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김 회장 인터뷰
미최초 동해병기법안 버지니아주 통과 주역
Newsroh=노창현기자 newsroh@gmail.com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 기획취재 시리즈>
2014년 3월 5일. 미주한인역사에서 드라마틱한 새 장이 열렸다. 버지니아주에서 공립학교 교과서 및 지도에 ‘동해(East Sea)’와 ‘일본해(Sea of Japan)’를 병기(倂記)하도록 하는 법안이 주 의회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한 것이다. 주의회 상원과 하원에서 상정 후 교차 심의 표결이라는 전 과정을 완벽하게 마친 날이기도 했다.
마지막 단계였던 테리 맥컬리프 주지사의 서명(3월 30일)으로 귀결되기까지 동해병기 법안은 버지니아 15만 한인들의 노력과 250만 미주한인들, 모국의 한겨레 모두가 빚어낸 소중한 결실이었다.
미 역사상 다른 나라의 영토 영해의 명칭과 관련된 법안을 통과시킨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동해병기 법안은 소수계 풀뿌리 시민운동의 모범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동해병기를 무력화 시키기 위해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 전문 로비회사와 계약하고 온갖 압력과 방해 책동을 벌였지만 버지니아 한인들의 힘으로 이를 분쇄(粉碎)하고 끝내 이뤄낸 개가이기 때문이다.
한민족 모두가 2천여년간 ‘동해’라고 불러온 바다가 이름을 잃게 된 것은 일제 식민치하였던 1929년 일본이 국제수로기구(IHO)에 일본해(Sea of Japan)를 등록하면서 부터다. 미주한인들이 ‘동해(East Sea) 명칭을 미국인들에게 알리기 위한 노력이 공식화된 것은 2007년 워싱턴 DC에서 대한민국 사단법인 ‘동해 연구회’가 포럼을 개최한 것이 처음이다.
당시 포럼에 참석했던 한인 중 한 명이 버지니아주 공립학교 교과서에 ‘동해’ 대신 ‘일본해’만 표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시정하기 위해, 버지니아주 33지역구의 주 상원의원인 데이브 마스덴 의원을 찾아가 버지니아주 교과서에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마스덴 상원의원은 버지니아주 교육위원회에 확인을 요청했지만, 답을 받지 못하고 유야무야(有耶無耶) 됐다.
이후 미주한인단체를 중심으로 ‘동해’를 되찾아오기 위한 시민운동이 버지니아, 뉴욕, 뉴저지, 캘리포니아 등 여러 주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자 2011년 8월, 미 국무부는 “미국 정부는 ‘일본해’ 단독 표기를 인정한다”는 공식 발표 하기에 이르렀다.
데이브 마스덴 상원의원은 2011년 11월 재선에 성공한 후 4년전 ‘동해’에 대한 한인의 부탁을 잊지 않고 투표해준 한인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동해병기법안’을 상정(上程)하게 됐다. 이듬해 상원 의회에 상정된 법안은 일부 의원들의 반발로 온라인 교과서에만 동해 병기를 적용하는 내용으로 수정됐다. 첫 관문인 상원 교육위원회에서 찬성 4, 반대 2로 통과됐지만 곧이어 열린 상원 교육위 대위원회에서 7대8로 부결, 본회의 상정 자체가 좌절됐다.
그러한 것을 다시 되살릴 수 있었던 불씨는 그해 봄 시작된 백악관 청원운동이었다. 그로부터 약 1년간 버지니아 한인들은 끝없는 가시밭길을 거치며 주의회 공략이라는 타겟을 잡았고 법안 상정부터 상하원위원회와 본회의 등 총 9차례의 고비가 있었지만 놀라운 유권자의 파워로 일본 정부를 완벽하게 물리쳤다. 이 모든 과정을 이끌어온 주인공이 바로 미주한인의목소리(VoKA)의 피터 김 회장(58)이다.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성산초등학교와 수송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족과 함께 버지니아 리치몬드로 이민왔다. 미국에서 고교 졸업 후 버지니아 사관학교에 진학한 그는 미 공군 장교로 임관해 8년간 복무한 후 대위로 전역했다. 국방 관련 회사와 법률 사무소 등에서 근무하던 그가 ‘동해 병기’ 캠페인의 선봉에 서게 된 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었다.
