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흥사단 사료발굴
美대통령에 친서 전달 밀명
Newsroh=노창현기자 newsroh@gmail.com
110년전 헤이그 밀사들이 미국에서도 독립운동의 밀명(密命)을 받고 입국한 사실이 밝혀졌다.
미주흥사단 윤창희 위원장은 27일 ‘글로벌웹진’ 뉴스로와의 인터뷰에서 “헤이그 밀사중 이상설(李相卨)과 이위종(李瑋鍾) 두분이 1907년 8월 1일 뉴욕항을 통해 입항한 기록을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 미국에서의 중대한 독립운동의 밀명을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발표했다.
왼쪽부터 장철우 전위원장 장제니 단우 윤창희 위원장
미주흥사단의 윤창희 위원장과 장철우 전 위원장, 장제니 단우 등 3인은 이날 발굴한 사료를 공개하며 “이준(李儁) 열사가 헤이그에서 분사한 후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후 미국에 입국해 고종의 친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려 했다”고 밝혔다.
헤이그 밀사 3인은 1907년 6월에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해 한달여간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부당성을 알리며 제국주의 일본의 야욕을 고발했으나 일본과 열강의 방해로 회의 참석이 거부되는 등 뜻을 이루지 못했다. 7월 15일 이준 열사가 48세의 나이로 현지에서 순국한후 두 사람은 8월 1일 뉴욕항에 입항했다.
미주흥사단 윤창희 위원장은 “두 분이 미국에 온 것은 고종의 또 다른 특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뉴욕 엘리스아일랜드(Ellis Island)에 입국할 때 미국 이민관이 쓴 내용에 나와 있다. 입국 서류를 판독한 결과 직업란에, ‘Imperial Mission’ 즉 황제의 특사라고 적었고, 최후 여행 목적지를 워싱턴(Washington, D.C.)로 쓴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윤 위원장은 “이들이 워싱턴에 간 것은 당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만나 대한제국의 억울함을 호소하라는 것이다. 이상설 일행의 헤이그 특사는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 영국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 방문의 의미가 독립운동에 있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는 데 있다고 확실히 말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1907년 8월 27일 대한매일신보엔 “황제폐하께서 우리들을 파견할 때에 헤이그 회의에만 참석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미각국에 다니면서 한국이 지금 일본의 압박을 당한 상황과 독립 자주권을 행사 못하게 된 일과 일본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일을 일일이 설명하라는 명령을 받들어… 지금 우리가 미국에 먼저 가, 일본이 한국에서 강제로 체결한 1905년 신 조약은 황제의 승낙이 없으므로, 와싱톤으로 직행하여 대통령을 만난 다음에 각 도시를 일일이 방문하여 미국으로 가서 거사할 때에는, 일반 백성들이 모두 협력할 것”이라고 기술됐다.
당시 두사람은 한국의 항일운동을 적극 지원한 헐버트 선교사와 동행했다. 고종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헐버트 선교사는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온 주인공이다. 헤이그 밀사는 헐버트 선교사의 주선으로 기자회견을 한 후 고종황제의 친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이 역시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미국의 다른 도시들과 유럽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윤창희 위원장은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미국에 보낸 것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과 미국이 맺은 1882년의 ‘조미 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을 통해 일본의 침략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과 태프트-가츠라 밀약을 맺고, 필리핀을 미국이 취하고, 한국은 일본이 지배한다는 식민지 분할 협상을 하고 있었기때문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상설 특사의 면담을 거절한 것이다. 힘없는 나라가 먹히는 식민제국시대의 한복판에 한민족의 운명이 놓였던 것이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의 뉴욕항 입국 서류를 보면 이들은 영국 런던에 들러 1907년 7월 24일 머제스틱(Majestic) 호로 영국을 떠났다. 헤이그 밀사 대표인 이상설은 영문 이름이 Sang Sul Yi로 적혀 있는 것으로 봐서 다른 영문 문서에 나오는 Sang Sul Lee는 맞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위종 부사의 영문 이름은 특이하게도 Oni Tjyong Yi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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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뉴스>
해외에서 계속된 이상설의 독립운동
1908년 2월 경에, 구미 각국의 순방 외교를 마친 이상설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주요 도시를 돌면서 한국 독립운동을 펼쳤다. 1908년 7월에는 박용만의 제의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대회에 이승만과 함께 러시아 한인대표 자격으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승만이 연해주 대표로 참가한 것은 특이한 일이다. 박용만은 헤이그로 윤병구(尹炳求) 목사와 송헌주(宋憲澍)를 파견하여 헤이그 밀사를 돕기도 하여 이상설과 인연이 있었다.
1909년 1월,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KNA)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지방회를 설치하였고, 2월에는 미국에 있는 전체 민족단체들이 대한인국민회 이름 아래 하나로 합치는 거사(擧事)가 있었다. 이는 미주 지역의 한민족 독립운동에 새로운 막을 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미주한인사회는 대한인국민회를 최고통일기관으로 일사분란한 조직체를 갖추고, 해외독립군기지 개척에 박차(拍車)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909년 4월 대한인국민회는 이상설과 총회장 정재관을 원동전권위원(遠東全權委員)으로 임명하여 러시아로 파견하였다. 정재관은 바로 도산 안창호, 이강 김성무와 같이 공립협회를 창립한 바 있다. 1905년 미국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한 도산, 이강, 정재관, 김성무 등, 4인이 시베리아에서 1909년 경, 독립운동을 같이 벌인다는 것이 특이한 일이다. 국민회에서 이상설과 정재관을 시베리아로 파견한 목적은 바로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기지 개척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국민회 지방총회를 설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헤이그 특사 이상설은, 1909년 4월 22일, 샌프란시스코 항구를 출발하여, 7월 14일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다. 선생은 봉밀산 밀산지역 근처에 최초로 한인촌을 세우고 군대를 양성했다. 그가 세운 마을 이름은 한흥동(韓興洞), 즉 한민족을 부흥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1909년도에 이상설의 명을 받은 이승희가 밀산부의 봉밀산 아래 흥개 호반에 45방(方)의 토지를 사들여 100호를 정착시켰다.
1910년 6월 21일에, 이상설은 연해주에서, 의병장 유인석, 이범윤, 이남기 등과 의병 세력을 통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하여, 고종이 망명하기를 요청한다. 동년 8월에는 ‘성명회’를 조직한다. 1911년 6월에는 권업회를 발족하여 연해주에서 1914년까지 활동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였다. 1914년에 대한광복군정부를 창설한 후에 정통령에 선출되었고, 이는 3.1운동전의 최초의 망명정부로 기록되고 있다. 1915년에는 상해에서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등과 신한혁명당을 창당하고 본부장직을 맡아 일하였고, 1917년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순국(殉國)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