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생 2모작이란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고령화 시대와는 다르게, 젊은 나이에 자신의 믿음을 실현하고자 의욕적으로 2모작에 도전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용감하게 모험하는 사람들이 있다. 파리에 와서 인생 3모작을 준비하고 있는 이미애씨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 프랑스에는 언제 오셨나요?
2009년 그르노블에서 8개월 과정의 어학과정을 위해 처음 도불했습니다. 이 과정을 끝내고 어디서 박사과정을 해야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논문 주제와 맞는 교수를 찾아야 했으니까요. 결국은 르아브르 대학의 교수를 찾게 되어 파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르노블은 관광의 도시이자, 은퇴한 노인들이 안락한 삶을 위해 사는 도시예요. 소득수준이 높은 도시이면서 사회적인 움직임이 없는 도시라 제가 공부하고자 하는 이유와 맞지 않았어요.
● 대학은 르아브르인데 파리에 사는 특별한 이유는?
제가 지금 준비 중인 논문이 파리, 서울, 북경, 청도와 같은 대도시에서 일하는 중국 조선족 이주 가사노동자에 관한 것이에요. 그래서 학교가 멀지만 파리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학교도 그렇고, 일을 찾기에도 파리가 좋아요.
저는 이혼 후 14살인 아들과 둘이 살면서 생계를 위해 과외부터해서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 중이예요.지금은 박사과정 6년차예요. 작년에는 아이에게 심하게 중2병이라 불리는 시기가 찾아와 논문을 쓰지 못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유난히 힘든 시간을 보내는 아이를 보면서 엄마 역할과 저 자신에 대해서도 돌아보면서 저도 많이 성장한 시간이예요. 지금은 저도 아이도 안정을 찾아 괜찮아요. 아이가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 많이 힘들어했어요. 낯선 환경에, 프랑스어도 못하니 그만큼 힘들었고, 담임선생님이 인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저도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하고, 일과 공부도 해야 하는 상황에 아이가 적응을 잘 못하니 마음 아픈 일들이 많았죠. 아이에게 미안했던 시간들이예요.
제가 이렇게 살아보니 이주 노동자에 대한 관심이 더 각별해졌어요.
● 중국 조선족 이주 가사노동자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50~60대 조선족 여성은 사회주의 체제를 살았던 사람으로 노동현장에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차이점을 알게 된 것이죠. 고용주와 고용인이 평등한 관계와 소위 말하는 갑을 관계의 차이라 보면 될 것이예요. 이 차이점은 한국이 ‘지덕체’ 라면, 이들은 ‘덕지체’에서도 드러나듯 기본적인 체계가 달라요. 젊은 조선족 여성들은 자본주의 체제도 접하면서 자라 조금은 달라요. 이런 차이점들을 보면서 자본주의 문제점을 짚어보는 거죠.
그리고 이들은 중국에서 한족이 아니라 소수민족(조선족)으로 산 소수자들이고, 세계 여러 곳에서 일하면서 늘 소수자로 살아요. 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용산 철거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곳에서 본 것이 소수자였어요. 공부하러 프랑스에 오니 소수자인 중국 조선족들에 더 관심을 가게 되었고요.
● 프랑스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프랑스는 홍세화씨의 책들을 읽으면서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로망이 생겼어요.
그리고 제가 사회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미셀 푸코, 피에르 부르디외와 같은 프랑스 학자들의 이론이 경험주의로,현실과 이론이 연결되어 프랑스 정책에 실행되고 있다고 생각했고요. 다양한 국가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은 나라로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도 맞닿았고요. 구체적으로 벨리브 정책이 실행되는 방식, 5년 만에 파리의 자동차를 줄이겠다는 정책이 이론이 아닌 현실에서 실현되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주변인으로, 소수자로 살아보고 싶었어요.
소수자로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 참 건방지고 오만한 생각이더라고요. 이주 노동자들과는 비교하는 것은 아니고요. 이주자로, 소수자로 살아서 알게 된 것들이 있는 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란 것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살았습니다.내 언어가 아닌 다른 나라 언어로 산다는 것은 언어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접근하는 일이 신생아와 같으니까요. 머릿속은 어른인데, 사는 일은 아이인 상태라고 할까요.
논문을 쓰는 일도 그랬어요. 프랑스에 와서 공부를 하려니 논문의 체계부터 모든 것을 제가 다 알아서 해야 하는 거예요. 정보망도 없고, 프랑스어 실력은 부족하고, 도움을 받을 만한 곳도, 사람도 없어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파리에 있는 연구소에 들어가 전보다는 쉬어졌어요.
이곳에 오니 프랑스의 내부가 보이고, 한국에 대해서는 제가 놓치고 보지 못하던 부분을 보게 돼요.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 거죠. 못 보던 것을 보니 새로이 보게 되고요. 나무만 보았다면 이제는 숲이 보이는 것이죠. 프랑스에 대한 로망은 깨졌어요. 곳곳에 있는 차별을 보고, 어두운 면을 많이 본 것이죠. 이민자 정책이 실패하는 만큼 이민자 교육도 퇴보하고 있는 중이고요.
제가 이처럼 사회 소수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국에서 일을 하면서 생긴 것이예요.
● 한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제가 91학번이예요. 중앙대학교 건축과를 나와서 건축 관련 일을 했어요. 건축 잡지에서도 일했고요. 35살에 같은 대학에서 문화연구과에서 석사과정을 마쳤고요.