모국인 대한민국을 떠나 미국 시민으로 살고 있는 미주 한인이 왜 대한민국의 ‘동해’란 바다 이름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 ‘동해 병기’ 시민운동을 전개했을까? 한인들의 자발적인 힘만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도움 없이 어떻게 일본 정부를 상대로 완승(完勝)을 거둘 수 있었을까? 피터 김회장의 인터뷰를 통해 동해병기와 관련된 각종 비화를 들어보고 앞으로의 과제를 진단해본다.
- 동해병기운동을 우연한 계기로 하게 됐다고 했는데 어떤 내용인가
“2012년 2월 그는 지인의 부탁으로 버지니아 한인회의 취업 박람회 행사를 총괄하기 위해 행사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미국 교과서에 일본해만 표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됐다. 처음에는 믿을 수조차 없었지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통해 여러 차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아들에게 물었다. ‘크리스, 너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를 아니?’ ‘네, 아빠.’ ‘그 이름이 뭐니?’ ‘일본해죠.’ 그 순간 아들에게 버럭 화를 내며 혼을 냈다. ‘일본해라니 무슨말을 하는거야? 그 바다 이름은 ‘동해’야. 어째서 동해를 일본해로 아는거니?’ ‘아빠!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고 지도와 교과서에도 표기돼 있는데 왜 나를 혼내?’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지도와 교과서에 우리 바다가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큰 충격에 빠졌다. 당연히 있어야 할 ‘동해’ 대신에 ‘일본해’만이 남아 있다니.. 그리고 그런 사실을 미국에서 살아온 35년간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다니… 분노가 끓어올랐다.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고 아들에게 창피스럽기까지 했다. 한동안 충격에 빠져있다 결심을 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동해’ 이름을 되찾아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만큼은 올바르게 배울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말이다.”
- 그래서 2012년 백악관 청원운동을 시작한건가
“그것도 우연이다. 먼저 어떻게 하면 우리의 ‘동해’를 다시 찾아 올 수 있을까 고민하며 여기저기 접촉을 시작했다. Board of Geographical Names(BGN, 지명위원회)을 비릇해 여러 정부 기관에 연락을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느날 베트남 친구들과 저녁을 먹다가 ‘동해’ 이야기를 털어놨다. 빙 뉴엔이란 친구가 백악관에 청원을 해보라고 조언을 했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백악관 청원을 알지만 그때만해도 사정이 달랐다. 그 친구로부터 미국 시민이면 누구나 온라인으로 청원을 시작할 수 있고 30일 동안 2만5000명의 서명을 받으면 백악관에서 공청회를 열어 토론도 하고 이슈를 검토해 공식 답변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We the people’이라는 백악관 청원 웹사이트를 처음 알게 됐다. 당시 버지니아 한인회의 대외협력국장으로 봉사하던 터라 회장단과 상의후 청원 내용을 작성했다. 우리의 목적은 미 교과서에 동해를 병기하는 것이었지만 일단 설득력을 주기위해 왜곡된 바다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강력한 어조로 청원서를 작성하게 됐다. 나중에 협상이 들어오면 그때 가서 양보하고 ‘동해 병기’로 받아들이자는 계획이었다. 백악관 청원을 신청하자 이메일로 웹사이트 링크를 하나 받았다. 비공식 링크라 클릭해서 들어가기 전에는 아무도 볼수 없고 150명의 서명이 넘어야만 백악관 공식 웹사이트에 동해 청원을 알리는 박스가 뜨는 방식이었다. 청원 신청 후 3일이 지났는데도 150명의 서명을 받지 못했다. 이런 속도로는 30일 동안 2만 5000명의 서명을 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4일째 겨우 150명이 넘어 드디어 ‘동해’ 청원서가 백악관 웹사이트에 공식적으로 올려졌다. 그러자 워싱턴 지역 기자들과 한인 단체장들도 서명운동에 앞장 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주에서 서명 운동에 앞장서는 한인들의 숫자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5일째부터는 하루에 3~4000명이 서명을 하며 가속도(加速度)가 붙더니 불과 13일만에 2만 5천명이 넘는 미주 한인들이 서명에 동참하게 됐다.”
