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 독립자금 지원 공로 등으로 건국포장 받아
(마이애미=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서정시인 영랑 김윤식(1903~1950) 선생이 3·1운동 참여 99년 만에 독립유공자가 됐다.
▲ 김영랑 시인 |
김영랑 시인은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정부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 177명의 명단에 포함됐다. 그는 이날 3·1운동에 앞장서고 독립자금을 지원한 공로 등으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영랑은 휘문의숙 3학년 때(16세)인 1919년 3·1운동에 참가 후 즉시 고향인 전남 강진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귀향 중 왜경에 체포돼 6개월 동안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일제 강점기 내내 항일의식 속에서 '독(毒)을 차고', '거문고', '춘향' 등 항일 시를 쓰던 그는 독립만세시위를 기도한 전력 때문에 경찰들이 생가 대문에 비치한 순찰함에 도장을 찍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일제 당국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다.
하지만 끝내 신사참배, 삭발령, 창씨개명 거부 등으로 항일 자세를 굽히지 않자 당국은 자녀들의 학교 교사들까지 동원하여 “창씨를 안 하면 다음 학기부터는 학교에 못 온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라!”며 협박을 계속했다.
마이애미에 거주하는 영랑의 직계 아들에 따르면, 견디다 못해 울며 창씨개명을 하자며 보채자 “그래, 알았다!”고 했을 뿐 끝내 신념을 꺾지 않았고, 자녀들은 일본식 이름 4자를 가진 학우들에게 3자 이름을 가졌다며 조롱을 받았다.
영랑은 1944년 부친의 병세가 악화돼 임종이 가까워지자, 앞으로 쓰게 될 부친의 비석 비문 중, 부친 이름 앞에 '조선인'이라는 글자와 상석에는 '태극 문양'을 새겨 경찰의 눈에 띄지 않게 숨겨놓는 등 발각되면 감옥행일 수밖에 없는 일을 감행했다.
또 백범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 광복군에 군자금을 대는 등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했다.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으로 불릴 정도로 한국 시문학사에 쌍벽을 이룬 순수서정시인 영랑은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변영로 등과 함께 ‘시문학파’로 활동했으며,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 등을 비롯한 주옥같은 시 86편을 남겼다.
정부는 그의 시문학을 높이 평가, 지난 2008년 대한민국 최고 문화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