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가 가장 부유했던 시절 가장 큰 독자층이었던 여성.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글: Shannon Rupp/TheTyee.ca
번역: 이상은 기자/코리안 뉴스
영국 미디어에서 보도한 영국 정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성보다 여성은 시사에 관해 관심이 없다고 전한다. 특히 공정하고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를 추구하는 여러 국가들 가운데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이 보도 이후 많은 여성은 사실이 아니라고 심하게 반발하였지만, 나는 같은 여자로서 이 보도가 지극히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는 신문의 (신문이라는 미디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시사”를 가장 많이 보도하는 업이기 때문에) 독자층을 조사해본 결과, 여성은, 부유한 백인 남자가 (전형적 편집인의[editor] 유형) 뉴스(시사)라고 생각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으로 확정이 될 만큼 독자층이 적다.
여성 독자는 기업형 신문의 계속 줄어들고 있는 독자의 3분의 1밖에 안된다. 1970년도부터 시작된 독자 감소는, 현재까지 여성 독자가 남성 독자보다 더욱더 빠르게 없어지고 있다. 여성 독자는 언제나 기업형 신문에게 돈을 잘 벌 수 있게 해준 주 고객이었기에 여성 독자의 감소는 신문사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가져다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문사는 이런 여성 독자 감소의 이유를 연구하였고, 기업적 기자의 기사와 (남성적), 잘못된 시장조사로 크게 두 가지 문제점으로 나눌 수 있었다.
현재 신문사의 남성적 기사 성향을 가장 잘 설명하는 예로는, 런던 타임스에서 내보낸 이 헤드 라인 기사가 아닐까 싶다. "Murray, 영국의 77년간의 기다림을 끝내다"
위 헤드라인은, 세계에서 가장 큰 단식 테니스 경기인 Wimbledon에서 스코틀랜드의 남자 Andy Murray가 우승한 것을 기념하는 기사였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Murray 이전에 단식 우승 선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3번씩이나. 1936년 남성 테니스 선수가 Wimbledon에서 우승한 후 3명의 여성 테니스 선수가 단식 테니스 결승에서 우승하였고, 가장 최근으로는 1977년, Virginia Wade가 그 영광을 가져갔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런던 타임스는 이러한 보도를 하였다.
위 보도가 나간 후, 뉴욕에 있는 페미니스트 (남녀평등주의자) Chloe Angyal은 트위터를 통해 그녀의 생각을 이렇게 전했다. “Andy Murray는 정말 영국의 77년 만의 Wimbledon 우승이 분명하다. 물론 여성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편집장은 더 여성스러워야 한다?
필자는 현대 과학 기술과 더욱 친근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하지만 아직 자유롭게 소셜미디어나, 편리해진 정보 공유 시스템을 사용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나는 Angyal가 올린 트위터를 라디오를 통해서 전해 들었다 (글이 올라간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라디오에서 보도되었다). 나는 기자이기 전에 열렬한 테니스 팬이다. 내가 젊었던 시절부터 시작한 테니스는 지금까지도 내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스포츠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나는 1977년 Wade의 Wimbledon 우승을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런던 타임스의 위 헤드라인을 읽고 내 기억을 잠깐 의심하게 되었다. 그때 Wade가 영국 이외에 다른 나라로 참여했었나? 라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위에 설명된 의심이란, 내가 편집장으로서 자주 겪는 일 중 하나이다. 오래전, 기자가 보도하는 사실과 편집장이 알고 있는 사실이 일치하지 않았을 때에 수많은 과정을 거쳐 진실을 찾아내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나처럼 이런 일을했던 사람은 언제나 머릿속에 수많은 상식(사실)으로 빼곡히 차있다.