- 그때 일본에서도 맞불청원을 올렸는데
“우리의 동해 백악관 청원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자 일본 우익의 방해공작도 시작됐다. 처음엔 내 이메일과 페이스북이 수시로 해킹을 당하는 일이 생기더니 미주의 한 일본인이 동해 청원에 반대되는 내용의 백악관 청원을 올리더라. 어이없게도 대한민국 사람들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몰고 ‘동해’란 바다 이름을 포함시켜주면 안된다며 동해 청원을 공격하는 내용이었다. 미국 백악관 사이트에서 ‘사이버 한일전’이 벌어지면서 한국내에서도 서명운동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점점 늘기 시작했다. 온라인상 서명이기 때문에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도 백악관 청원에 동참했다. 원래 이 청원 운동은 서명지를 통하는 것이었는데 오바마 대통령 취임 후 온라인 청원으로 바꾸면서 외국에서 서명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시스템의 허점은 일본 우익 세력에게 유리했다. 미국내 거주하는 일본계 미국인들의 숫자는 한인의 반 밖에 안되는데다가 이 이슈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만약 온라인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일본은 목표를 달성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 우익 세력은 일본내에서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하루에 8~9백명씩 서명하게 했고, 30일간 간신히 2만5000명을 넘겼다. 우리는 30일간의 청원 운동에서 10만명을 넘어서 매우 고무됐다. 백악관 브리핑 룸에서 공청회(公聽會)가 열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동안 소식이 없더니 6월 29일, 미 국무부가 갑자기 동해 백악관 청원에 대한 답변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미 국무부는 일본해 단독 표기를 인정한다’는 기존의 입장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백악관 공청회는 생략하고 일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 교육 문제로 청원을 시작했는데 미 교육부 대신 국무부가 부적절한 검토를 하고 엉뚱한 답변을 내놓은 꼴이었다.”
- 그해 백악관 2차청원운동은 개인 자격으로 추진했는데
“국무부 발표이후 한인사회 일각에서 더 이상 하는건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거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2012년 8월 10일 백악관 2차 청원 운동을 통해 백악관과 국무부를 압박하기로 했다. 당시 대선이 열리는 해였기 때문에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내용을 적어 오바마 행정부와 정면 대결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청원 내용을 가족 중 두명의 변호사(매형과 조카)에게 내용을 검토해 줄 것을 부탁했다. 두 사람이 깜짝 놀라며 청원을 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내용이 너무 직선적이라 난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용기를 내도 오바마는 미국의 대통령이고 나는 힘없는 한국계 미국 시민일뿐이었다. 겁이 덜컥 났다.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최고 통수권자와 정면대결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판단인가? 내가 왜, 무엇 때문에 혼자서 무시무시한 위험을 안고 동해를 찾으려고 애써야 하는가? 솔직히 많이 흔들렸다. 하지만 포기하려는 마음이 들 때마다 아들이 “Sea of Japan”이라고 대답했던 바로 그 순간이 떠올랐다. ‘내가 여기서 포기한다면 아들은 물론이고 앞으로 수많은 한인 2세, 3세 아이들이 영원히 동해를 일본해로 배우게 될 것 아닌가?’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됐다. 오랜 고민과 갈등 끝에 결국 한번 밀어부쳐 보자는 마음으로 백악관 2차 청원을 하게 됐다.”
아래는 피터 김 회장이 백악관에 2차 청원한 내용이다.
<오바마 정부는 백악관 청원 기능을 본인의 2012년 대선 선거운동에 남용하는 것을 중단하고, 즉각 “동해표기” 청원서에 답변하라.
- 2012년 3월 22일, 나는 미국내 아주 심각한 교육문제를 발견하고 백악관 청원을 신청했다. 이 청원서에는 10만2043 명이 동참해 서명했다.