건축과를 나와 일하면서 35살이 되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되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공부여야하고,일도 그런 일을 하되, 돈은 입에 풀칠 할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35살이 되는 해에 공부를 시작했지요.그 때는 사회 저변을 바꿀 수 있는 것이 문화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학교에 들어가는 해에 중앙대학에 문화연구과가 생겼어요. 이때가 참 힘들었던 시기예요. 이혼을 하게 되어 아이를 혼자 키어야 했죠. 생계를 위해 일도 해야 했고요. 전원주택 붐이 일기 시작하던 때라 부동산 개발회사에서 일을 하며 공부를 했죠. 모든 상황이 힘든데 공부도 생각보다 힘들었어요. 건축과는 공대라, 인문학을 하려니 쉽지 않았지만, 건축 일하면서 저절로 관심을 갖게 된 주택문제, 싱글맘으로 일과 생활에서 부딪히면 느낀 젠더문제 그리고 문화정책에 대한 관심이 조합되어 석사과정을 마칠 수가 있었죠. 일과 공부, 육아를 병행하면서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지만 씩씩하게 살았어요.
2008년 석사 끝나고, 희망제작소 프로젝트 보조연구원으로 일했어요. 도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간판 문화 개선에 관한 연구의 책임연구원으로 일도 했구요. 오세훈 전서울시장이 재직 하던 시절로 명품 서울을 만들겠다며 도시경관 개선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때였죠.
이 프로젝트는 서울에서 시작해 지방으로 퍼졌는데, 지방에서는 옥천이 첫 시작을 했어요. 지방세와 국세의 지원을 받아 40억이 투입되는 큰 프로젝트였어요. 옥천은 ‘향수’로 유명한 정지용 시인의 고향으로, 버려진 유원지를 활용하여 정지용 시인을 테마로 하여 예술 파크로 만들자는 취지였죠.
제가 참여할 때는 기획은 끝난 상황으로 실무팀으로 들어갔는데 관련법규 검토조차 되지 않았을 정도로 허점이 많았어요. 보기에만 좋은 아름다운 디자인에 치중해 옥천 주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방안은 없는 거예요. 그리고 기획을 할 때 향후 시뮬레이션까지 해보고 실무로 진행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으니 결국 실패한 프로젝트가 되었고요. 만 10개월 동안 일하면서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사회 변화에 기여하고 싶어 시작했던 공부와 일이었지만, 일하면서 본 세상은 부조리가 너무 많았어요. 보여주기 식의 실패한 프로젝트를 보면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내가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일해야 하는 내가 보인 거죠. 내가 추구하는 것과 내가 하는 일에 괴리감이 커서 결국은 그만두면서, 사회에 기여하고 싶어 뒤늦게 시작했던 일들이 물거품이 되니 상실감이 아주 컸어요.
제게 문화란 것이 말의 유희처럼, 환상처럼 실제적으로 사람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문화란 것은 추상적이고, 상업적이고, 공공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한계가 뚜렷이 보이는 것이었어요. 옥천 주민은 없는 한마디로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도시계획을 보면서 문화연구가 아닌 사회학적 접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회학 공부를 하자하고는 파리에 온 거예요.
● 지금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사회문제는 무엇인가요?
사생결단식을 하고 단식 중인 유경근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님이예요. 지난 6월 파리에 오셨을 때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유경근 집행위원장님과 윤경희씨를 알게 되었는데 그분들은 이때부터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이 아니라 개인의 인연이 되어 더 마음이 가요.
세월호 참사는 지금 박사과정 6년차라 빨리 끝내지 않으면 체류증에 문제가 생겨 논문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지만, 자원봉사자로 일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제게 큰 일이예요.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더 절실하게 공감이 되는 것 같아요.
집행위원장님이 8월 18일부터 단식을 시작했지만 여당이나 야당이나 당차원에서 논의가 되지 않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화가 나는 일이예요.
사생결단식까지 하면서 단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말이 돼요? 이번 총선으로 20대 국회가 여소야대가 되면서 세월호 피해자들과 국민의 기대가 컸잖아요. 8월 3일에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특별법 개정과 특검의결은 무시한 채 세월호 선체조사를 별도의 기구가 맡을 수 있다는데 야당이 합의까지 했어요. 지금 특별법 개정을 하여 실질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고, 세월호 선체조사를 특조위가 해야 하는 상황인데요.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단식을 통해 야당이 나서주어 세월호 참사 특조위 활동기간 보장과 특검 도입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농성을 시작했는데 아무런 논의가 없으니 어느 해보다 더운 여름에 단식을 해야하니, 슬프고 안타깝고, 화가 나고 힘이 드네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주고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서울, 파리, 북경, 청도에서 이루어진 조선족 이주자 인터뷰어들을 위해서라도 논문을 잘 마무리하고 싶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위해 인생항로를 바꾸어가면서 보다 나은 나를 향해 노력하며 사는 이미애씨와의 시간은 행복했다. 낯선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며,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그녀가 자원봉사자로, 참여와 연대를 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이미 그녀는 사회의 변화를 위해 직접적인 기여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녀의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 사람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이미애씨가 박사과정을 잘 마치기를 바라며, 그녀의 바람대로 세월호특별법 개정과 특검도입이 하루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한위클리 / 조미진 chomi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