하지만 런던 타임스의 헤드라인 기사를 접한 뒤 나는 내 기억을 의심하게 되었지만, 시간관계상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며칠 후 친한 지인들이 위 헤드라인 기사를 언급하며 얼마나 저널리즘의 수준이 떨어졌는지 투덜거리고 있을 때 알수 있었다. 내 기억이 맞았다는 것을. Wade는 1977년 Wimbledon 단식 경기 우승자이며, Andy Murray 가 77년 만에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신문사의 입장도 이해한다. 독자층이 줄어들면서 직원 감축이 절실히 필요했고, 그 대상은 대부분이 편집장과 같이 고임금을 받고 있는 상급 직원이었다. 만약 편집장 중 Wade가 승리했던 시대를 기억할 만큼의 연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런던 타임스 스포츠 부서에 있었다면 분명 이러한 기사는 보도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직원 감축으로 머릿속에 수많은 상식이 있는 편집장은 사라지고 젊은 세대층이 장악하여 일어난 일 일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신문사에서 이루어진 세대교체가 아니라, 편집부서에 Wade를 기억하기에 충분히 여성스러운(?) 편집장이 없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Wade의 우승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 당시 나도 테니스를 즐겼으며, 그리고 Wimbledon이라는 경기는 나에게 아주 큰 관심거리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Wade를 가장 뚜렷이 기억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남성이 지배하고 있는 스포츠 섹션에서는 1977년 Wade의 우승을 나처럼 기억하고,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 있을까?
여성독자가 원하는 것 (읽고 싶은 것)
아무리 생각해도 참 모순적인 점은 바로 광고주가 가장 원하고 찾는 독자는 여성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신문사는 1970년부터 지금까지 아주 공격적인 형태로 여성 독자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이 문제는 신문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큰 이슈이다. 토론토 마케팅 컨설턴트 Joanne Thomas Yaccato는 2004년, 이 문제에 대해 “80%의 소수집단: 여성 소비자 세계에 도달하다,” 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현재 우리 사회 속 대부분 상품은 여성이 구매하고 있다. 또한 남성적 상품이라고 생각되는 자동차 관련 제품, 컴퓨터, 그리고 스포츠 장비의 절반까지 여성이 남성을 대신해 구매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추세에도 남성 상품을 판매하는 대부분 기업은 오로지 남성에 그들의 마케팅 전략을 맞추고 있으며, 여성은 마치 소수 구매자로 판단하고 있다.
몇가지 업계의 마케팅 전략으로 남성에 맞추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되지만, 신문사는 절대로 아니다. 신문업계가 가장 부유했을 때는 바로 여성 독자가 많이 있었을 때이다. 오래전부터 여성독자는 중요한 뉴스에는 관심이 없다고 판단됐지만, 여성 독자는 언제나 쇼핑에 돈을 썼다. 그리고 상품을 파는 기업은 (광고주) 신문사에 이러한 엄청난 구매력을 가진 집단을 움직일 수 있을 만한 기사를 내보내길 강요하였다.
결국 신문사는 여성 독자가 좋아할 만한 “아이디어,” “삶,” “예술 및 연예”등의 섹션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여성 독자를 위해 이러한 새로운 섹션이 생기기 이전, 신문 속에는 공감을 형성하는 (human-interest) 기사가 몇 주 동안 연재되었으며, 책을 소개하는 글, 연극/영화 리뷰, 여행 일기, 소설 등 여러 가지로 여성 독자들이 읽을 만한 기삿거리가 제공되었다. 그리고 여성 독자는 이 기사를 읽었다. 매우 많이. 또한 1850년도 당시, Women’s club news라는 지면도 활용되었다. 이 지면에는 큰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글로 채워졌다. 가장 큰 예로는 여성 투표권 문제가 거론되었으며, 이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기사가 여성 독자를 위해 보도되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 Women’s Club News 지면에 보도되는 뉴스는, 아무리 큰 사회적 이슈를 담고 있는 기사여도, 실제로 뉴스로 취급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유한 백인 남자는 (전형적 편집인의[editor] 유형) Women’s Club News에 들어가는 기사를 뉴스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소위 여성 독자를 위한 지면이 소개되었을 당시, 신문사는 이 지면을 통해 여성 독자를 끌어모아 많은 이익을 보려고 계획하였고, 대부분의 신문사는 실제로 가장 부유한 시기를 맞을 수 있었다. 물론 위 지면에 들어갔던 기사는 성차별적인 기사가 많았으며, 지면을 상품화시키기 위해 신문사는 여성 기자를 찾기 시작했다. Toronto Globe에 입사한 Sara Jeannette Duncan은 캐나다 최초의 정규직 여성 기자로서, 또 다른 여성기자 Lily Lewis와 함께 세계 여행을 하며 이들의 모험담을 2년 동안 연재하였다. 그때 당시 대부분의 여성 독자는 이국적인 장소에 대한 큰 호기심이 많았으며, 여기자 두 명에서 이 모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더 큰 이슈가 되었다.