- 그러나 2012년 6월 29일, 미 국무부가 이 교육 이슈에 대해 부적절하고 불만족스러운 답변을 발표했다.
- 그 후, 백악관은 답변에 항의하는 이메일과 전화를 완전히 무시했다. 결국 서명자 10만2043 명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 그런데, 백악관은 오바마 대통령의 활동을 선전하는 이메일들을 나에게 계속해서 보내고 있다. 최근에는 오바마 지지자들로부터 많은 이메일들을 받는다. 왜?
- 당신은 나의 이메일 주소를 당신의 지지자들에게 공개해 주었는가? 백악관은 청원 시스템을 남용하는 것을 중단하고, 즉각 ‘동해표기’ 청원서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하라.
성난 10만2043명의 청원 서명자들이 백악관의 적절한 답변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목소리가 백악관에 의해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 2차 청원운동은 어땠나
“1차에서 10만명이 넘었는데도 결과가 안좋았기때문에 2차에서 호응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공화당 대선후보로 나온 미트 롬니 후보 지지자들의 페이스북을 있는대로 찾아서 청원내용을 올리고 도움을 호소했다. 3일 밤을 새운 후 지쳐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 반가운 소식이 날라왔다. 페이스북에 올린 호소문을 봤는지 백악관 참모가 만나서 대화해 보자는 이메일을 보내온 것이다. 그동안 내가 보낸 모든 서신과 전화, 이메일을 철저하게 무시하던 백악관이었지만 대선을 3개월 남겨놓고 오바마 대통령이 행정부 자산을 남용(濫用)하고 있다는 점이 이슈화 된다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우선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한인들의 목소리를 잠재워 놓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후자라는 아태계 국장을 만나 얘기를 했다. 내 얘기를 듣고 그쪽에서는 조용히 있는 조건으로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대선까지 시간만 벌자는 의도일 수도 있어서 거절했다. 결국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다음날인 11월 8일 교육부 데보라 데슬리 차관보가 공식 답변을 보내왔다. ‘한인들의 요구 사항인 교과서 동해 병기를 검토했지만 교과서 수정에 대한 권한은 연방 정부에 없고 각 주정부와 지방 정부에서 교육자들과 출판사가 함께 결정을 하는 상황이니 주정부와 지방 정부의 정치인과 교육 관계자들을 만나 교과서 수정 과정을 진행시켜 나가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 두 번의 실패를 한 셈인데 포기하고 싶지 않았나
“왜 아니겠는가. 동해 병기 운동은 불가능하다는 느낌까지 강하게 받았다. 이 정도 했으면 최선을 다했는데 더 이상 뭘 하겠나. 스스로 위로했다. 미 교육부 차관보의 공식 답변을 받은 것만으로 성과라면 성과였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 일을 전담할 조직을 구성하기로 했다.늘 마음속으로 필자를 성원하며 뜻을 같이해온 사람이 여럿 모였다. 회장직은 내가 맡고 은정기, 이준호 등 5명의 이사들이 동참해 2012년 12월 19일 사단법인 ‘미주 한인의 목소리(Voice of Korean American)’를 등록했다. 문제는 예산이었다. 마침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도 있어 모국도 방문하고 정부 관계자들을 만났지만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 없었다. 정말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바쁜 사회생활을 하며 따로 시간을 내서 동해병기 시민운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예산도 없이 어떻게 막강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성공시킬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날 밤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됐다. 아들 크리스가 꿈속에서 큰소리로 ‘Sea of Japan(일본해)’을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깬 것이다. 그날 밤 한숨도 못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우리가 여기서 포기한다면 앞으로 미주의 우리 한인 2세3세들은 영원히 ‘동해’란 바다 이름을 배울 수 없게 될텐데… 아무래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밤을 꼬박 새우고 난 후 긴급 임원 회의를 소집하고 ‘우리 모두 마음을 비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우선 우리가 살고 있는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의 공립학교 교과서에 동해 병기를 하도록 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모든 예산은 임원들 사재로 충당합시다. 비록 얼마 되지는 않지만 나의 전 재산을 내놓겠습니다’라고 호소했다.“
