이 요트...

    손차룡 화백, 옹플뢰르의 백조가 되어 날아 오르다
  • 김문수 경기도지사를 만나서 대한민국에서 예측 가능한 정치를 ... file

    김문수 경기도지사를 만나서 대한민국에서 예측 가능한 정치를 듣는다. ◆1951년 경북 영천 출생 영천 초, 경북 중,고등학교 졸업 ◆1970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 입학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 후 산업현장에 투신하여 시민·노동운동 전개 ◆1978년 전국금속연맹 도루코노조위원장 선출 ◆1985년 전태일기념사...

    김문수 경기도지사를 만나서 대한민국에서  예측 가능한 정치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