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캐나다 캘거리로 이민 온 정형식씨는 평생 가슴에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왔다. 6살 때 잠시 외출했다가 같이 따라 나온 네살박이 여동생을 미쳐 살피지 못해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정씨의 부모님과 두 아들 (정형곤 76세, 정형식 68세)은 동생을 찾아 헤메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평생 한을 안고 살게 되었다. 특히 정형식씨는 동생이 자신을 따라나선 것이기에 더 큰 죄책감에 시달렸어야 했다.
동생을 찾고 싶어도 원체 어린 나이였고 이름 하나만 알고 다른 인적 사항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 호적에도 올려지지 않은 상태라서 아무리 수소문을 해도 찾을 방법이 없었다. 83년도 KBS에서 실시했던 이산가족 찾기에도 나가보았으나 소득이 없었다.
지금에서야 83년 당시를 되짚어보니 동생은 첫아이를 키우고 둘째를 임신 중이어서 그 방송을 하루 종일 볼 수 있는 상황이 안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픈 사연을 가슴에 안고 지내던 중 정형식씨가 지난 14년도에 모국을 방문했을 때 형님의 제안으로 경찰청 실종가족지원센터를 방문해 실종 신고를 하고 DNA검사를 해서 등록했는데 그 후로 지금까지 7년이 흘러도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동생 찾기를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올해 3월 드디어 모국의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동생을 찾은 것 같긴 한데 유전자 검사가 한번 더 필요하다고 했다. 정씨는 여기서 검사를 해서 보내주어야 하는 줄 알았더니 경찰서에서 밴쿠버 총영사관 쪽으로 유전자검사 키트를 보냈고 그걸 캘거리 담당자가 받아서 자택을 방문해 검사를 하고 결과물은 영사관측에서 외교행랑을 통해 모국 경찰서로 보내주는 절차를 밟았다.
첫 전화를 받고 거의 일주일 동안은 식사를 해도 맛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고 정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고 나서도 한 달이 넘도록 연락이 없어 애타게 기다리던 정씨는 영사관과 경찰서에 연락해 보았으나 진행 중이니 기다리라는 말만 들었다.
그러다가 지난 5월에 유전자가 99.9%가 일치한다고 영사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첫 통화는 그로부터도 한달 반이 지난 7월 4일에서야 경찰 입회 하에 첫 화상통화를 할 수 있었고 형님인 정형곤씨도 그날 처음 여동생을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 감동적인 소식은 모국에도 전해져 연합뉴스에서 특종으로 다루어 보도가 되었다.
첫 만남 이후에는 경찰 측에서 양쪽에 서로의 연락처를 전달해주어 지금은 자유롭게 통화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66세 할머니가 된 동생 진명숙씨(경기 군포 거주)는 어린 나이에 가족들을 잃고 인천 무추홀구에 있는 보육원을 거쳐 충남에 거주하는 한 수녀에게 입양되었고 이후 영세를 준 신부님의 이름을 따라 ‘진명숙’으로 성을 바꾸었다. 명숙씨는 성인이 된 후에 가족을 애타게 찾다가 유전자 등록을 19년에 하면서 가족 상봉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정씨는 결혼해서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
명숙씨는 천주교의 보살핌을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데 우연히도 두 오빠도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딸을 잃은 슬픔을 안고 살아갔던 부모님은 오래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 이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눌 수는 없었다.
정형식씨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평생 한쪽에 무거운 짐이 있었는데 그것을 덜게 되어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모국의 경찰청 실종가족지원센터 관계자 분들과 밴쿠버 총영사관 특히 지원을 아끼지 않은 한동수 영사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전하며 “코로나로 인해 당장 동생을 보러 달려갈 수는 없지만 상황이 되는대로 출국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김민식 기자)
연합뉴스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