- 그런 어려움속에서도 결국 역사적인 동해병기법안이 통과됐는데 어떤 의미가 있나
“비록 미주동포들의 근본 뿌리는 대한민국이다. '동해'는 선조들이 2000년 넘게 사용해 왔고 대한민국 애국가 첫 구절에 나올만큼 중요한 우리의 바다 이름이다, 이런 중요한 바다 이름을 다시 찾아와 우리 한인 2세, 3세들이 학교에서 '동해'라는 이름을 배우고 타민족 아이들도 가르쳐주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수많은 민족들이 모여 살고 있는 미국에서 한인들은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본 적이 별로 없다. 버지니아주의 15만 한인들이 하나로 결집(結集)하여 막강한 일본 정부의 로비를 이기고 동해 병기 법안을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키자 미 주류사회는 물론이고 타민족들도 깜짝 놀랐다. 주류사회와 타민족이 한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동해 병기 법안 통과는 미국에서 한인들의 위상을 널리 떨친 결과인 것이다. 한인 후손들에게도 하나로 뭉치면 이루지 못 할 일이 없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미국에 이민와서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1세와 1.5세들이 힘을 합쳐 큰일을 해냈는데,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의 언어와 문화를 잘 이해하는 후손들이 얼마나 더 큰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 교훈과 자신감은 향후 한인 후손들이 주류사회에서 미국 사회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위치로 도약할 때 매우 소중한 기반이 될 것이다.”
피터 김 회장은 지난 3월에도 2017 국제수로기구 총회를 앞두고 3차 백악관 청원운동을 벌여 10만명(108,240) 고지를 또한번 넘어섰다. 미 정부를 압박하여 국제수로기구(IHO)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한 작전이었다.
- 많은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동해병기가 50개주로 확산되려면 갈길이 먼데
“버지니아주 의회에서 법안통과전에 인접한 메릴랜드주에선 교육위원회 차원에서 동해병기가 관철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의회 법안통과는 상징적인 것이다. 모든 주에서 법안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메릴랜드와 버지니아를 주요 타겟으로 한 것은 '일본해' 단독 표기를 고집하는 미 연방정부에 큰 압박을 주기 위해서다. 미 연방정부 공무원들은 대부분 메릴랜드주나 버지니아주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동해'를 배우게 되었는데 그 부모들이 국제회의에 가서 '동해 병기'에 대한 대한민국의 주장에 쉽게 반박하거나 반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 스스로 모순(矛盾)된 행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가지 중요한 것은 버지니아주 공립학교에 납품(納品) 되는 모든 교과서들이 미국내 50개주에 자동으로 퍼진다는 사실이다. 사회학 교과서 제작시 주별로 다른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미국내 공립학교에 수십만권씩 교과서를 납품할 수 있는 대형 출판사는 6~7개에 불과하다. 이들이 한번 수정하면 그 교과서가 50개주의 공립학교에 납품이 된다. 따라서 조만간 미국내 50개주의 모든 공립학교에서 '동해 병기'로 업데이트 되어 있는 교과서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 그건 놀라운 소식이다. 그렇게 되면 미연방정부의 입장도 언젠가는 바뀔 수 있고 국제수로기구도 동해를 공식 표기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이 생길 것 같다
“그렇다. 이젠 시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로비회사를 고용해서 반대 활동을 은밀히 수행하고 있다. 우리가 끊임없이 동해병기 시민운동을 해나가야 하는 이유다. 버지니아 동해병기법안은 다른 주에 살고 있는 미주 한인들에게도 크나큰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동해 병기 캠페인이 아직까지 국제수로기구에서 성공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미국 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일본해 단독 표기'만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주 250만 한인들이 하나로 뭉칠 수만 있다면 미국 정부의 입장도 '동해 병기 지지'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15만의 버지니아주 한인이 하나로 결집해 동해 병기법을 통과시켰듯이 미주 250만 한인들이 미국 정부의 입장도 거뜬히 바꾸어 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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