우리는 신문에 나와 같은 사람이 비치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여성 독자는 신문사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가장 큰 고객이었기에, 살아남기 위해 신문사 발행인은 언제나 여성 독자를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1970년부터 큰 기업이 신문사를 매각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젊은 기자였을 때 나는, 도대체 왜 신문사가 여성 독자를 위한 기사를 점점 제외하고 있는지,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스포츠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여성의 업적을 무시하고 있는지 궁금하였다.
그리고 내가 들은 답은, 여성은 ‘주의 지속 시간’이 남성보다 짧으며, 사소한 것을 더욱 선호한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기자들은 여성 독자를 위해 기사를 더욱 짧게, 그리고 bullet point로 쓸 것을 지시 당했고, 될 수 있으면 연예인 뒷이야기를 쓰기를 권하였다.
여성의 관점을 더럽히다
내 눈에 신문사의 이러한 사업 정책은 자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 나는 여성이 원하는 것에 대한 시장 조사가 틀렸을 수 있다고 여러 편집장과 논쟁하였다.
신문사가 믿고 따르는 시장 조사 결과 이외에 여성에 대한 조사를 예를 들어본다면 분명 내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은 아주 열정적인 독자이다. 캐나다 통계청에(Statistics Canada) 따르면, 여성 독자는 잡지나 책과 같이 길고 아주 잘 쓰인 글을 읽는 것을 선호한다고 나와 있다. 또한 지난 20년동안 여성은, 남성이 논픽션을 (non-fiction) 읽는 양과 비슷하게 읽고 있으며, 소설은 남성보다 두 배나 더 많이 읽는다고 나타나 있다.
그리고 더 많은 여성이 정규 교육 과정을 마쳤다고 나와 있다. 만약 교육이 사람이 얼마나 똑똑하느냐를 판단한다고 가정해본다면, 신문사는 남성보다 더 똑똑한 여성 독자에게 좋은 글을 바치는 것이지, 여성 독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십 년 전 나는 나의 저널리즘 교수에게 위에 내가 제시한 사실을 그대로 전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여성은 전부 로맨스 책을 읽는 것일 거야,”라고 답하며 나의 의견을 무시하였다.
나는 그 교수의 대답에 입이 딱 벌려졌다. 뉴스실에서 (newsroom) 이러한 인격을 무시하는 말은 겪어 봤어도, 학교에서까지 경험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 교수는 Margaret Atwood, Margaret Laurence, Alice Munro, Carol Shields와 같이 세계적인 문학적 천재를 낳은 나라의 사람들이 하찮은 장르의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여러 편집장이 (남성 여성 모두 포함한)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만약 많은 여성이 중요시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어떠한 주제가 오로지 여성 독자의 관심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이슈로서 질이 떨어지고 뉴스실에 가서는 보도되지 않아도 되는 주제로 바뀐다는 것 같다. 하지만 정반대로 남성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가 있다면 (특히 스포츠), 이는 큰 뉴스로 판단된다.
즉, 나는 위에 설명한 이유로 남성보다 여성이 시사에 관심이 없다고 보도한 영국 정부의 조사 결과가 지극히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여성이 실제로 시사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미디어를 관리하고 있는 자들이 수십년에 걸쳐 “Murray, 영국의 77년간의 기다림을 끝내다”와 같은 기사로 여성의 시사 관심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